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의는 제나라 최혜경의 난을 진압한 후 상서령, 위위에 임명됐으나 소보권의 심복들은 그를 꺼려 죽이려 했다. "소의는 소란이 울림왕을 폐립 한 것을 흉내 내려 합니다!" 이에 소보권은 소의(양나라 무제 소연의 친형)에게 사약을 내렸다. 소의는 이 사약을 받아 마시고 죽었는데, 아무리 봐도 소의는 앞뒤가 꽉 막혀 도무지 말도 안 통하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자고로 사람은 언젠가 죽기 마련이다. 상서령이 어찌 반기를 들어 도주할 수 있겠는가?" 당시 제나라엔 경릉팔우竟陵八友란 영명체의 대표적인 시인들이 있었다. 왕융王融, 사조謝朓, 범운范雲, 임방任昉, 심약沈約, 육수陸倕, 소침蕭琛, 소연蕭衍이 그들이다. 이중 사조는 명문 사씨 일가의 자제로 유송의 마지막 황제인 유욱의 목을 벤 왕경칙의 사위이기도 했다...
498년 12월, 암군 동혼후 소보권이 남제의 보위를 잇는다. 제명제 소란은 죽기 전에 서효사를 상서령, 심문계를 좌복야, 강우를 우복야, 유훤을 위위, 진현달에겐 군정, 시안왕 소요광에겐 안팎의 정사를 맡겼지만 동혼후의 전횡을 막을 순 없었다. 소보권은 즉위하자마자 부황의 영구가 태극전에 안치된 모습이 눈에 거슬려 속히 매장케 했다. 곡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목이 아프다는 이유로 하지 않았다. 책을 읽거나 글 쓰는 것을 싫어했고 태감들과 함께 굴을 파 쥐를 잡는 쥐잡기 놀이를 밤새도록 했다. 말을 더듬는 버릇도 있어서 신료들과 정사를 논하는 것도 꺼려, 태감과 무뢰배 소년들과 어울리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옹주자사로 있던 종친 소연은 나라에 큰일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해 군비를 강화하고 사람을 ..
북위 효문제 모순 - 한화정책 효문제 태화 19년(495)엔 제나라 공격을 감행했으나 무덥고 습한 날씨에 군수품 조달이 늦어지면 소득 없이 귀환한다. 이해 7월, 북위는 5호 16국 국가들이 행해오던 호한분치를 버리고 한화漢化를 공식적으로 천명한다. 물물교환 방식을 버리고 태화오수전을 주조해 화폐 개혁을 시도했고, 낙양에 국자감, 태학, 사문소학을 두었다. "오늘 짐(효문제 탁발굉)은 선비어를 포함한 모든 북방어를 금지하고 한어로 통일해 쓰기로 했다. 30세 이상의 관원은 이미 오랜 습관이 된 까닭에 서서히 바꾸는 것을 윤허하나 조정에서 오랫동안 봉직한 30세 이하의 관원은 선비어로 말하는 것을 금한다. 이를 어길 경우 곧바로 강등과 면직 조처를 취할 것이다." 북위 태화 20년(496), 탁발씨를 원씨..
소소업은 남제 경성(수도)으로 돌아와 아픈 아버지를 위해 곡성을 내는 등 그럴듯하게 연기를 해서 황제가 되었다. 소색은 이 연극에 속아 문혜태자의 뒤를 이어 소소업을 제나라 황태손으로 삼아 제위를 물려준다. 방탕한 소소업은 국고를 함부로 썼고 황후 하씨도 난교를 즐기자 종실 소심과 소탄지는 은밀히 서창후 소란과 모의해 폐립을 준비했다. 애초 소색(소도성 아들)은 소소업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었다. "5년 동안은 모든 것을 재상에게 맡기고 너는 의견을 섞지 말 것이며, 5년이 지나서는 다시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마라. 만약 스스로 이룬 것이 없더라도 아주 한스러워하지 마라 ... 만약 할아버지를 기억하며 당연히 잘 해나가겠지!" 이전에 소소업이 황제가 되기 직전, 소색의 장례 중에도 소소업은 기녀들은 불러 ..
건원 4년(482) 3월, 위진남북조 시대 제나라. 무제(남제 무제 소색, 소도성 장남)는 유송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지방관의 수탈을 막기 위해 보내던 검관(요즘으로 치면 감찰관)들이 지방관과 결탁하여 뇌물을 수수하는 행태가 많아 검관을 폐지했다. 조세를 포함해 건강으로 보내지는 많은 물자의 징수 방법과 수량도 법으로 정했으며, 조세 제도를 성공적으로 개혁하여 남제 중앙 정부의 재정이 풍부해졌다. 그러나, 예서를 잘 써서 천하에 독보적이었고, 조정 신하들의 찬사를 듣던 망나니 황태자 손자가 있었다. 소색과 소장무(소색 아들 문혜태자, 소소업 친부)의 편애를 받던 소소업이다. 제나라 소색은 즉위하자, 소소업을 남군왕에 임명하여 식읍 2천호 받도록 한다. 당시 나이 10살이었다. 호..
전폐제 유자업이 폐위되고 보위에 오른 명제 유욱(유의륭의 11남)은 472년에 사망하고 장남 후폐제 유욱昱이 즉위한다. 유욱은 고명대신으로 원찬, 저연, 채흥종 등을 지정했는데 남제를 세운 소도성은 저연이 발탁한 인물이기도 했다. 유송 원희 2년(474), 계양왕 유휴범은 종실의 어른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불만을 품고 심양에서 거병하나 우위장군 소도성에게 제압당한다. 소도성은 이때의 공으로 상서좌복야에 임명됐다. 이듬해엔 건평왕 유경소가 제위를 탐내 난을 일으켰으나 역시 진압되었다. 후폐제 유욱은 유송 황제로 즉위 당시 12세에 불과했다. 남조의 황제답게 즉위 한 그 날부터 막장 행보를 시작한다. 후폐제 유욱위진 남북조 시대를 대표(?)하는 유욱은 스스로를 이장군李이라 칭하며 궐 밖에서 망나니처럼 굴었다...
신라 장보고와 이정기(이사도) 제나라 멸망, 당나라 무령군 먼저 읽을 글 : [이정기 제나라 역사] 고구려 유민, 당나라 절도사의 왕국 [바로가기] [아래는 이정기 제나라 역사] 815년, 제나라 이사도가 강회 일대의 물산이 쌓여 있는 하음의 곡식창고를 불사르는 등 선제공격을 가했다. 이곳은 당나라 조정이 이사도 토벌을 위해 군수물자를 비축해뒀던 곳으로 저장된 군량미만 2백만 석에 달했다. 이해 12월, 헌종이 강회의 번진들과 투항해온 번진들을 앞세워 이순 토벌에 나섰다. 장안과 가까운 하남부에 10여 개의 진지를 구축한 이사도는 장안에 자객을 보내 번진 토벌을 주장한 재상 무원형을 암살했다. 그러나 헌종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이사도는 조정과 정면대결을 펼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됐다. 당시 토벌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