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나라 수도 건강성은 함락되었다. 이미 진숙보는 백성과 신하들의 인망을 잃은 상태였다. 황궁으로 수나라 군대가 몰려오자 진숙보는 달아나려 했으나 이내 포기하고 포로로 잡힌다. 이전에 건강성 안으로 수나라 군대가 몰려오자 백관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상서복야 원헌만이 옆에 남았다. "내가 평소 경을 심히 박하게 대했는데 오늘 참으로 참괴할 뿐이오! 이는 내가 덕이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강동의 사대부들 역시 도가 다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오." "폐하는 의관을 단정히 한 후 어전에 앉아 양무제가 후경에게 했던 고사를 좇으십시오." 그리곤 경양전으로 달려가 장귀비와 공귀빈을 챙겨 우물 안에 숨는다. 그러나 이는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우물 안에 성인 남녀 3명이 들어간다는 자체가 비상식적인 ..
진숙보가 태자 시절 매부였던 공범은 시문경, 심객경 등과 재정 대권을 장악해 부정한 부를 쌓았고 마침내 진나라 군권까지 탈취한다. "밖에 주둔하고 있는 무장들은 모두 잡졸 출신입니다. 필부지용밖에 없는 이들에게 무슨 심모원려가 있겠습니까?" 진숙보는 바로 그에게 병권을 내줄 순 없었고 장수들의 사소한 실수를 빌미로 조금씩 그에게 병권을 나눠 주었다. 이외에 충직했던 중서통사사인 부재가 고구려 사자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거짓 참소를 받아들여 옥중에서 죽게 하고, 충심이 깃든 표문을 올린 장화를 죽이는 등 조금씩 나라의 힘을 갉아먹었다. 무너져내리는 왕국 진후주(진숙보) 지덕 원년(583), 양견의 얼굴이 기이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자를 수나라로 보내 그의 얼굴을 그려오게 했다. 진숙보는 양견의 모습을 보고..
북주 외척 양견, 수나라 세우다 양견(수문제)이 정권을 장학한 581년 2월 13일, 양견은 외손자 정제(우문연)로부터 선양을 받아 수 왕조를 세운다. 정제(우문천)는 개공介으로 봉해졌지만 5월에 살해된다. 양견은 우문태의 자손 27명, 효민제의 아들 1명, 명제의 자손 7명, 효무의 자손 12명, 정제의 형제 2명, 기타 종족 12명을 살해하여 위진남북조 여느 왕조처럼 우문씨의 씨를 말렸다. (훗날, 양견의 다섯 아들도 일찌감치 사망한다. 뿌린 데로 거두는 법) 양견은 수나라 왕조를 개창한 뒤 유가 사상을 기반으로 조세와 법률을 정비한다. 구품관인법을 폐지하고 과거를 시작했는데 이미 귀족제 사회가 무너졌기에 중정관이 관리 후보자를 추천할 필요성이 없었다. 이후 수문제 개황 7년(587), 강릉의 괴뢰 ..
수나라 양견의 탄생 설화 서위 대통大統 7년(541) 6월, 풍상馮翔(섬서성 대려현)의 반야사般若寺에서 양견(수나라 문제, 수문제)이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절 주위에는 자색 기운이 감돌고 상서로운 구름이 뒤덮었다는 류의 진룡천자 전설이 전해진다. - 머리에 뿔이 자람 - 몸에 비늘이 있음 - 콧대가 정수리까지 통함 - 눈에서 빛이 남 - 손에는 문文자 손금 - 상체가 길고 하체가 짧음 - 표정엔 위엄, 말과 웃음에 구애받지 않음 아마도 생모 여씨呂氏의 출신이 비천했기에 이런 가공하고 포장한 전설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양견은 15세에 아버지의 후광을 받아 차기대장군에 임명되고 현공에 봉해졌다. 위진남북조 시대 북주 무제 이후로 두각을 나타냈던 양견은 마침내 장녀를 무제의 황태자비로 삼았다. 황태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