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 대군으로 진격한 동위 고환 - 5차 회전 옥벽지전 [83화]
- 한중일 역사/위진남북조 100화
- 2020. 6. 25.
옥벽지전(玉璧之戰)은 망산지전 이후 3년이 지난 546년. 동위 무정 4년(546), 서위 문제(원보거) 대통 12년(546)에 일어난다. 서위와 동위의 5차 회전으로 마지막 회전이기도 하다.
2월, 양주에서 우문중화가 토욕혼과 반란을 일으키지만 금세 제압된다. 이때 영천의 동위 후경이 형주로 진격하나 서위 조정은 이 역시 막아낸다.
10월, 동위와 서위의 마지막 회전이 벌어진다. 고환은 친히 10만 대군으로 분하 하류의 서위 요충지인 옥벽(지금의 산서 직현의 서쪽)을 겹겹이 포위한다. 서위의 장수 위효관에겐 고작 수천의 병사밖에 없었다. (위진남북조 시대 가장 처절했던 공성전)
고환은 서위의 분수 하류에 있는 주요 거점을 없애고자 밤낮으로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한편으로 성의 남쪽에 토산을 쌓고, 다시 십여 개의 지하터널을 팠다. 서위의 수비장수 위효관은 굳게 지키기만 할 뿐 응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토산보다 높은 누대를 쌓고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성을 타고 오르는 것을 막았다. 참호를 파서 동위의 지하터널과 연결했고, 참호의 바깥에 장작을 쌓아두고 지하터널에 불을 질렀다. 이리하여 동위의 병사들이 감히 지하통로로 공격하지 못 하게 하였다.
고환은 공성거를 이용하여 성벽을 부수려고 하였는데, 위효관은 베로 만자(幔子)를 만들어 공성거가 움직이면 바로 만자를 펼쳐서 공성거가 제대로 작용하지 못 하게 하였다. 고환은 병사들에게 죽간을 들고 위에 기름을 발라 만자를 불태우고자 하였다. 위효관은 긴 갈고리를 만들고 끝에는 칼을 달아서, 죽간의 끝을 잘라버렸다. 고환은 다시 20개의 지하터널을 팠고, 가운데 기둥을 두어, 불로 태우면, 기둥이 무너지면서 성이 무너지도록 하였다. 위효관은 나무를 쌓아놓고 기다려서 무너지기만 하면 바로 목책을 세우곤 하였다.
그리하여 고환의 군대는 여전히 성으로 진입하지 못했다.
위효관은 고환이 물길을 막자 물길을 바꿨으며, 토산을 쌓자 더 높은 나무다리를 만들었고, 땅굴을 파자 도랑을 만들어 차단하는 등 여러 계책을 모조리 막아낸다.
고환이 성벽 아래에 땅굴을 파고 기둥을 세운 뒤 불을 붙여 태우자 성벽이 무너졌지만, 나무 목책과 쇠뇌를 배치해 방어했고 동위가 만든 토산마저도 점령한다. 당시 이 전투에 참여했던 낙양가람기의 저자인 북제 양현지는 낙양을 둘러보며 이런 글을 남겼다.
성곽은 무너지고 궁실은 넘어지고, 사원은 불타 버리고 묘탑은 폐허가 되었다.
궁정 벽은 쑥으로 덮여 있고 거리는 가시덤불이 무성하다.
들짐승은 무너진 계단에 구멍을 파 살고 있고, 산새는 정원수에 깃을 튼다.
할 일없는 애나 목동들은 옛 대로를 배회하고, 농부나 늙은이들은 궁성문에서 기장을 베고 있다.
'맥수의 탄식'은 은나라의 옛 터전을 돌아본 고인箕子만의 것이 아니며 '기장밭에서 느낀 서글픔'은 진실로 주나라의 멸망을 실감케 하는구나.
북제(위진남북조 시대 동위의 후신)의 고환은 북위 수도 낙양에서 많은 사람을 업도로 옮겼는데 동위와 서위로 나뉜 이후 낙양은 두 국가의 경계로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게 되었고 이전에 이미 쇠퇴하기 시작했기에 당시엔 북위의 옛 영광을 찾아볼 수 없는 아주 초라한 도시에 불과했다.
당시 고환의 참군 조정이 성안을 향해,
"성안에서 위효관의 목을 베는 자에게는 태위의 벼슬과 개국공의 관작을 내릴 것이다. 또한 부상으로 비단 1만 필을 내릴 것이다!"
"고환의 목을 베는 자에게 이와 똑같은 상을 내릴 것이다!"
위효관도 맞받아쳤다.
동위군은 50여 일을 공격하는데, 병사들 중에 전사하거나 병으로 죽은 자가 약 7만에 이르렀다. 대부분이 성벽을 무너뜨릴 요량으로 성 아래에서 땅굴을 파다 전사했다. 시체로만 하나의 산을 만들 정도였다.
화가 난 고환은 이내 발병해 자리에 누웠다. 얼마 후 영채 한가운데로 커다란 별이 떨어지자 고환은 매우 놀라 철군한다. 서위는 방어전의 승리를 거두었다. 고위는 진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죽고 만다. 이때 나이가 52세이다.
철군 도중 위효관이 커다란 쇠뇌로 고환을 사살했다는 소문이 나돌자 고환은 군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중병인 몸에도 불구하고 제장들을 소집해 밖에서 주연을 베풀고 자신의 건재를 드러냈다. 이어 곡률금에게 칙륵 지역의 민요를 부르게 했다.
"칙륵의 내가 음사 아래를 흐르니, 하늘은 커다란 집을 닮아 사방을 바구니처럼 감쌌네! 하늘은 푸르고 들은 넓고 아득하니, 바람 불자 풀이 엎드려 마치 소와 양 같다네!"
옥벽지전은 남북조 역사상 가장 힘들게 싸운 공성전투이다. 고환은 당시에 사용 가능한 모든 공성기술을 사용했으나 여전히 성을 격파하지 못했다. 이는 서위의 수비장수인 위효관의 방어 능력이 뛰어났다는 것과 옥벽성의 관민이 일치하여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고환이 겨울을 택해서 공격하여 기후가 추웠다는 것, 병사들에게 입을 것과 먹을 것이 부족했다는 점등으로 인하여 공성에 어려움이 있었다.
동위 무정 5년(547) 정월, 공교롭게도 일식이 일어나자, 거의 죽음에 이른 고환이 탄식한다.
"일식이 나로 인한 것인가? 죽은들 무슨 원한이 있겠는가?"
그리곤 곧 숨을 거두었다. 그 뒤는 장남 고징이 잇지만, 노비에게 척살 당했고, 차남 고양이 뒤를 이어 효정제 원선견을 폐한 뒤 북제를 세운다.
(다음편은 남조 양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