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공명이 살던 곳은 어디? 삼국지 삼고초려 장소 융중대 위치

후에 융중대로 유명한 삼국지 제갈량(181~234)의 자는 공명孔明으로 원래 산동 낭야군琅句郡 양도현陽都縣(지금의 산동성山東省 근수현沂水縣) 사람이다. 삼고초려의 주인공인 제갈공명은 어려서 아버지(제갈규)와 어머니를 잃고 숙부(제갈현)를 따라 형주 지역으로 피난 와 있었다.


제갈공명은 17세 되던 해에 숙부가 죽자 몇 채의 초려草廬(초가집, 짚이나 갈대로 지붕을 인 집)를 짓고는 농사를 짓는 한편 친구와 만나 교류하면서 천하사를 두고 담론하고 있었다. (융중대가 괜히 나온 건 아니다. 친구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다)

유비가 제갈량 공명이라는 당대 최고의 전략가를 얻기 위해 관우, 장비를 대동하고 세 차례나 그의 초려를 방문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삼고초려로 유명)지만, 제갈량은 유비의 예우에 감동한 나머지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약속하고 삼국지 천하 통일을 위한 계책을 제시한다. 이 대책을 융중대隆中對 혹은 초려대草廬對라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갈량이 삼국지 유비에게 하는 말) 동탁이 낙양에 진격해 들어온 이후 천하 군웅이 각처에서 일어나 그 세력 범위가 주와 군에 걸쳐 있는 자만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조조를 원소에 비교하면 명망도 낮고 병력도 적지만 결국 원소를 타파한 것은 그의 지모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조조가 백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면 그와 다툴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삼고초려의 시작, 공명은 왜 조조에게 가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




손권은 장강의 천험에 기대어 있은 지 3대가 지났으니 백성들이 그에게 따르고 있고 재사들도 그가 힘을 발휘할 것을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와 연합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를 타파하기는 어렵습니다.


형주의 지세는 험요하여 북에는 한수가 있고 남으로 남해와 통하고, 동으로 오회와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는 파촉에 도달할 수가 있으니 이곳은 군대를 일으킬 만한 지방입니다. 그러나 형주의 주장 유표는 이 지방을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늘이 이 지방을 장군에게 주는 것이니 유표를 대신해서 이 땅을 차지하십시오. (융중대의 핵심)

또 익주는 이수난공의 천연 요새이고 토지가 비옥하여 물산이 풍부하니 이전부터 하늘이 내린 곳간이 있는 곳이라는 칭호가 있었습니다. (삼고초려의 핵심은 공명 본인의 출세와도 관련있다)


한 고조 유방이 이곳을 근거로 하여 끝내 천하 통일의 대업을 이룩했습니다.


장군(제갈공명이 삼국지 유비를 부르는 말)께서 만약 형주를 선점하시게 되면 이곳을 바탕으로 유장의 익주를 취하고 힘써 정치를 하여 국력을 충실히 한 연후에 손권과 연합하고, 서남 각 민족과 연합한 연후에 시기를 기다려 중원으로 나가면 통일 천하의 대업을 성취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즉, 제갈공명은 북방은 조조에게 양보하여 천시天時를 차지하게 두고, 남방은 손권에게 양보하여 지리地利를 차지하게 하며, 유비는 인화人和로써 형주를 취하고 뒤에 서천을 취하여 저 조조와 손권과 더불어 정족鼎足의 형세를 이룬 연후에 때를 기다려 삼국지 중원을 도모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유비는 그의 대책을 듣고 그 내용이 투명, 철저한 것에 감탄하면서 융중대를 기반으로 자기를 도와 천하 통일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제갈량은 유비의 간곡한 부탁에 감격한 나머지,

"장군께서 이다지 저를 대우해 주니 적은 힘이나마 다하여 장군을 돕겠습니다."

하고 산을 나와 유비를 따라 신야에 도착했다. (삼고초려는 지어냈을지도 모르나, 공명의 계산속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당시 제갈량이 몸소 농사를 지으며 은거하고 살았던 '초려'가 있던 곳이 어딘가 하는 것, 즉 궁경지躬耕地(스스로 농사지으며 기거한 곳) 문제가 현재 중국 사학계에서는 중요한 논쟁거리로 되어 있다. 궁경지가 제갈공명 살던 곳이기 때문이다.


삼고초려가 일어난 융중대의 장소가 어디냐는 것이다. 사실 이 논쟁은 일찍이 원대元代부터 시작된 것으로, 최근에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 논쟁은 더욱 격렬해지고 있다. 제갈공명 융중대 논쟁의 초점이 되는 곳은 두 곳이다.

현재 하남성 남양시南陽市 와룡강臥龍崗의 무후사武侯祠

호북성 양번襄樊의 고융중古隆中



지금 운영 중인 남양시 서남의 고융중 (제갈공명 거주지)지금 운영 중인 남양시 서남의 고융중 (제갈공명 거주지)


즉 궁경지가 당시 행정구역상으로 남양군 소재지인 완현宛縣(현재 남양시 서남)인가, 아니면 남양군 등현鄧縣 융중隆中(현재 양번시 양양 융중)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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