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남북조03. 가남풍의 정권 장악, 제거된 양준 일파, 석륵의 봉기 준비 초왕 사마위(진무제 사마염의 5남)가 입경한 지 얼마 안 된 「진혜제 원강 원년(291) 4월」, 서진 황제 진혜제 사마충은 이조와 맹관이 내민 조서에 서명했다. 백치 황제 사마충은 그 내용도 잘 모른 체 서명을 닦달하는 신하의 청에 못 이겨 일단 서명부터 했을 것으로 보인다. 양준을 위시한 양씨 일가가 모반을 획책했으니 이를 제압(도륙해라)하라는 내용이었다. 만약 양준이 모반을 꾀했다면 양황후를 먼저 찾았거나 양씨 일가의 누구라도 불러들여 자초지종을 들으려 했을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가남풍의 정치적 술수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곧, 조서의 내용대로 서진 초왕 사마위는 사마문에 군사를 배치하고 동안공 사마요는 금군을 이끌고 ..
위진남북조02. 팔왕의난을 유발한 서진 황제 사마충 [사마유 억울함] 귀가 얇았던 진무제 사마염의 실수는 크게 아래와 같다. 이 실수로 위진남북조 시대(팔왕의난)가 시작되었다. 1. 사마염은, 부부의 금실이 좋아 양황후의 말만 듣고 사마충을 후계자로 선택했으며, 가남풍을 내치지 않았다.2. 사마염은, 귀가 얇아 가남풍을 맞아들이고 사마충의 어리석은 행동들을 애써 무시했다.3. 사마염은, 사마휼에게 큰 기대를 했는데, 그 이유로 가남풍이 사마휼을 타락하게 만든 뒤 죽였다.4. 사마염은, 훗날의 정쟁을 예견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사마충이 황제가 되면 사마염 생전처럼 가씨와 양씨는 손을 잡을 이유가 없었다. 또 한가지 추가하자면 동생 사마유를 억울하게 죽게 만든 일이다. 총명하며 가뭄이 들면 스스로 반찬..
위진남북조01. 진무제 사마염 사치향락, 백치 사마충 (서진 쇠퇴) 중국의 역대 통일 왕조 중 최악으로 평가받는 위진남북조 진나라晉의 창업자 진무제 사마염은 자신의 나라를 망치는 데 일조한다. 천하 통일 이후에 권문세가의 사치 풍조를 막기는커녕, 자신도 그 속으로 몸을 담갔다. 후궁의 수가 만 명을 넘어섰으니 서진은 통일과 함께 멸망의 징조가 드러난 셈이다. (진나라, 서진과 오나라, 삼국시대 말기) 위진남북조 시대, 서진의 은사隱士 노포魯褒의 전신론錢神論에서, "돈이야말로 신이다" 유송 시절의 유의경이 지은 세설신어에는 태치汰侈 편이 존재한다. 때찌,, 때찌 때찌 해줄 만한 낭비와 사치에 대한 내용인데 주인공은 무제의 외숙 왕개, 창업 공신 석포의 아들 석숭, 오나라 토벌에 공을 세운 왕혼의 아들로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