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위 우문태는 사원대첩 후, 사기가 올라서 적극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여, 일거에 하동의 포판과 낙양의 금용성을 확보했다. 기세를 몰아 우문귀가 영천까지 공격하여 의주, 양주, 예주, 광주, 형주 일대를 서위 영토로 만든다. (당시 동위는 효정제, 서위는 문제 시기) 동위 효정제 원상 원년(538), 동위 고환의 장수 후경이 낙양 금용성을 탈취한 뒤 약탈을 감행한다. (3차 회전 하교지전, 이 글을 주로 참고) 후경은 낙양 내외의 많은 민가와 관청을 불살랐다. 서위의 문제 원보거와 승상 우문태는 원래 낙양을 점령한 후 선제의 능원에 제사 지내고자 하였는데, 후경이 금용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는 우문태가 친히 대군을 이끌고 가서 지원했다. 전군이 곡성(谷城, 하남 신안현 동쪽)에 이르렀을 때, 고환의 동위 선봉..
위진남북조 시대 천평 4년(537), 동위 서위간에 사원지전이 폭발한다. (2차 회전 이 글을 주로 참고해 작성) 8월, 우문태는 이필, 독고신, 양어, 조귀, 우근, 약간혜, 이봉, 유량, 왕덕, 후막진숭, 이원과 달해무등 12명의 장수를 이끌고 동위로 진격한다. 병력이 동관에 이르렀을 때, 우문태는 병사들 앞에서 맹세하며 말한다. "이번 출병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폭란한 자를 주살하기 위한 것이다. 모두 여러 병사에게 달려 있다. 무기와 전마를 잘 정돈하여, 혈전에 대비하라. 재물을 탐하거나 적을 경시하거나, 흉포하게 행동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명령을 따르는 자에게는 상을 내리고, 명령을 어기는 자는 죽일 것이다!" 바로 우근을 동정선봉으로 삼아, 그날로 반두(盤豆, 지금의 허남성 양평의 서북)..
북위 절민제 즉위석 달 후, 건명 2년(531), 이주씨 일족은 광릉왕 원공을 새로 옹립하니 그가 위진남북조 시대 절민제이다.이주천광은 관우, 이주조는 병주와 분주, 이주중원은 서주와 연주를 점거했고 이주세륭은 조정을 장악했다. 이전에 이주영에게 칭제를 권했던 고환은 이미 수만 명의 지휘권을 얻은 상황이었으며, 위진남북조 시대 발해군의 고건 형제, 봉씨 일가, 범양 노씨 일가, 조군 이씨 일가들의 사병과 연계를 성사시켜 이주씨 타도의 총수로 추대된다. 중흥 2년(532) 초, 고환은 효장제 살해를 이유로 군사를 일으켜 효무제를 옹립하고, 광하에서 이주씨 군사를 대파한다. 고환은 전마 2천 필에 병사 3만에 지나지 않았으나 휘하 고오조가 분전해 업성의 이주씨 20만 대군을 대파했고, 4월엔 곡사춘이 하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