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족 우문태의 주나라(북주) | 동위(북제) 정복 94화

고환의 동위는 선비족과 한족 간의 갈등이 컸다. 선비족 고관들이 한족을 경멸했기 때문이다. 고환의 총애를 받던 고오조는 휘하의 선비족 장병들 속에 한인들이 섞여 있으면 고환에게 요청해 이들을 다른 부대로 이전시키는 등 당시 선비족 대장들의 상황을 대변하는 일화를 몇 가지 남겼다.

 

한번은 황하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여러 명이 물에 빠져 죽자, "한 푼의 가치도 없는 한인들은 죽게 놓아두어라!" 라는 말을 했다. 고환도 이를 타개하려 시도는 했지만, 동위가 멸망하는 순간까지도 이는 해결되지 않았다.

 

"한인은 너희 노복이다. 남자는 너희를 위해 경작하고, 여자는 너희를 위해 옷을 만든다. 곡식과 비단을 세금으로 내 너희를 따뜻하게 먹이고 있다. 왜 그들을 업신여기는 것인가?"
 
"선비족은 너희가 고용한 용병이다. 너희가 제공하는 옷과 음식을 얻는 대신 너희를 위해 도적들을 막아 주고 있다. 너희를 안녕하게 만드는데 저들을 왜 그처럼 원망하는 것인가?"

 

556년, 효율적인 군 제도를 완성한 직후 우문태는 죽는다.

 

 

효무제 - 문제 - 폐제 - 공제로 이어진 서위조정은 우문태를 이어 실권을 장악한 그의 형의 아들 우문호에게 선양을 강요받았다. 우문호가 우문태의 후계자 우문각에게 선양을 받게 하여 천왕 자리에 올리니, 이에 북주왕국이 성립했다. 군권을 장악한 우문호는 자신을 고대 주왕국의 주공단周公旦과 같은 지위에 비견했다.

 

그것은 서위조정에 대한 우문태의 지위와 같은 것으로, 주례적인 부병제 국가의 구조와 원리가 그대로 계승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문호는 557년 천왕 우문각과 대립하게 되자 그를 폐하고 그 동생 우문육을 세웠으나, 560년에 다시 그를 죽이고 그 동생 우문옹을 세웠다. 그가 바로 명군으로 일컬어지는 북주의 무제이다.

 

 

우문호는 572년 무제에게 주살될 때까지 조정을 제압하는 한편, 계속하여 훈귀를 주살하고 자신이 차지한 대총재 아래에 다른 5관을 예속시켜 권력을 집중시켜 나갔다. 그것은 형식상 주례라는 겉옷을 걸치면서 그 실질을 바꾸어 나간 것이다. 이 같은 집권화 노선은 주례적 원리 그 자체만으로는 국가의 새로운 발전을 기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 실제로 이와 같은 집권기반이 없었더라면 무제에 의한 화북통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부병제 국가에서 군단의 자발성을 유지하면서 그 분할통치를 하나로 집중하지 못한다면, 통일제국의 형성을 불가능하다. 무제는 우문호로부터 집중화한 권력을 이어받은 후 균형이 잡힌 시점에서 북제를 병합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당시 북제는 여러 세력으로 분열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훈귀, 한인 귀족, 은행의 삼파전으로 스스로 자멸해 가고 있었다. 북제의 후주는 삼파전의 마지막 승리자인 은행들에게 둘러싸여 이기적인 향락주의의 소용돌이 속에서 순간의 쾌락만 추구하였다. 남조의 진陳 세력은 선제 치하인 573년에 양자강 북쪽에서 회수선으로 진출하고 강회 지방을 북제로부터 탈환했지만, 북제는 이미 이를 되찾을 힘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576년, 북주의 무제는 북제의 쇠약을 확인한 후 북제에 대한 진격명령을 내렸다. 잘 통제된 북주의 부병군단은 북제의 군사요지인 진양으로 진격하였다.

 

 

북제의 후주는 총비들과 함께 노닐며 사냥을 하며 북제군을 독전해서 대항하려고 나섰다. 진양의 북제군은 선전했으나 그러한 통솔자 밑에서는 당연히 부병군단의 진격을 당해 낼 수 없었다. 북주의 근거지인 진농 일대는 전통적인 문벌귀족이 적은 지방으로 문화적 후진지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범양 노씨, 청하 최씨, 형양 정씨, 하동 설씨와 배씨, 박릉 최씨, 경조 황보씨, 돈황 영고씨, 풍익 구씨, 농서 적도 신씨 등 중원 일대의 명문 문벌도 북주 정권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아 북제의 내분과 황제의 일탈로 영토뿐만 아니라 문벌 귀족의 이탈까지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주는 완전히 붕괴한 군을 버려둔 채 재빨리 수도인 업으로 도망갔으나, 이미 어떤 대책도 마련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577년 정월 초하루, 겨우 여덟 살 난 황태자에게 제위를 물려준 후주는 추격해 오는 북주군을 피해 정월 3일 업에서 산동성 방면으로 탈출했다. 성공하면 황하의 남쪽에서 병력을 모아 부흥군을 일으키고, 실패하면 남조의 진국으로 망명하면 된다는 안지추 등의 진언에 따른 것이다. 제위를 물려받은 어린 황태자도 6일 후 업을 탈출하여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북주의 무제는 정월 20일 업에 입성하고, 청주로 도망간 후주와 어린 황제에 대한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각지의 북제군은 이미 뿔뿔이 흩어져 북주에 투항하는 자가 속출하였다.

 

 

겨우 수십 명의 수행원만을 거느린 후주 등은 진나라로 망명하려 했으나, 지금까지 가장 신뢰해 온 은행 중에는 북주와 몰래 내통하여 일신의 안전만을 바라는 자도 있었다.

 

"주의 군대는 아직 멀리 있습니다. 청주에서 군대를 모으면 남쪽으로 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은행의 이 말을 듣고 어물어물하고 있는 사이 북주의 군사가 밀려들었다. 재빠르게 항복한 것은 바로 그 은행이었다. 후주 등은 모두 북주군에 붙잡혔다. 그 은행은 북주와 내통하여 후주 등을 포로로 넘기기로 약속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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