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견과 그의 참모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저족을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저족 번세를 죽여 황제의 권위를 높이는 한편, 중앙 정부의 군사력 확충을 위한 일화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외에도 제후왕들의 작위를 공公으로 낮췄다. 그러나 백성에겐 따뜻했던 부견은 중농억상 정책으로 세금과 요역을 크게 감면하고 태학의 학생들을 격려했다. 호한분치에서 호한융합으로 가는 시발점이었다. 이는 큰 반발에 부딪혀 흉노 좌우현왕과 부생의 형제인 부류, 부쌍, 부유 등이 반란을 일으킨다. 부견은 이를 빠르게 제압하고 국외로 시야를 돌린다. 동진 환온의 북벌 당시 전연은 전진에게 땅을 떼어주는 조건으로 구원을 청했었다. 호뢰 이서의 땅, 그 땅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부견은 악덕 채무자에게 원금과 이자를 꼭 받아내려 했다...
[이정기 제나라 역사] 고구려 유민, 당나라 절도사의 왕국 고구려유민 이정기李正己 제나라안사지란安史之亂은 당나라 역사를 전기와 후기로 가르는 분기점에 해당한다. 그만큼 충격이 컸다.이후 당나라 역사는 실질적인 무력을 지닌 절도사節度使들의 각축전으로 점철됐다. 절도사들이 장악한 각 번진은 독립왕국이나 다름없었다. 주목할 인물은 산동 일대에 근거지를 둔 고구려유민 출신인 평로 절도사 이정기다. 고구려가 패망한 지 반세기가 넘는 서기 732년 영주에서 태어났다. 고구려 패망 당시 당으로 끌려간 20여만 명(고구려유민)의 후손일 공산이 크다. 그에 관한 기록은 안사지란 때 처음으로 등장한다. 신당서에 따르면 그는 내종사촌 후희일과 영주를 근거지로 하고 있던 평로군의 비장으로 복무했다. 난이 한창일 때 후희일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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