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선제 시기 下 곽광 지나친 욕심으로 멸족 당하다 전한 소제는 스물한 살에 이르러 병사하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유하劉賀(폐위된 창읍왕昌邑王)가 즉위했는데, 방탕하여 도무지 군주의 위엄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어 조야 안팎으로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곽광이 여러 대신의 위탁을 받고, 또한 양창 등과 연계하여 조회 때에 갑자기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상관 황후의 명의를 빌려 유하의 죄상을 열거하고는 왕으로 강등시키고 식읍 2천 호를 주어 창읍에 살게 했다. 그리고 유하의 졸개들 2백여 명을 모두 저잣거리에서 참수했다. 관련 글한나라 소제 시기 上 권세가 곽광, 황제와 상관걸 사이에서전한 박사 숙손통, 주나라 진나라를 모방해 의례 제작, 한고조 권위 상승1950년대 중국 주은래 기념 사진 [철령(톄링..
한나라 소제 시기 上 권세가 곽광, 황제와 상관걸 사이에서 곽거병이 도성으로 데리고 와 낭관부터 시작해 계속 승진해 봉거도위奉車都尉 광록대부光祿大夫가 됐고, 궁중에서 20여 년간 봉직했다. 그는 항상 신중했기에 어떠한 실수도 범한 적이 없어 군왕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한 소제가 즉위했을 때에는 나이가 여덟 살에 불과했기에 조정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고명대신 중의 우두머리인 곽광이 주재했다. 곽광 또한 신중하고 충성스러웠는데,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질 것에 대비해 아예 궁중에서 살았다. 어디를 가든, 어디에 앉든 간에 규칙적이어서 조금도 바뀌는 경우가 없었다. ◆ 전한 소제 초기 이 때문에 소제가 어리기는 해도 나라는 태평했다. 이듬해에 곽광이 안륙후에 책봉되고, 상관걸上官桀은 안양후에 책봉되었는데, ..
한경제 시대 오초칠국의 난, 전한 한무대제 인플레이션 픽션 예전에 중국 사극 한무대제 봤었습니다. 오초칠국의 난 벌어지기 직전, 오왕 유비가 조정이 민심을 잃도록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장면이 나왔었습니다. 한경제는 진상 조사에 나섰고 곧 진모가 드러납니다. 오왕 유비는 생산한 위조지폐를 수도와 인근에 많이 뿌렸습니다. 오나라에서는 고의로 화폐 유통량을 늘려서 시장 경제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인플레이션을 유발했습니다. 그래서 이게 역사적 사실인지 궁금해서 자료를 찾아봤습니다. 오초칠국의 난 당시 인플레이션은 있었을까? ■ 자치통감오왕(吳王)과 등통(鄧通)이 주조한 돈이 유행하다 是時(시시) 太中大夫鄧通方寵幸上欲其富(태중대부등통방총재상욕기부) 賜之蜀嚴道銅山使鑄錢吳王?有豫章銅山(사지촉엄도동산사주전오왕비유예장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