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발 선비족 대국代 과 위진남북조 북위의 탁발규 [52화]
- 한중일 역사 / 위진남북조 100화
- 2020. 2. 13.
위진남북조 시대, 중기에 접어들며 또다른 선비족 탁발선비가 등장한다.
탁발선비 대국 代國
위진남북조 시대, 탁발부의 정치 활동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탁발역미의 손자 탁발의이, 탁발의려 형제 때부터이다.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으로 많은 한인이 참합에 근거지를 두었던 두 선비족 형제의 세력권 안으로 피난하였고 탁발의이 또한 병주자사 사마등에 호응하여 유연, 석륵과 대적했다.
이에 진 회제는 310년 대국공에 봉하니 이것이 대국代國의 시작에 해당한다.
탁발의려는 평성을 남도, 성락을 북도로 하였는데 이중 북도를 직접 다스리고 평성을 포함한 남부는 아들들에게 맡긴다. 이후 탁발의려의 장남 탁발육수는 아버지를 공격하여 승리했지만 탁발부는 이를 계기로 남부와 북부의 대치로 이어진다. 이를 하나로 합친 건 탁발의려의 동생의 손자인 탁발십익건이었다.
탁발십익건은 오래도록 후조의 업도에 인질로 붙잡혔었지만 남부파에 몸을 맡겨 결국 북부를 제압하는 데 성공한다.
선비족 탁발부의 탁발십익건은 338년 11월, 내몽골 성락에서 도읍을 정하며 대왕代을 칭한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또 하나의 국가가 세워졌다. 이후 인근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며 모용씨와 인척 관계를 맺었다.
376년, 탁발선비 대국은 전진의 부락, 주동, 장자, 등강 등의 20만 대군에 패퇴해 사실상 멸망 수준에 이르는 큰 피해를 본다.
전진으로 출병했던 유고인의 10만 대군도 비슷한 시기에 대패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십익건은 중병에 걸리고 보위를 탐내던 탁발식군(서장자)이 총애를 받던 모용씨와 그 자식 6명을 모두 죽인다. 전진은 기회를 틈타 대국을 쳐서 마침내 멸망시키니, 5호 16국 시대 (위진남북조 시대) 탁발부의 첫 국가는 이렇게 사라진다.
당시 선비족 탁발규(북위 도무제)는 6세의 어린아이로 어머니와 함께 동부대인 유고인에게 의탁하였으나 384년에 그가 사망한다. 유고인의 동생 유권과 유고인의 아들 유현 사이에 쟁투가 일어나 유현이 유권을 죽이고 권력을 차지한다. 유현은 탁발부의 적장손 신분인 탁발규를 시기해 그를 죽이려 했지만 탁발규의 어머니는 먼저 친정인 하란부로 피신한 뒤였다.
당시 전진이 비수에서 패배한 뒤 각지에서 이민족들이 나라를 세우자 탁발부의 적장손 신분으로 우천에서 대왕에 즉위했으니 이때가 동진 효무제 사마요의 태원 11년(386)이다.
압도적 전력차에도 북방의 전진은 남방의 동진에 패배한다
수양성에서 도주하는 부견
북위 건국
한족 최현백, 등연, 왕덕 등과 국가 제도를 정비했고, 같은 해 4월, 탁발선비 대국은 국호를 위魏로 바꾼다. (위진남북조 시대 강국 북위) 이후 탁발규는 북방으로 진출해 유현, 고막, 고거 등의 부락을 격파하고 독립을 꾀하던 외숙의 부족인 선비족 하란부도 복속시킨다.
"이 오랑캐떼 여러 종족은 덕德과 의義를 알지 못하고, 서로 침략하고 도적질하며, 나라 법을 범하였기 때문에 내가 이들을 정벌하였다. 또한, 좀도둑 같은 놈들인데 어찌 근심할 필요가 있겠는가?
지금 중원에 대란이 있으니 내가 그것을 먼저 평정한 연후에 그 위엄을 넓힌다면 복종하지 않는 바가 없을 것이다."
391년, 위진남북조 시대 영웅, 탁발규는 황하를 건너 오르도스를 횡단해 유위진의 근거지인 열발성을 함락시킨다. 그리곤 3일간의 추격전을 펼쳐 몽골 남상산 인근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선비족 유위진부를 궤멸시켰다.
탁발규가 유위진 일족 5천여 명을 모두 도살하자 북방의 부족들은 대거 탁발규에게 투항한다.
혁련발발 탈출
이때 살아남은 유위진의 아들 발발이 대하를 세운 혁련발발이다. 혁련발발은 겨우 도망쳐 이웃 부락인 질간부에 몸을 의탁했는데 질간아리, 국파가망 등이 북위로 돌려보내려는 부락장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북위로 압송되던 중 질간아리와 후진으로 도망쳐 후진의 한 지방관인 몰혁우에게 의탁했다.
몰혁우는 비범한 혁련발발에게 딸을 주었으나 혁련발발은 자립하기 위해 장인을 죽이고 그 세력을 모았다. (혁련발발이 세운 대하는 이후에 등장)
이후 하나라가 세워지지만 북위에 멸망한다
이렇게 북위는 북방에서 지위를 확고히 하였고, 이는 모용선비와의 충돌이 머지않았음을 알리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