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위 영태후 대권 장악: 불교 사치가 일상이 된 북조 [72화]

풍태후 사후 진정한 황제가 되어 한화 정책을 추진했던 위진남북조 시대 효문제 원굉의 치세가 저문다.

북위 효문제 태화 21년(497), 20만 명의 군사를 동원해 제나라로 진격했으나 남제 남양 태수 방백옥의 복병계에 걸려 거의 죽을 뻔했다. 이듬해엔 제명제 소란이 죽자 국상이 있는 나라는 치지 않는다며 이내 철군했다.



499년, 효문제가 사망하고 황태자 원각이 즉위하니 이가 북위 선무제다. 선무제는 황숙 원희가 모반하자 원씨 종친을 불신하고 외숙인 고조를 신임했다.

그 배경엔 자귀모사의 원칙을 어기고 살아남은 그의 생모 영태후(호씨라서 호태후라고도 함)가 있었다. 자귀모사를 어긴 이 시기부터 북위는 점차 쇠락의 길을 걷는다. 고조가 붕당을 결성해 북해왕 원상, 청하왕 원역을 사사로이 죽이고 권위를 높이기 위해 촉을 공격하기도 했다. 물론 고조는 미련하고 우매한 인물이었다.



북위 영태후는 하주자사 호국진의 딸(호충화)로 10여 세의 어린 시절부터 입궁해 선무제 원각의 불경 강설 역할을 맡았다. 당시 자귀모사 관행 때문에 궁내의 비빈은 태자의 어머니가 되지 않길 원했는데, 영태후는 달랐다.


"천자에게 후계자가 없어서야 하겠는가?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황상의 후사를 생각하면 태자를 낳는 게 가장 좋은 일이다."


북위 선무제 원각과 황후 우씨 사이엔 아들이 있었으나 요절했고, 영태후가 낳은 아들의 서열이 가장 높았다.


경명 2년(501), 인부 55만 명을 동원하여 낙양을 대규모로 증축한다. 도성 바깥 측에, 동서 20화리(1화리 = 대략 1km), 남북 15화리에 이르는 외성을 만들었다. 그 내부를 동서남북으로 가지런하게 통하는 도로를 내었는데, 323개의 방坊으로 갈라 약 11만에 달하는 민가 외에 수많은 불교사원까지 수용하는 대도시로 변모시킨다.




정시 2년(505), 양나라 면동태수 전청희가 7군 31현 1만9천 호를 이끌고 내부했다.


정시 4년(507)엔 영녕태수 문운생의 6부가 귀부했지만 당시 북위 조정에선 특별한 움직임이 없었다.

연창 4년(515), 선무제 원각이 33세로 갑자기 병사하고 대신 최광, 우충, 왕현 등이 원후를 옹립했으니 그가 영태후의 아들인 원후 효명제다. 위진남북조 시대 자귀모사의 전통에 따라 당시 고태후는 생모 호씨를 죽이려 했으나 최광 등이 호씨를 보호해 간신히 목숨을 지켜낸다.



얼마 후, 고양왕 원옹 등이 고조를 사인성 아래서 목 졸라 살해하였다. 고조의 측근이던 조수, 여호 등을 죽인 후 고씨 일가를 주살하고 호귀빈을 황태비로 올리자 영태후의 수렴청정 시대가 시작된다. 고조는 스스로 발해수인渤海蓚人이라고 했는데 원래 고구려인으로 선비화 하거나 선비 출신으로 고구려화한 가계였다고 추정된다.


영태후는 대권을 장악하자 부친 호국진을 시중, 안정공에 봉하고 자신에게 상서할 땐 '폐하'를 쓰도록 하면서 스스로는 '짐'을 칭했다. 북위 역대 황제에게 올리는 대제大祭도 직접 주관했다. 영태후는 불교를 지나치게 숭상해 많은 돈을 들여 순금의 불상과 9층 높이의 90장에 달하는 부도를 만들었다. 불교 본존을 안치한 대웅전에만 승방이 천 칸에 달했다.




자금이 부족한 시기엔 6년 치 세금을 미리 징수하기도 했다.


"불교 불법이 중국에 들어온 이래 탑이 이처럼 높고 성대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자치통감 위진남북조 시대에서 지적한 대로 영태후의 지나친 불교 숭상 정책은 백성들이 스스로 승려의 길로 나아가는 계기로 작용해 생산과 군역에 종사하는 사람의 숫자가 나날이 줄었다.



희평 3년(518), 부친 호국진이 병사하자 사묘를 만들어 불교 극락왕생을 빌었는데 너무나도 사치스러운 묘였다. 그나마 효명제 원후와 영태후는 신하들의 직언에 대해선 경청했으나 그것이 전부였다. 용인술이 엉망이라 영태후가 총애하는 환관 유등은 사사로이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불경을 얻으려 노력도 해보았으나, 되돌아오는 건 국고의 낭비와 담당 관리들의 횡령뿐이었다.


당시 북위의 경제력은 너무나도 왕성해 영태후의 이런 사치도 국력에 큰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 종친들도 부유해져 고양왕 원옹의 경우 노복 6천 명, 악기가 5백 명에 달했고 한 끼의 식사를 위해 수만 전을 썼다.


하간왕 원침은 원옹과 부유함을 다투던 종친으로 준마의 말구유를 온통 은으로 만들었다. 모든 창과 문에는 방울과 여의주를 입에 문 옥제 및 금제 용봉을 매달았다.


북위 고구려 국경선북위 고구려 국경선


하루는 장무왕 원융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석숭을 보지 못한 게 한이 아니라 석숭이 나를 보지 못한 게 한이오!"


북위 영태후의 명을 받은 환관 백정이 용문산에 두 개의 큰 석굴을 만들려 했다. 24년 동안 18만2천 명이 이 석굴을 완성하기 위해 동원되었으나 끝내 실패했다.


영태후는 쉬지 않고 사묘寺廟를 건립해 민력이 피폐해졌고, 왕광이나 귀인들도 황태후를 따라 똑같이 낙양성 내에 사묘를 건립하니 마치 서진 초기의 모습과도 같았다. 그들은 사사로이 재물을 사용하는데 열광했고 백성들에게 베푸는 것엔 인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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