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가 6년(429), 팽성왕 유의강을 형주자사, 장사왕 의흔을 남연주 자사, 강하왕 유의공을 남서주자사로 삼으며 황권 강화를 도모한다. 원가 7년(430), 문제 유의륭은 재위 기간 국력이 강성해지고 북위에 빼앗긴 황하 이남을 수복해야 한다는 의론에 따라 첫 번째 북벌을 시도한다. (위진남북조 시대 총 두 차례 북벌을 시도하지만 모두 실패) 원가 8년(431), 북벌군은 사실상 영토 확장의 의지가 없었다. 유송 문제 본인이 권신들을 지나치게 의식해 북벌에 나선 장군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도 못했으며, 황하 이남의 땅들은 공격하긴 쉬워도 지키긴 어려우므로 이때의 북벌은 사실상 군사 시위에 불과했다. 총주자사 유흥조가 하북으로 진격해 태항산 일대를 장악해야 한다고 상주했으나 조정에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유유는 363년 봄, 위진남북조 시대, 북부군단의 소재지인 경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관청의 하급 서기관으로, 일가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생활에 쪼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난산으로 목숨을 잃었고 돈이 없었던 아버지는 아이를 죽이려고도 했다. 마침,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은 의붓누이가 아이에게 젖을 물려 주었기에 유유는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택할 수 있었던 건 전장에서 공을 세워 출세하는 것뿐이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처럼 정말 X구멍 찢어지게 가난한 곳에서 태어나 황제(송무제)가 되었으니 누가 이를 상상이나 했으랴. 유송 무제 유유, 위진남북조 시대 2번째 남조 국가 송나라 건국유유가 420년 6월에 보위에 오르니 그가 송나라 무제다. 유유는 재위 후 중앙재정 확립과 황제권력의..
무리수를 둔 유의유유와 함께 환현을 토벌했던 유의는 처음에 유유와 대등한 위치였으나 이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가 돼버렸다. 유의는 이에 조정 내부에서 힘을 기르고자 끊임없이 더 많은 군권을 요구했다. 물론, 유유가 없는 상황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유유가 노순의 반란을 제압하고 입경하니 조정 내부의 분위기는 다시 한번 전환된다. 의희 8년 (412), 형주자사 유도규가 노환을 이유로 퇴임하자 유의는 형, 영, 진, 옹주 4개 주의 군사를 총괄했고 이후에도 자신의 측근들을 요충지의 대장으로 계속해서 임명한다. 유의는 이미 형주의 군부를 장악해 북으론 한수, 서쪽으론 파촉, 남으론 영남으로 연결되는 사통팔달의 요충지를 점거한 상태였다. 유유가 계속 유의의 이런 청을 들어준 건 자신감의 표시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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