양무제 소연의 개혁과 지나친 불교 숭상 [71화]

"작은 현의 현령이 유능하면 큰 현으로 승진시키고 큰 현의 현령이 유능하면 이천석 관리로 승진시키라."


이런 양무제의 조명 덕택에 산음현령 구중부가 장사 내사, 무강 현령 하원이 선성태수로 승진하기도 했다. 위진남북조 시대, 유송과 남제에서 시행하던 오관五館을 일반 수재에게도 개방하고 정원에 제한을 두지 않았으며, 오관 출신 중 유능한 자들을 뽑아 바로 관리로 임명했다. 이 시책은 수나라 시기 과거제를 촉진하는 계기가 된다. 적어도 양나라 중기까지는 남조의 문학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활발하게 꽃을 피웠다.

또한, 관원이 되기 위한 교양 습득을 위해 학관을 세웠다. 오경 박사가 한 명씩 임명되어, 수백 명이 소속된 한 관을 담당했으며, 이 관에서 시험을 시행하여 우수한 학생을 관료로 발탁하였다.



기존의 구품중정법을 개정해 18개 체계로 재편하여, 귀족 계급화를 고착화한 폐해를 없애 재능있는 인물을 발탁할 수 있게 되었다. 양무제 소연은 제나라 말기에 무너진 국가 재건에도 착수했다. 유민에 농지를 제공하고 감세하였으며, 관료 제도와 법률을 정비했다. 대학을 설립하여 내정 정비와 문화 증진에도 노력했다.


이 시기, 북조 북위가 분열하여 동위와 서위가 다투고 있어, 남조에 개입할 수 없으므로 남조의 양나라는 안정적인 통치가 가능했다.


5세기 무렵 동아시아 지도5세기 무렵 동아시아 지도

양나라 = 소연.


이 공식처럼 양나라 치세의 대부분은 소연의 치세이니 원 컨츄리 맨(One-country man)에 해당한다 할 수 있겠다. 남조의 막장 황제들은 즉위하는 동시에 종친들을 도륙 냈는데 소연은 딱히 그럴만한 사람들이 없었다. 황통에 가까운 황족들은 그전에 다~ 죽어서 죽일 사람이라곤 제나라 마지막 황제인 소보융 정도였다. 물론, 15세의 소보융을 죽인다.


양무제 소연은 문학적 교양이 뛰어나 위진남북조 시대 서저팔우西邸八友 중 한 명이었고, 무예도 뛰어나 북위의 효문제 탁발굉도 그를 두고 이같이 말했다.


"소연은 용병에 능하다. 그와 교전하지 마라!"


소연은 내부적으론 명문 사족들을 대우하며, 문벌이 없는 집안 출신들도 과감히 중용했다. 7천 병사로 낙양을 점령한 진경지나 범운, 심약, 서면, 주이, 유약 등의 한문 출신들이 대표적이다. 외적 방비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천감 5년(506), 북위의 군대가 회수 남쪽을 약탈할 요량으로 군대를 파병했으나, 이들은 회수 일대의 양나라 군세가 엄정하자 그대로 퇴각했다.


천감 6년(507), 종리를 지키던 대장 양경종이 소연의 계책을 따라 화공을 구사해 북위의 10만 대군에 승리를 거둔다.


보통 7년(526), 위진남북조 시대 북조의 난이 일어났다. 6진의 난이 일어나자 회수 이북의 요충지를 점거한다.


동위는 서위와 양나라에게 거점지를 계속 빼앗긴다동위는 서위와 양나라에게 거점지를 계속 빼앗긴다

대통 3년(529), 진경지를 대장으로 삼아 선비족 원호를 낙양까지 호송케 하며 47전 전승을 거둔 것은 물론이고, 32개의 성을 획득한다. 이후 후경의 난이 벌어지기 이전까지는 서위, 동위 모두와 친교를 맺었다.



당시 남조 사회엔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군벌 출신의 발호로 지역 군진으로 사람이 몰리자 이들을 착취하는 군관과 세관들이 늘어났으며 농촌 사회의 인구 구성 비율도 무너져 농업 생산량도 크게 떨어졌다. 대대로 이어지던 위진남북조 시대 강남 세족들도 가세가 기울어 명문 사씨, 왕씨, 치씨 등은 서책을 팔아 곡식을 구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인 양무제 소연은 불교를 중시해 양나라 말기엔 승려만도 10여 만에 이르렀다.


국가 재정은 날이 갈수록 악화하였지만, 양무제는 3번에 걸쳐 이른바 사신捨身을 행했다. 대신들은 황제를 환속시키기 위해 3억여만 전에 달하는 돈을 갖다 바쳐야 했다. 사실 이는 양무제가 사찰을 대신해 재물을 긁어모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양나라 무제 환속. 신하들은 매번 거액의 돈을 이용해 황제를 데려왔다양나라 무제 환속. 신하들은 매번 거액의 돈을 이용해 황제를 데려왔다

당시 백제는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불상이나 경전을 요구했다. 한국 불교는 중국 강남의 불교를 이식한 이후 자체적으로 발전했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시기 일본에도 불교가 전해졌는데, 최초의 기록은 538년 쇼토쿠 태자 시기이다. 쇼토쿠 태자는 삼보를 공경하라며 적극적으로 불교를 수용하기도 했다.


중국 불교의 전파중국 불교의 전파


양직공도에 남은 백제 사신양직공도에 남은 백제 사신


당나라 두목杜牧은 강남춘이란 시를 통해 위진남북조 시대 양나라를 이렇게 표현했다.


千里鶯啼綠映紅(천리앵제록영홍),

水村山郭酒旗風(수촌산곽주기풍).

南朝四百八十寺(남조사백팔십사),

多少樓臺煙雨中(다소루대연우중).


여기저기서 꾀꼬리 울고 초록과 붉은색 어우러지며

강마을과 산마을에도 주막 깃발이 나부끼네.

남조 때 세워진 수많은 사찰

많은 누대가 안개비에 잠겨있네.


하지만, 불교를 위해 막대한 지출이 늘어났고, 그 부담은 농민에게 전가 되어 양무제의 지배력은 불안정해졌다. 무제는 실정을 만회하기 위해 북조에서 투항하는 장수들을 이용해 북벌에 나섰지만, 매번 실패한다. 이후 후계자를 둘러싼 분쟁이 일어나 양무제 소연의 통치력은 점점 힘을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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