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희 13년(417) 2월, 유유가 팽성을 출발했다. 왕진악과 단도제 등은 이미 동관에서 후진의 수비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후진은 전황이 끊임없이 불리해지자 북위에 원군을 요청한다. 당시 북위 조정에선 반대 여론이 강했고, 대신 최호도 이같이 말했다. "요흥은 이미 죽었고, 요홍은 나약합니다. 지금 유연柔然이 북쪽 변경을 노략질하고 있습니다. 유유와 싸우게 되면 남북으로 적을 맞이하는 셈이 됩니다. 유유의 청을 받아들여 저들을 서쪽으로 보낸 뒤 군사들을 요소에 배치해 동쪽을 지키면 됩니다. 만일 유유가 승리하면 우리가 길을 빌려준 것에 고마워할 것이고, 만일 패하면 저들이 철군할 때 공격을 가함으로써 요씨의 진나라를 도와줬다는 명분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북위 원제는 이를 듣지 않고 원군을 보냈다. 처음..
무리수를 둔 유의유유와 함께 환현을 토벌했던 유의는 처음에 유유와 대등한 위치였으나 이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가 돼버렸다. 유의는 이에 조정 내부에서 힘을 기르고자 끊임없이 더 많은 군권을 요구했다. 물론, 유유가 없는 상황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유유가 노순의 반란을 제압하고 입경하니 조정 내부의 분위기는 다시 한번 전환된다. 의희 8년 (412), 형주자사 유도규가 노환을 이유로 퇴임하자 유의는 형, 영, 진, 옹주 4개 주의 군사를 총괄했고 이후에도 자신의 측근들을 요충지의 대장으로 계속해서 임명한다. 유의는 이미 형주의 군부를 장악해 북으론 한수, 서쪽으론 파촉, 남으론 영남으로 연결되는 사통팔달의 요충지를 점거한 상태였다. 유유가 계속 유의의 이런 청을 들어준 건 자신감의 표시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