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연, 후진 북방 상황후연이 창건될 당시 하동에선 모용홍이 서연을 세웠으나 16국에는 포함되지 못할 정도로 세력이 미약했다. 고작 2년 동안 보위가 7번이나 바뀌면서 최종적으론 모용외의 동생인 모용운의 손자 모용영이 황제가 되었다. 처음엔 후연의 번국을 자청했지만 386년 장자에서 황제를 선포했다. 중흥 8년(393), 남북조시대 영웅 모용수의 공격에 장자가 함락되며 모용영은 목이 베였다. 모용수의 뒤를 이은 모용보는 모용덕(전연의 황제 모용황의 막내아들이자 후연 모용수의 동생)에게 기, 연, 청, 서, 형, 예주 6개의 군사를 총괄케 했다. 당시 북위는 이제 막 건국된 신생 국가였지만 훗날 도무제로 추존되는 탁발규의 대군은 기세가 등등했다. 북중국의 최강자인 후연을 공격해 황제 모용보를 압박했고, 이내..
동진의 군사는 기세를 놓칠라, 빠른 속도로 전진의 군대를 추격했다. 동진은 곧 수양을 회복하고 전진의 회남태수도 포로로 잡는다. 그러나 전진의 전선이 꽤 길었기에 동진의 추격전도 그다지 오래가진 못했다. 후방의 전진 군대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기에 비수대전은 그걸로 끝이 난다. 부견은 모용수의 부대만이 진을 유지하며 퇴각했기에 그곳으로 몸을 의지했다. 배고픔과 화살에 맞은 통증 때문에 힘들었던 부견은 회수 부근에서 한 백성에게 밥과 돼지 넓적다리를 받자 비단 열 필과 솜 열 근을 하사하기도 했다. "폐하께서는 안락함에 싫증을 느끼셔서 스스로 위험과 곤경에 처하게 되셨습니다. 신은 폐하의 자식이고 폐하는 신의 아버지이시니 어찌 자식이 그 아버지를 봉양하고서 보답을 바랍니까!" 전진군의 전선이 길었고 선봉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