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나라 수도 건강성은 함락되었다. 이미 진숙보는 백성과 신하들의 인망을 잃은 상태였다. 황궁으로 수나라 군대가 몰려오자 진숙보는 달아나려 했으나 이내 포기하고 포로로 잡힌다. 이전에 건강성 안으로 수나라 군대가 몰려오자 백관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상서복야 원헌만이 옆에 남았다. "내가 평소 경을 심히 박하게 대했는데 오늘 참으로 참괴할 뿐이오! 이는 내가 덕이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강동의 사대부들 역시 도가 다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오." "폐하는 의관을 단정히 한 후 어전에 앉아 양무제가 후경에게 했던 고사를 좇으십시오." 그리곤 경양전으로 달려가 장귀비와 공귀빈을 챙겨 우물 안에 숨는다. 그러나 이는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우물 안에 성인 남녀 3명이 들어간다는 자체가 비상식적인 ..
북위 헌문제 연흥 6년(476) 8월, 풍태후가 술에 독을 타 헌문제 탁발홍을 살해한다. 풍태후는 태황태후가 되어 국가 대정을 장악했고 보위에 오른 효문제 탁발굉은 12세에 불과했다. 북위 효문제 탁발굉은 황제가 되어서도 풍태후(문명태후)한테 체벌 당하며 성장한다. ㅠㅠ 이 일이 있기 12년 전인 문성제 화평 5년(464), 위진남북조 시대 유연의 가한 토하진이 죽고 아들 여성予成이 뒤를 잇고 자신을 수라부진가한이라 칭하며 연호를 영강永康이라 하였다. 이전의 가한처럼 그도 북위의 북방을 공격하여 약탈하였다. 6년 뒤인 헌문제 황흥 4년(470), 경조왕 원자추, 동양공 원비, 임성왕 원운, 여음왕 원천사, 제남공 나오발, 농서왕 원하에게 명해 태무제 탁발도 시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연 토벌에 마침표를 찍..
태무제 유연 공격태무제 탁발도는 대하를 멸망시킨 뒤 유연을 공격하려 했으나 대다수가 반대하고 최호만이 찬성했다. "저들이 방심하고 있는 지금 여름의 허를 틈타 정벌하지 않으면 후에 반드시 더 큰 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남적(송나라)은 고려할 필요가 없소. 전에 유연을 칠 때 남적은 말로만 우리를 친다고 했을 뿐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소." 태무제 탁발도와 다른 대신들에게 이런 말을 하자 태무제 탁발도는 최호의 의견을 좇는다. 위진남북조 시대 유연은 북위의 골칫거리여서 공격에 나선다. 신가 2년(429) 여름, 유연은 사방으로 흩어져 방목하고 있던 까닭에 각개격파 당한다. 북위군은 동서 5천 리, 남북 3천 리에 걸친 추격전을 펼쳐 포획한 사람과 노획한 말과 소 등의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
부견과 그의 참모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저족을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저족 번세를 죽여 황제의 권위를 높이는 한편, 중앙 정부의 군사력 확충을 위한 일화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외에도 제후왕들의 작위를 공公으로 낮췄다. 그러나 백성에겐 따뜻했던 부견은 중농억상 정책으로 세금과 요역을 크게 감면하고 태학의 학생들을 격려했다. 호한분치에서 호한융합으로 가는 시발점이었다. 이는 큰 반발에 부딪혀 흉노 좌우현왕과 부생의 형제인 부류, 부쌍, 부유 등이 반란을 일으킨다. 부견은 이를 빠르게 제압하고 국외로 시야를 돌린다. 동진 환온의 북벌 당시 전연은 전진에게 땅을 떼어주는 조건으로 구원을 청했었다. 호뢰 이서의 땅, 그 땅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부견은 악덕 채무자에게 원금과 이자를 꼭 받아내려 했다...
고구려 보장왕, 시호인가 이름인가 마지막 왕 궁금증 출처 : https://cafe.naver.com/historygall/69914 삼국사기에서는 분명히 고구려 마지막왕 보장왕에게는 시호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 보장왕의 보장이 시호일 가능성을 조심스레 제기해 본다. 고구려의 시법에 따르면, 한 예시를 들어보자. ■ 국강상 광개토경평안 호 태왕 고구려는 대(大)대신 주로 태(太)를 썼다. 따라서 대왕이 아니라 태왕이다. 물론 이게 황제격 명칭이라는 것은 아니다. 호(好)는 모든 왕에게 붙였다. 마치 중국에서 시호를 지을 때 이을 효(孝 :: 시법에서는 효도 효자가 아니다, 이을 효이다. 당연히 초대 황제는 제외된다) 를 꼬박꼬박 붙이는 것과 같다. '광개토경평안' 은 시호이다. 업적을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