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량 멸망 - 형주 파촉을 얻어낸 서위 우문태 [92화]
- 한중일 역사/위진남북조 100화
- 2020. 10. 13.
위진남북조 중기 - 양원제 승성 2년(553) 10월, 왕승변은 건강, 진패선은 경구에 주둔케 했다.
승성 3년(554) 4월, 서위의 사자를 북제의 사자보다 홀대했다는 이유로 우문태가 11월에 출병을 명한다. 우근, 우문호, 양충 등이 한수를 넘어 강릉에서 40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황화에 이르렀다. 왕승변을 대도독으로 삼고 진패선에겐 양주로 군영을 옮기게 했다. 소역은 밤에 봉황각에 올라가 천문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객성(혜성처럼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별)이 형초의 영역으로 들어왔으니 우리가 필히 패하겠구나!"
강을 건너는 서위 군을 왕포, 호승우, 주매신, 사답인 등이 영격했지만 모두 패했다. 목책을 두고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 양나라 장수 호승우가 유시에 맞아 전사한다. 서위군은 여세를 몰아 목책을 돌파하자 강릉성 서문의 내응자들이 성문을 열어 서위군을 맞아들인다. 악전고투 끝에 성문을 지켜냈으나 이미 강릉성은 서위군에 포위된 뒤였다.
소역은 전황을 극복할 수 없다 여겨 불 속으로 뛰어들어 자결을 시도했으나 주변의 만류로 목숨을 살린다. 사답인과 주매신이 대항할 것을 권했으나 그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안의 병사들이 많고 아직 강합니다. 야음을 틈타 포위를 뚫고 도강한 뒤 임약에게 몸을 맡길 만합니다."
그러나 소역은 어사중승 왕효사를 시켜 투항의 표문을 짓게 하고, 백마에 소복 차림으로 동쪽 문을 나섰다.
"소역에게 결국 오늘과 같은 날이 오고야 말았구나!"
소역이 탄식을 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서위로 부터 양왕에 봉해진 소절은 친형을 죽인 숙부를 자신의 영내로 데려오게 한 뒤 검은 마포로 된 장막 속에 가뒀다. 그러고는 주먹과 발로 사정없이 때리면서 마구 욕을 했다. 당시 충심이 강했던 왕림이 병마를 이끌고 강릉으로 향했으나 이미 늦었다. 장수 후평을 보내 북주의 앞잡이 소절을 치게 했으나 후평은 되려 자립을 꾀하니 왕림도 별수 없어 북제에 칭신을 한다.
왕림의 누이와 여동생은 양원제 소역이 번왕으로 있을 때 입궁해 총애를 입었다. 왕림은 어린 시절부터 소역의 막부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했다. 후경을 몰아내고 건강성을 탈환할 때 공을 세웠지만, 군사를 풀어 약탈했었기에 왕승변의 명으로 옥에 갇혔다.
시기심 많던 소역은 황라한과 장재에게 명해 왕림의 군사를 해산시키려 했으나 육납 등이 대성통곡하며 명을 거부했고 장재로부터 혹독한 처우를 받았던 병사들을 장재를 살해했다. 마침 종실인 소기가 촉에서 형주로 이동 중이기에 소역은 어쩔 수 없이 왕림을 석방했다. 이후 왕림은 큰일이 벌어질 것으로 염려해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소역의 구원 요청을 받고 올라왔다. 충신을 알아보지 못했던 소역의 말로는 비참했다.
위진남북조 시대 양원제 승성 3년(554) 12월, 서위 조정이 그전에 양왕으로 책봉되며 장안에 머물던 소절에게 소역과 그의 아들 소원량, 소방략을 살해케 했다. 그는 곧 강릉의 동성으로 옮겨가 살게 됐다. 이후 소절은 파촉과, 형주 일대의 백성들이 약탈당하고 노예로 팔려가는 것을 보며 병이 들어 이내 사망한다.
소역이 서위에 항복하던 당시, 양나라 왕공과 남녀 백성 등 10여만 명이 노비 신세가 되어 삼군의 장병들에게 하사품으로 수여됐다. 서위로 끌려간 백성 중 풍토가 맞지 않아 얼어 죽은 자가 열에 두셋은 되었다. 이에 안지추는 이같이 술회했다.
"양나라의 사대부들은 밖을 나갈 때는 가마를 타고, 들어올 때는 부축을 받았다. 성곽과 교외 안에서는 말을 타는 자가 없었다. 후경의 난이 일어난 후 걸음을 걷지 못할 정도로 기력이 약해져 추위를 견디지 못했다. 문득 앉아서 죽은 자가 많았던 이유다."
그래도 서위에 대항하는 자들이 있었으나 이미 피폐해진 강남에서 서위에 맞서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서위는 옹주, 형주, 파촉을 얻었고 북제는 거란, 돌궐, 유연, 산호 등과 끝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문화적으로 뒤처지고, 남북조 시대 북제처럼 기름진 땅이 적었던 서위가 일약 삼국 중 가장 강력한 국가로 올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