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태후 사후 진정한 황제가 되어 한화 정책을 추진했던 위진남북조 시대 효문제 원굉의 치세가 저문다. 북위 효문제 태화 21년(497), 20만 명의 군사를 동원해 제나라로 진격했으나 남제 남양 태수 방백옥의 복병계에 걸려 거의 죽을 뻔했다. 이듬해엔 제명제 소란이 죽자 국상이 있는 나라는 치지 않는다며 이내 철군했다. 499년, 효문제가 사망하고 황태자 원각이 즉위하니 이가 북위 선무제다. 선무제는 황숙 원희가 모반하자 원씨 종친을 불신하고 외숙인 고조를 신임했다. 그 배경엔 자귀모사의 원칙을 어기고 살아남은 그의 생모 영태후(호씨라서 호태후라고도 함)가 있었다. 자귀모사를 어긴 이 시기부터 북위는 점차 쇠락의 길을 걷는다. 고조가 붕당을 결성해 북해왕 원상, 청하왕 원역을 사사로이 죽이고 권위를 높이기..
효문제 태화 17년(493), 북위 황제 효문제(탁발굉)는 낙양 천도를 결정했다. "평성은 매우 한랭했다. 6월에도 비와 눈이 내리고, 모래바람이 수시로 불었다. 이에 낙양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위진남북조 시대 사서인 위서의 기록에 따르면 기후로 인해 천도를 결정한 것이나 내막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국력이 커질수록 수도인 평성으로 몰려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이들이 머물 집과 식량 문제가 생긴 것이다. 가축으로 식량을 옮기더라도 중간의 소진분이 너무 커서 이 또한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북쪽의 유연과 수도의 거리가 가까웠고, 북중국 통일 이후엔 국가 유지를 위한 행정의 문제도 생겼다. 이에 북위 효문제는 낙양 천도를 결정하고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이전에 북위 중신들 사이에선 만약 "수도를 이전한다면..
북위 문소황후 일가, 발해 고씨인가 고구려 고씨인가? 출처 : 고구려 유민 북위 문소황후 일가의 비지(碑誌) 연구, 민경삼 [링크]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북위 문소황후(고조용)의 5대조인 고고高顧, 고무高撫 형제가 영가의난에 고구려로 피난한다. 그 후 북위 헌문제獻文帝 때에 고무의 손자 고잠高潛은 돌아가 요동에 거하게 되고, 고고의 4세손인 고양, 고승신도 효문제 때에 북위로 들어간다. 고양의 딸과 손녀는 북위의 황후가 되고, 고양의 아들 고조와 손자 고맹은 부마가 된다. 고조는 당시 상서령의 지위에 있으며 조야의 전권을 행사한다. 고고, 고무의 친족은 여러 대에 걸쳐 고구려에 살았다. 그중 일부는 북위로 갔으며 일부는 고구려에 남게 되었다. 이 기록은 대다수의 학자들이 위서나 북사 속의 고구려 관련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