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제 폭군 문선제 고양 뒤를 잇는 효소제 고연 [96화]

북제 천보 3년(552), 4년(553), 5년(554)에 문선제 고양은 북으로 병사를 보내 유목민들을 공격하여 소와 양 등을 비롯해 수많은 백성을 포로로 잡는다.

 

천보 6년(555), 반격에 나선 유연을 물리치고 유주 북하구에서 시작해 총 9백여 리에 달하는 거대한 장성을 축조한다. 이후 고양은 공업을 자긍한 나머지 음란하고 포학한 짓을 행하기 시작했다. (위진남북조 시대 북위와 끊임없이 전쟁하던 그 유연이 맞음)

위진남북조 시대 북제 장성

 

어리석은 황제 북제 문선제 고양

벌거벗은 채 사방을 돌아다니거나, 기혼 여부를 막론하고 눈에 띄는 여성을 강간하거나, 집단 음행을 구경하거나, 눈이 마주친 병사와 그 일족을 도륙하거나, 취하면 사람을 잔인하게 죽였다. 이후에도 술에 취하면 장모를 채찍으로 때리거나 전각 위에 올라가 위험한 놀이를 즐기거나, 대신 고륭지가 이전에 칭제를 반대한 것을 이유로 일족을 도륙 내는 등 횡포함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위진남북조 시대 여느 폭군과 다름이 없었다.

무엇보다 고양에겐 황제의 자질이 없었다. 하루는 고양이 여러 신하에게 말했다.

 

"우문태가 나의 명령을 받지 않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도독 유도지가 말했다.

 

"신이 3천 기병으로 장안에 가서 그를 사로잡아 오겠습니다."

 

고양은 장하게 여겨 비단 1천 필을 하사하라 명했지만 조도덕이 이를 만류했다.

 

"유도지가 망령되이 말했으므로 응당 죽여야 하는데,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함부로 상을 내릴 수 있습니까?"

 

아버지 고환과 형 고징에 미치지 못하기에 황제에 올라 권위를 세워야 한다던 구신들의 말이 민망한 상황이었다. 이런 조도덕을 술에 취해 함부로 죽이려다 되려 술에서 깬 뒤에 몽둥이로 자신을 때리라 명하기도 했다. 정말로 조도덕이 고양을 때리자 고양은 도망치고야 말았으니, 조도덕은 이런 말을 했다.

 

"무슨 사람이 이런 행동 거리를 하는가?"

 

조도덕도 도망치는 황제 고양을 뒤쫓아 계속 때렸다고 한다. 이후 간언을 하던 신하 이집의 말이 거슬려 고문하다 이내 풀어주었다.

남북조 시대에 반복되는 살육

 

천보 8년(557), 고양은 동생 두 명을 사소한 이유로 죽인다. 고양이 종실 부녀를 소집해 동산으로 데리고 가 위사들과 윤간케하자 이복동생 영안왕 고준이 말리다 옥에 갇혔다. 당시 '고씨를 망하게 하는 자는 검은 옷을 입었다'는 말이 떠돌았는데 검다는 칠漆과 일곱 번째 칠七의 음이 같자 일곱 번째 동생 고환을 고준과 함께 가뒀다. 그 둘은 얼마 후 창에 찔려죽고 비빈들은 위사들에게 상으로 내려진다.

 

천보 10년(559), 위진남북조 시대 동위의 종실이었던 팽성왕 원소를 불렀다.

 

"후한의 광무제 유수는 무슨 이유로 중흥주가 되었는가?"

"왕망이 유씨를 모두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고양은 동위의 황실로 남아있던 25가 721명을 죽여 강가에 던졌는데 물고기 뱃속에서 손톱 등이 나와 오랫동안 사람들이 물고기를 먹지 않았다.

 

당시 훈귀들은 그 공로와 권세에 의지해서 불법 행위를 자행하는 예가 많았다. 심지어 위서魏書의 저자 위수는 이주문략으로 부터 금전을 받고 이주영을 한팽(한신, 팽월)과 이곽(이윤과 곽광)에 비견되는 인물로 서술하기도 하였다. 조정에 뇌물이 판을 치고 있었던 것이며, 청렴해야 할 사람들조차 그렇지 못했다.

 

같은 해 11월, 과음하던 고양이 병사했는데 고작 31세였다. 이전에 북제 문선제 고양은 술에 취해 어머니 누태후에게 이렇게 말했다.

 

"즉시 이 늙은 어머니를 오랑캐에게 시집보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해선 안 될 말을 했기에, 평진왕 고귀언과 누태후의 만류에 기어이 술을 끊겠다 약조도 했다. 그렇지만 열흘을 가지 못했고, 술에 취해 장모에게 말채찍으로 100여 대를 때렸으며, 중신들을 사사로이 죽이려 시도도 했었다. 물론, 즉흥적으로 죽이려 했다. 왜냐면 손에 칼이 있었으니깐. 그만큼 그는 술에 취하면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줄을 몰랐다.

북주, 북제, 양나라 삼국시대 형세도

 

북제 효소제 고연

고양 사후 15세의 어린 태자 고은(제남왕)이 즉위하였지만 2년 뒤(560년), 상산왕 고연(고환의 6자)이 누태후의 지지하에 조카를 내쫓고 보위에 오르니 이가 북제의 효소제이다. 고은은 제남왕에 봉해졌지만 임지로 떠나진 않았다.

 

고연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아버지 고환의 총애를 받았다. 장남 고징도 그의 뛰어난 인품을 알기에 고징만큼이나 그를 견제했었다. 보위에 오른 효소제 고연은 곧 명군의 자질을 보였지만 위진남북조 시대는 이런 명군이 오래 살지 못하던 시기다.

또한, 조카 고은을 죽일 생각도 원래 없었지만, 점을 치는 자의 말을 듣곤 조카를 죽이고 만다. 천성이 박복하지 않았던 그여서 그랬을까. 조카를 죽인 뒤 죽은 친형 고양과 조카의 악몽을 꾸며 날로 수척해졌다. 어머니 누태후도 그런 그를 질책했다.

 

"제남왕(고은)은 어디에 있는가?"

 

고연이 대답을 못 하자 누태후가 화를 냈다.

 

"네가 그 애를 죽인 것이냐? 나의 말을 듣지 않았으니 너는 죽어도 마땅하다!"

 

사냥을 하며 두려운 마음을 달랬으나 이미 쇠약해진 마음은 쉽게 낫질 않았다. 풀숲에서 뛰쳐나온 토끼에 놀라 낙마하여 늑골을 다쳤고 당시 의술론 이를 고칠 방법이 없었기에 황건 2년(561) 11월 병사한다.

 

죽기 전에도 악몽에 시달리며 무릎을 꿇고 형에게 사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형과 조카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등 그의 상태는 계속 악화하였었다. 죽기 직전 친동생 장광왕 고담(고환의 9자)에게 보위를 넘겼다. 이가 북제 무성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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