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서거일 및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읽어보세요

 

서거일은 1910년 3월 26일, 사형선고일 2월 14일, 거사일 10월 26일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내용 출처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며, 1. 안중근 의사에 대해 2. 이토 히로부미 3. 안중근 의사 서거일 순서로 소개합니다. 천천히 정독해 주세요.

 

대한국인 안중근 의사

한국 독립운동의 영원한 상징 안중근은 처음에는 계몽운동을 펼치다가 1907년 국외로 망명하고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09년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 평화의 파괴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면서 민족과 인류의 구원 앞에 자신을 산화시켜 간 의사이다.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안중근은 문명 개화론자인 아버지 안태훈의 영향 아래 어린 시절을 황해도 신천의 청계동 산골 마을에서 학문을 수학하고 무술 연마에 힘을 기울이며 성장했다. 1894년 동학 농민전쟁 때에는 동학군의 공격으로부터 청계동을 지키는데 선봉으로 활약했으며, 1897년 프랑스인 빌렘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천주교에 입문하였다.

 

 

러일전쟁이 끝날 무렵 안중근은 아버지 안태훈과 상의하여, 중국 산둥이나 상하이로 가족을 옮겨놓고 항일투쟁을 전개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국내에서 계몽운동을 펼치기로 계획을 바꿨다. 1906년 봄, 진남포에서 삼흥학교와 돈의 학교를 통해 민족 교육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국채 보상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07년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 군대해산 등으로 나라가 위기를 맞자 국외 망명을 단행하였다. 북간도를 거쳐 연해주로 망명한 그는 각 마을을 돌며 의병 모집을 위해 힘을 쏟아 의병부대를 창설하였다. 그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국내 진입 작전을 전개하여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의병 활동을 지속하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1909년 초 단지동맹을 맺고 의병 재기의 의지를 다져 나갔다.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 (거사일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1909년 2월 엔치아 부근 카리 마을에서 동지들과 함께 단지 동맹을 맺는다. 안중근을 비롯한 12명의 동지는 태극기를 펼쳐놓고 각자의 왼손 무명지 첫 관절을 잘라 그 피로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 쓰고 국권회복과 동양평화 유지를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하였다.

 

 

단지동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와 엔치아를 오가며 의병 재건에 몰두하던 안중근은 그해 10월 중순 대동공보사 주필 이강으로부터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토가 제 발로 만주에 오다니! 이건 분명히 하늘이 준 기회'라고 여긴 안중근 의사는 10월 21일 의병 동지 우덕순과 함께 하얼빈을 향해 떠난다.

 

그곳에서 조도선 동지를 영입한 안중근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우덕순과 조도선을 채가구역에서 대기토록 하고 자신은 홀로 하얼빈에 와서 거사를 준비한다.

 

마침내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경 이토가 탄 열차가 플랫폼에 멈추고 마중 나온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 일행이 열차 안으로 들어간 지 20여 분 후 이토 히로부미와 수행원이 일본 총영사의 안내를 받으며 기차에서 내렸다.

 

이토 히로부미가 의장대를 사열하고 출영객들로부터 인사를 받던 순간 러시아 군대 뒤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안의사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가슴과 흉복부에 3발을 맞은 이토가 무어라 몇 마디 중얼거리며 쓰러지자 안의사는 혹시 다른 사람이 이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일행 중 일본으로 보이는 3명에서 다시 3발을 쏘았다.

 

 

이토를 뒤따르던 하얼빈 일본총영사 가와카미, 비서관 모리,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가 차례로 쓰러졌다.

 

이때가 오전 9시 30분. 저격 직후 러시아 헌병들이 덮쳐 넘어졌던 안의사는 곧장 다시 일어나 힘찬 목소리로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삼창하고 순순히 체포되었다. 안중근의 총탄을 받은 이토 히로부미는 수행의사 고야마가 응급처치를 했지만, 곧 절명한다.

 

 

이토의 죽음은 온 세계를 경악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일본에서는 주요 신문들이 호외를 발행하여 청천벽력과 같은 그의 죽음을 전했고, 국내외의 많은 애국지사와 국민들은 환호의 찬사를 보냈다. 중국은 흡사 자기들의 원수를 갚은 것처럼 기뻐했다. 그러나 국내의 일부 친일파들은 통감부를 방문하여 조문하고 사죄단을 파견해야 한다고 법석을 떨기도 했다.

 

안의사는 러시아 헌병대에 의해 체포되어 하얼빈역의 헌병분파소로 끌려가 간단한 조사를 받고 당일로 일본 총영사관으로 인계된다. 거사가 이루어진 곳은 러시아 관할구역이었으나 1905년 을사늑약으로 재외 조선인에 대한 재판 관할권을 일본에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안중근 의사 서거일 (사형선고일 2월 14일)

1910년 2월 14일 공판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일제에 의해 처음부터 의도된, 국제법을 무시한 부당한 재판의 결과였다. "사형"이라는 선고를 받자, 안의사는 "일본에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느냐?"고 미소를 지었다 한다. 안의사는 상고를 할 수 있었음에도 공소권을 포기한다.

 

 

안중근 의사가 의병장다운 기품을 잃지 않고 공소권을 포기하는 데는 어머니의 성원이 있었다. 면회를 가는 두 동생 편에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큰 뜻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니라"라는 말을 전함으로써 모친보다 먼저 삶을 마감해야 하는 안의사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사형이 확정된 이후 안중근 의사는 옥중에서 자서전 "안응칠 역사""동양평화론"을 집필한다. 그리고 자신의 소신과 철학을 담은 많은 붓글씨를 써서 주변에 나누어 주었다. 공소를 포기하면 동양평화론을 집필할 시간을 주겠다던 고등법원장 히라이시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3월 26일 사형이 집행되는 바람에 동양평화론은 미완성의 유고로 남게 된다.

 

 

3월 10일 중국에서 온 빌렘 신부로부터 고해성사와 영성체, 종부성사를 함으로써 종교인으로서의 의식을 마친 안의사는 형 집행 하루 전인 3월 25일 마지막으로 두 동생을 면회하였다. 안의사는 모친, 처, 빌렘신부 등에게 보내는 여섯 통의 유서를 전달하고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긴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옮겨 장례를 치뤄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라.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1910년 3월 26일 사형집행일. 뤼순의 하늘은 추적추적 봄비를 뿌리고 있었다. 평소처럼 아침 식사를 마친 안중근 의사는 어머니가 보내준 흰 한복으로 갈아입고 마지막으로 그동안 자신을 지성으로 돌봐준 간수 치바 도시치에게 한편의 글을 써주었다.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

 

안의사는 마지막 유언을 묻는 집행관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의 거사는 오직 동양 평화를 위한 것이었으므로 바라건대 이 자리에 있는 일본인들도 나의 뜻을 이해하고 피차의 구별 없이 합심하여 동양의 평화를 이루는 데 힘쓰기를 기원하오

 

그리곤 의연하게 교수대에 올랐다. 오전 10시 15분. 32세의 짧은 삶을 오로지 민족의 독립과 평화를 위해 살아온 민족의 영웅은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안중근 의사 서거일은 3월 26일입니다.

 

 

 

 

출처 : 안중근 의사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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