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는 생전에 칭제를 하지 않았다. 다만, 여러 차례 문서를 통해서만 아들(조비인지 누군지 하여간 누가 됐건)이 찬위할 여지는 남겨두었다. 5호 16국. 위진남북조 시대의 막바지에 동위를 지배한 고환도 조조와 마찬가지였다. 고환은 하급 소대장 출신으로 이주씨가 효무제 원수를 옹립하자 효정제 원선견을 옹립했었다. 동위 효정제 무정 2년(544), 고환이 아들 고징을 대장군, 영중서감, 섭이부상서에 임명했다. 고징은 옛 친구들이 자신에게 무례하거나 뇌물을 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 고환은 생전에 이런 말을 했었다. "공들은 되도록 내 아들을 피하도록 하시오." 고징은 고환 사후 지방의 군벌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되어 발상을 미뤘다. 실제로 하남에서 반란(후경)이 일어나자 한궤에게 명해 이를 토벌하고 ..
양무제 태청 원년(547) 9월, 양무제는 조카 정양후 소연명에게 15만의 대병을 주어 동위 토벌을 명한다. 소연명은 계책도 없고 황족임을 내세운 교만한 소인배였다. 처음 제장들의 반대에도 팽성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고, 원군으로 합류한 동위 모용소종의 기습이 벌어지자 작은 손해를 입곤 겁에 질려 서둘러 철군한다. 당시 모용소종은 양나라 곽봉의 진영을 급습했으나 실패했었다. 소연명은 예하 장수들이 잘 막아냈음에도 이것에 겁을 먹고 철군을 결정했었다. 이에 노련한 모용소종이 거짓으로 먼저 철군한다. 양나라 군대의 군율이 엄격하고 방비도 철저해 쉽게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내가 먼저 짐짓 퇴각하는 모습을 보여 적들이 쳐들어오도록 유인할 것이다. 너희는 기회를 보아 그들의 배후를 격살하라!"..
이젠 시선을 위진남북조 시대 남쪽으로 돌려보자.그곳엔 싯다르타 덕후 소연(= 양무제)이 다스리는 양나라가 있다. 당시, 위진남북조 시대의 남조인 양나라 황제와 신하들은 사치스러웠고,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승려가 되길 원했으며, 일반 백성들은 가혹한 세금과 굶주림에 시달렸다. 부유했던 강남의 사회가 거의 무너져 내렸다. 그럼에도 양무제는 무너져가는 남조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조정에서는 오히려 공덕을 쌓았다(부처에게 돈을 많이 바쳤으니 다 괜찮다~라는 의미). 조정에서 쓰는 것은 모두 정원에서 나온 식물이고 하나의 호박을 변화시켜 수십 종류로 만들었고 하나의 나물을 변화시켜 수십 가지의 맛을 내게 한 것이어서, 변화를 시켜서 많은 것을 만들었으니, 어떤 일에도 손해를 끼치지 않았다."..
3차 하교지전(538) 이후 5년이 흐른 동위 효정제 무정 원년(543) 다시 전쟁의 불이 붙는다. 이것이 남북조 시대 유명한 망산지전이다. [주로 여기 참조] 전쟁의 원인은 고환의 아들 고징은 여색을 밝혀 고중밀(고오조의 형)의 처 이씨를 강간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비슷한 시기에 북예주 자사로 임명된 고중밀은 이같은 사실에 앙심을 품고 서위에 투항한다. 동위의 요충지 호뢰관이 서위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에 동위와 서위의 네 번째 회전이 벌어진다. ▶ 말썽꾸러기 고징훗날 남북조 시대 북제의 황제게 오르는 고징은 532년 효정제孝靜帝의 누이동생 풍익장공주馮翊長公主를 아내로 맞습니다. 고징은 14세 때 부친 고환이 총애하는 희첩 정대거와 간통했다가 부친에 의해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당시 사마자여가 중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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