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인구 69만호는 과장? 90~135만명, 역산법과 영토

그러나 여기 요동군의 인구가 64,158호인데 81,714명으로 잘못 계산되어 있음을 고려하여 64,158호가 약 30만이 된다고 생각하면 요동, 현도, 낙랑에 약 60만명이 살고 있었다는 계산할 수 있다.



그러나 창해군으로 편입되었다는 남려의 예인 28만명의 행방이 묘연한 것이다. 이것을 맥족 계통인 부여에 의한 영토 확장에 따르는 인구 흡수로 보아야 할 것인가?

그렇다면 부여가 뒤에 고구려에 복속하게 되니 앞의 60만에 28민을 더해 88만명이 같은 지역에 살고 있었다는 계산이 된다. 


부여의 인구는 어떠하였는가?


위지 동이전(권300, 부여전)에 영토의 둘레가 2,000리라하고 인구에 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같은 크기의 땅에 30,000호가 있었다 하는 고구려에 비해 인구는 적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북으로 갈수록 인구가 희박해지기 때문이다.


좌우간 위의 계산으로 남려가 이끌고 있던 인구까지 합쳐 약 90만에 가까운 인구가 뒷날 고구려의 영토가 될 땅에 살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처음에는 40만이었다.


뒤에 고구려의 잠식으로 25만으로 축소되었다고 추정되는 낙랑의 주민은 한반도 안에 살고 있었으므로 고구려가 점령할 압록강 이북의 땅에는 북사와 위서가 암시하는 45만이 아니라 65만명이 살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한반도에서는 처음에 40만이었다가 고구려의 잠식으로 25만으로 축소되었다고 추정되는 낙랑의 주민과 뒷날 남하를 계속하여 복속시킬 주민들이 고구려 남부의 주민을 이루게 되는데 이에 따르는 인구의 증가는 얼마나 되나? 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없을까?


이를 위해 우리는 인구에 관한 비교적 정확한 통계를 가지고 있는 최근의 한반도 인구를 토대로 옛 시대에 관한 숫자를 찾는 역산법을 적용해 보기로 하자.


1993년의 통계를 보면 휴전선 이북의 땅(이 전체를 고구려가 지배하던 땅으로 보아 무방하다)에 21,720,000명이 살고 있었다고 하고, 또 고구려가 전성기에 점령하고 있었던 경기도에는 1995년에 2,146,860명의 주민이 있었다고 한다.

고구려가 강원도의 일부, 충청도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기는 하나 이에 관한 자세한 것을 알 수 없으므로 우선 위 숫자만 계산하면 전성기의 고구려 통치권 아래있던 지역에 1993-1995년에 약 2,400만명의 인구가 있던 것으로 집계된다.


이 지역의 총 면적은 북한의 121,608km2에 경기도의 10,118km2를 합해 131,726km2이다. 왜 이런 숫자를 제시하는가? 이를 중국의 인구 추세와 비교하기 쉽기 때문이다. 중국에는 7세기말에 4,500만의 한족이 있었는데 10-13세기에 1억이 되고, 1740년에는 1억 4천만으로, 1850년에는 4억 3천만으로 늘어 7세기를 기준으로 하면 각각 2.5배, 3.5배, 10배로 증가한 것이다.




고구려 인구3. 69만호는 과장, 90~135만명 (말갈, 삼국유사)



이에 반해 우리나라에서는 11세기에 210만의 인구가 있었다고 서긍이 그의 고려도경에 적고 있는데, 1753년(영조 29)의 한반도 총인구는 7,298,731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중국 한족의 인구가 10-13세기에서 19세기까지 이르는 동안 인구가 4.3배가량 증가했는데 한국에서는 11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동안에 3.5배로 늘었다.


10세기에서 13세기라는 모호한 기준을 고려할 때 이 3.5배는 중국의 증가율과 맞먹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과 한국의 인구 증가율이 서로 비슷하다는 기준으로 보면 7세기의 한반도 인구는 11세기 210만의 2.5분의 1, 즉 85만이 되는 것이다. 고구려 옛 영토에 살던 1904년의 인구 통계를 보자.


이를 보면 평안남북도에 868,906명, 황해도에 382,230명, 경기도에 672,636명, 함경남북도에 750,008명이니 전체로 250만가량이 된다.


 평안남북도

 868,906명

 황해도

 382,230명

 경기도

 672,636명

 함경남북도

 750,008명

인구의 추세가 우리나라와 거의 비슷한 중국 인구가 7세기에서 19세기 사이에 겨우 10배가 되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250만가량이 된다.


인구의 추세가 우리나라와 거의 비슷한 중국 인구가 7세기에서 19세기 사이에 겨우 10배가 되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250만명의 10분의 1은 약 25만이다.


만약 우리의 인구 증가가 중국과 비슷했다면 고구려가 망할 때 압록강 이남의 고구려 고토에는 25만 정도의 인구가 살고 있었다는 추측할 수 있다. 10세기 이전의 인구 증가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정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고구려 땅에는 7세기에 만주 땅에 65만명, 압록강 이남에 25만 이상, 따라서 90만 정도의 인구를 가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으로 보아 구당서의 기록, 즉 고구려 말에 697,000호, 다시 말하면 인구가 350만이 된다는 것은 믿을 수 없음이 명백하다. 이렇게 볼 때 앞에 밝힌 삼국유사에 나오는 숫자, 즉 대체로 고구려에 100만 명이 살았다는 통계가 거의 정확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인구가 이렇게 적었을까?


신형식은 그의 통일 신라사 연구에서 7세기 이후 전란, 포로, 귀순 등의 이유로 70이라는 고구려 인구가 감소하였다고 했는데 이는 위의 100만에 가산되어야 할 것인지? 지금 이 문제를 만족스럽게 해결할 방도는 찾아지지 않는다. 구당서에 다음 같은 기록이 있다.


무력 19년 6월 ... (당나라)군이 요하를 건넜다. 막리지가 가시성의 700명을 보내 개무성을 지키게 했다. 이적이 이들을 거의 모두 사로잡았다. 이들이 모두 (당나라) 군을 따라 공을 세우기를 청하니 태종이 말하였다.


'누가 너희들의 힘을 얻고자 욕심내지 않겠느냐만 너희들의 집은 다 가시에 있고 너희들이 나를 위해 싸운다면 곧 전사할 것이 아닌가? 한 집안의 처자를 못살게 하고 한 사람의 힘을 구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한 가구에서 군인 하나가 뽑혀 나왔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인데 이는 고구려의 한 가족의 성원이 4명 내지 5명이면 이들이 대게 40세에서 50세까지 살 수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믿을 수 있는 말이라 생각된다.

신당서(권219, 발해)에 나와 있는 또 하나의 기록을 보면 발해에 10여만호가 있었는데, 고구려는 당나라와 싸울 때 30만의 병사가 있었다고 하나 발해에는 고구려보다 군대의 수가 3분의 1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30만의 군대를 가지려면 30만호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고구려 인구는 90내지 100만이 아니라 30만 X 4, 5명 = 135만이 된다.


그러면 고구려 인구를 최소 90만, 최대 135만이라고 결론지을 것인가?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고구려 군대에 끌려다니던 말갈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좌우간 삼국시대의 인구에 관해서는 아직도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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