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진 불안 요소부씨 일족의 저족은 봉건제의 여파로 전진의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었으나 중원엔 선비, 흉노, 강, 저 등이 섞여 살고 있었다. 겉으론 부강한 국가였으나 내부적으론 결코 안정적이라 볼 수 없는 불안 요소가 너무나도 뚜렷했다. "내가 대업을 이은 지 30년. 사방은 대략 평정되었으나 오직 동남 한구석만은 아직 왕화를 입히지 못하고 있었다." 이전에 부견은모용수 - 관군장군, 경조윤전연 마지막 황제 모용위 - 신흥후모용위 동생 모용충 - 평양태수구지 양통 - 평원장군, 남진주자사전량 장천석 - 귀의후강족 요장 - 양무장군에 임명했었다. 비수대전 이후 중국 전진이 빠르게 해체된 이유다. 결국 부견은 왕맹의 간언과는 정반대의 행위를 벌인 것이다. 매우 위험하고 누구나가 우려할만한 조치였다. 중..
북조 통일왕조 전진, 세상을 떠나는 왕맹 전진 건원 6년 11월의 일이었으니 병사를 일으킨 지 고작 1년도 되지 않아 전연은 전진에 멸망했다. 전연을 멸망시킨 부견은 양주의 전량국 장천석에서 투항을 권했고 장천석은 번국을 칭한다. 이후 부견은 요장을 보내 양주를 함락시키고 장천석은 장안으로 끌려와 시중, 비부상서, 귀의후에 봉해진다. 이후 그는 비수대전에서 패배할 당시 동진에 투항하여 효무제에게 중용되었다. 그러나 부견에게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으니, 건원 11년(375), 왕맹이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직전 유소를 올렸다. "폐하는 공업이 쉽게 이뤄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응당 전전긍긍하며 여림심연如臨深淵(두려워하고 조심하고 삼가며, 깊은 못 가에 서 있는 듯, 얇은 얼음을 밟듯 하라..
부견과 그의 참모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저족을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저족 번세를 죽여 황제의 권위를 높이는 한편, 중앙 정부의 군사력 확충을 위한 일화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외에도 제후왕들의 작위를 공公으로 낮췄다. 그러나 백성에겐 따뜻했던 부견은 중농억상 정책으로 세금과 요역을 크게 감면하고 태학의 학생들을 격려했다. 호한분치에서 호한융합으로 가는 시발점이었다. 이는 큰 반발에 부딪혀 흉노 좌우현왕과 부생의 형제인 부류, 부쌍, 부유 등이 반란을 일으킨다. 부견은 이를 빠르게 제압하고 국외로 시야를 돌린다. 동진 환온의 북벌 당시 전연은 전진에게 땅을 떼어주는 조건으로 구원을 청했었다. 호뢰 이서의 땅, 그 땅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부견은 악덕 채무자에게 원금과 이자를 꼭 받아내려 했다...
이전에, 전연의 황제 모용위는 모용수에게 영격을 맡기는 한편, 전진 부견에 호뢰 이서의 땅을 베어주는 조건으로 원군을 요청했다. 전진의 대다수 중신이 반대하는 와중에 왕맹만은 원군 파병을 부견에게 강력히 주장한다. "전연(연나라)이 비록 강하다고는 하나 환온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 환온이 패주한 후 전연(연나라)의 원기가 크게 상해 있을 때 기회를 틈타 연나라를 도모할 만합니다." 전진 황제 부견은 이를 받아들여 2만 병사로 전연과 모용수의 군대를 돕는다. 당시 환온은 우물쭈물하며 사태를 관망했는데 그는 북벌을 나왔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 계속 동진 조정의 내부 동태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황위를 찬탈할 생각에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사령관이 이러니 동진의 북벌군이 제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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