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태종무열왕 시대, 풍월주 세종공 사다함과 미실 관계

세종공公은 …와 더불어 …. 몇 달 전에 태후는 공경公卿의 미녀들을 택하여 궁중에 모아 두고 공이 누구에게 마음이 있는지를 보았다. 공은 미실낭주를 가장 좋아하였다. …태후는 이에 제帝에게 묻기를


"미실의 아름다움… 전군殿君을 …합니까"


하였다. 제帝 (진흥왕) 또한 아름답게 여겨


"오직 어머니가 정할 바입니다. 단 …태종苔宗 노신이 알지 못해서 …"


하였다. 태후 또한 그렇게 여겼다.

이에 태종을 불렀다. 미실로서 의논하여,


"며느리를 얻는 데 지아비에게 의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태종이


"폐하의 집안일에 어찌 감히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하였다.


신라 태종무열왕 시대, 풍월주 세종공 사다함과 미실 관계신라 태종무열왕 시대 역사


태후가


“이 처녀는 곧 영실英失의 손입니다. 나의 우군右君(법흥왕의 유명으로 지소태후가 영실을 계부(繼父)로 맞았기에 우군(右君)으로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으로 영실은 나에게 잘못이 컸기에 꺼렸습니다. 그리하여 좋아하지 않게 되어 결정하기 어려운 바 되어 묻는 것입니다.”


하니, 태종이


“영실은 (법흥의) 총신입니다. 유명遺命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지나치게 나무라서는 안 됩니다. 전군이 이미 좋아한다면 또한 황후 사도를 위로할 수 있으니 옳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태후가 크게 기뻐하여


"사랑하는 지아비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나는 잘 못 할 뻔했습니다"


하였다. 이에 미실로 하여금 궁에 들어오게 하였다. 섬긴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공과 더불어 상통하였고, 정의情意가 얽혀 깊어졌다.

그때 태후는 숙명공주를 사랑하여 장차(진골정)통을 잇고자 황후를 폐하려고 하였다. 황후는 곧 미실의 숙모였다. 이 같은 계책이 황후에게 누설되니, 황후는 울면서 제에게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제는 본래 황후를 사랑했기 때문에 태후의 헐뜯음을 듣지 않고 황후를 더욱 사랑하였다.


태후가 노하여 …미실을 위하여 걱정하여 태후께 나아가 간하였다. 이에 태후는 미실을 (불러들인) 것을 후회했다. 이에 미실을 불러 꾸짖기를


"너로 하여 전군을 받들게 한 것은 단지 옷을 드리고 음식을 받드는 것이다. 그런데 감히 사사로이 색사色事로 전군을 … 어지럽혔으니, 죄를 용서할 수 없다."


하고 출궁을 명하였다. …진종전군眞宗殿君의 딸 융명肜明을 정비正妃(정비의 존재는 신라 시대의 혼인 관계에서 처첩(妻妾)을 구별하는 등, 일정한 질서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로 삼았다.


미실 사다함 신라 태종신라 태종무열왕 시대 역사


제는 따져 ….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따라갔다. 미실이 이미 돌아와서는 슬퍼 울면서 먹지 않고 …. …일찍이 준영俊英의 일로써 미실에게 …한 바 되어 …. … 사다함과 같았다. 이에 이르러 미실은 …. 


"… 일찍이 지아비를 맞는 데는 마땅히 사다함과 같이 …하여야 한다. 무릇 부귀라는 것은 한때이다. 나는 …. 한때 왕자와 전군을 모두 앞에서 배견하였으나 지금은 … 이와 같다."


이에 사다함공을 불러 위로하였다. 미실은 이에 정이 일어나 서로 기뻐하였다. 출정할 때에 이르러, 노래로서 보냈다. 이르기를:


[풍랑가]

바람이 불다고 하되 임 앞에 불지 말고

물결이 친다고 하되 임 앞에 치지 말고

빨리빨리 돌아오라 다시 만나 안고 보고

아흐, 임이여 잡은 손을 차마 물리라뇨


※ 정연찬(鄭然粲) 선생은 이 향가의 제목을 <풍랑가(風浪歌)>또는 <송출정가(送出征歌)>로 불렀다. 여기에 나오는 향가의 해독도 정연찬 선생이 한 것이다.


사다함은 이에 온갖 방법으로 위로하고 갔다.

풍월주 신라 태종무열왕신라 태종무열왕 시대 역사


전군이 듣고 … 괴로워하였다. 태후가 전군이 상심할까 염려하여 미실을 다시 입궁시키자, 전군은 기뻐 미친 듯이 달렸다. 태후는 부득이 다시 섬기도록 명하였다. 미실은 원비元妃의 첩이 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색공色供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전군은 태후에게 청하여 미실을 전군부인殿君夫人으로 삼고, 융명은 차비次妃로 삼았다.


원비(元妃)나 차비(次妃)의 존재 역시 신라 시대에 일정한 혼인 질서가 지켜졌음을 보여 준다.


융명이 불만으로 여겨 물러나 살 뜻을 비쳤다. 미실은 전군과 더불어 정을 배반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마침내 융명을 내쫓았다.


사다함이 돌아왔을 때 미실은 이미 궁중에 들어가 전군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까닭에 사다함은 청조가靑鳥歌를 지어 슬퍼하였다. 내용이 몹시 구슬퍼 그때 사람들이 다투어 서로 암송하여 전하였다. 해解(‘해(解)’는 노래의 한 단을 가리킨다. 따라서 다해와 단해가 있겠는데, <청조가>는 두 단으로 되어 있다.


삼국시대 신라 풍월주신라 태종무열왕 시대 역사


<청조가>의 문단 구분과 해석에 정연찬 선생의 도움을 받았다.) 하여 이르기를 :


[청조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나의 콩밭에 머무는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너 나의 콩밭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다시 날아들어 구름 위로 가는가

이미 왔으면 가지 말지 또 갈 것을 어찌하여 왔는가

부질없이 눈물짓게 하며 마음 아프고 여위어 죽게 하는가

나는 죽어 무슨 귀신 될까, 나는 죽어 신병되리

(전주)에게 날아들어 보호하여 호신護神되어

매일 아침 매일 저녁 전군 부처 보호하여

만년 천 년 오래 죽지 않게 하리


※ 12세 풍월주 보리공조에는 미실이 아시공과 옥진 궁주를 호신으로 삼은 예가 나오고 있다.

※ 호신護神의 神은 일부분이 보인다.


라 하였다.

죽음에 임하여 이화공二花公이 감싸 안고 슬퍼하며


"그대 아우는 아직 어린데, 그대가 만약 일어나지 못하면, 누가 계승할 것인가"


하였다. 이에 사다함이


"신의 누이인 미실의 남편이, 모랑공毛郞公의 고사故事에 의거하면, 또한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신라 풍월주 사다함신라 태종무열왕 시대 역사


이에 이화공이 태후에게 정하기를 청하니, 태후가


“나의 아들은 어리고 약하다. 어찌 능히 될 수 있는가”


하였다. 미실이 세종에게 권하기를


“사다함 종형<<질이다. 당시는 사람들이 서로 좋아하면 형제라 하였다. 그래서 형이라 불렀다>>이 나를 사모하다가 죽었습니다. 죽음에 임하여 한 말 한마디를 들어 주지 않으면 장부가 아닙니다”


하였다. 세종이 옳게 여기고 태후를 설득하여 허락을 얻어, 6세 풍월주가 되었다. 인하여 설화랑을 부제로 삼았다.


세종공 사다함 미실신라 태종무열왕 시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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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화랑세기, 박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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