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사람 고환(북위 효무제 옹립)의 이주씨 일망타진 [77화]

북위 절민제 즉위

석 달 후, 건명 2년(531), 이주씨 일족은 광릉왕 원공을 새로 옹립하니 그가 위진남북조 시대 절민제이다.

이주천광은 관우, 이주조는 병주와 분주, 이주중원은 서주와 연주를 점거했고 이주세륭은 조정을 장악했다. 이전에 이주영에게 칭제를 권했던 고환은 이미 수만 명의 지휘권을 얻은 상황이었으며, 위진남북조 시대 발해군의 고건 형제, 봉씨 일가, 범양 노씨 일가, 조군 이씨 일가들의 사병과 연계를 성사시켜 이주씨 타도의 총수로 추대된다.



중흥 2년(532) 초, 고환은 효장제 살해를 이유로 군사를 일으켜 효무제를 옹립하고, 광하에서 이주씨 군사를 대파한다. 고환은 전마 2천 필에 병사 3만에 지나지 않았으나 휘하 고오조가 분전해 업성의 이주씨 20만 대군을 대파했고, 4월엔 곡사춘이 하교를 점령한 뒤 낙양의 이주씨 일당을 도륙했다.

이후 이주천광, 이주도율, 이주세륭, 이주언백 등을 잇달아 격파하자 이주조는 잔병을 이끌고 위진남북조 시대 수용군으로 퇴각한다. 얼마 후, 관중 일대의 이주씨를 공략해 이주세륭, 이주언백, 이주천광, 이주도율의 목을 베었다.


고환 vs 이주씨

고환 산동 일대로 입성


안국성 전투


광하 전투

한릉 결전

고환은 사방에서 적을 맞지만, 차례로 각개격파하여 승기를 잡음.



이주씨 몰락

고환과의 전투에서 모조리 패하며 기반을 상실한 이주씨. 하발악, 우문태, 후막진열 등의 도움도 소용 없었음.



이주조 세력 멸망

고환은 실질적으로 이주영의 뒤를 이은 이주조를 끝까지 추격하여 세력을 일망타진. 이주씨는 수용군에서 성장했는데, 하필이면 실질적으로 멸망한 곳도 수용군.


북위 효무제와 고환

고환이 옹립한 효무제 영희 년(533) 초, 고환은 이주조가 새해 초에 큰 연회와 회의를 열 것을 예상해 도독 두태에게 명해 급습케 했다. 이는 크게 성공해 이주씨의 중심부였던 병주와 진양을 완전히 제압한다. 이주조는 자진했고 이주씨 일족은 서쪽으로 달아난 뒤 다시는 재기하지 못했다. 고환이 옹립한 효무제는 북위의 마지막 황제로 북중국을 통일했던 북위의 마지막도 얼마 남지 않았다.


위진남북조 시대 고환은 발해 사람으로 발해 자체를 고구려의 요동과 접경한 요서 일대로 봤을 경우 고구려 출신일 가능성도 있다. 증조부 고호, 조부 고밀이 서진과 연나라에서 관직을 얻었으나 아버지 고수생은 집안을 돌보지 않은 한량이었다. 이에 대해 고환의 가계가 위작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굳이 고환이 중국땅에 나라를 세우며 발해 출신임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을까? 오히려 선비족이라면 이전 왕조도 존재하니 발해 출신이라 자신의 출생을 고쳐야 할 필연성이 약하다. 


고환은 어려서부터 변방의 군영에서 생장했다. 6진은 옥야(내몽골 옥원), 회삭(내몽골 고양), 무천(내몽골 무천), 무명(내몽골 사왕자기), 유현(내몽골 고양), 회황(하북성 장북)을 의미하며, 북위가 유연 등의 북방 유목민을 방어하기 위해 장병들을 주둔시킨 곳이다. 위진남북조 시대 6진 초기만 해도 이 지역의 장병들에 대한 처우는 좋았다.



특히 이 지역의 장병들은 국인國人으로써 나라를 방비한다는 최소한의 명예는 갖고 있었으나 효문제 이후 한화 정책이 시행되며 6진의 처우는 형편없어진다. 오히려 범죄자나 유배를 당한 관민들이 주둔하는 하찮은 곳으로 전락한다. 6진의 장수들 또한 군공을 세워 관직으로 나아갈 길도 사라졌으니 북위 말기에 이들의 불만은 극에 달해있었다.


고환은 처음 두락주와 선우수례의 반란군에게 몸을 맡겼다. 선우수례의 무리를 이어받은 갈영 밑으로 옮겼다가 탈출하여 이주영에게 의탁하게 되었다. 이주씨가 북위의 실권을 쥐고 여러 지방을 토벌할 때 고환은 주요 전투에 참여하여 비로소 두각을 나타내고 이주영의 횡사 전에 진주자사에 임명되는 한편 거병의 기반이 되는 갈영 투항병 통솔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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