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원 4년(482) 3월, 위진남북조 시대 제나라. 무제(남제 무제 소색, 소도성 장남)는 유송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지방관의 수탈을 막기 위해 보내던 검관(요즘으로 치면 감찰관)들이 지방관과 결탁하여 뇌물을 수수하는 행태가 많아 검관을 폐지했다. 조세를 포함해 건강으로 보내지는 많은 물자의 징수 방법과 수량도 법으로 정했으며, 조세 제도를 성공적으로 개혁하여 남제 중앙 정부의 재정이 풍부해졌다. 그러나, 예서를 잘 써서 천하에 독보적이었고, 조정 신하들의 찬사를 듣던 망나니 황태자 손자가 있었다. 소색과 소장무(소색 아들 문혜태자, 소소업 친부)의 편애를 받던 소소업이다. 제나라 소색은 즉위하자, 소소업을 남군왕에 임명하여 식읍 2천호 받도록 한다. 당시 나이 10살이었다. 호..
효무제는 조세를 포탈하는 관료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이 시기 유송은 재정이 악화되어 갔다. 또한 문벌귀족은 노력하지 않아도 고관에 오르나 한문, 서민들은 출세길이 막혀 서진 말기처럼 현학이나 풍류를 추구하는 행태가 악화하었다. 따라서 관료들의 업무는 항상 지체되었고 국가 운영은 말단 관리들이 담당하게 되어 유송은 내부가 흔들리게 된다. 국가의 내부 문제를 악화시킨 효무제 유준은 35세의 나이에 병사하고 태자 유자업이 465년 정월에 뒤를 이으니 그가 전폐제이다. 그 유명한 유.자.업. 유송 전폐제 유자업은 어려서부터 조급하고 포악했는데, 하루는 어머니 왕태후가 병이 위독해지자 아들인 황제가 보고 싶다며 불러오게 했다. 그러자 유자업은 이렇게 말했다. "병자의 방에는 귀신이 많은데 어찌 갈 수 있는가!..
북위 vs 송나라원가 27년(450), 양양, 수양, 팽성 등에 황자들을 부임시키며 북벌의 의지를 굳건히 세워 두었었던 문제가 왕현모를 필두로 두 번째 북벌을 시도한다. 이때, 유송 문제는 여러 문인 귀족들과 회의 중이었는데 글자도 못 읽고, 책에는 손도 댄 적이 없던 골수 무인 심경지가 문제에게 직언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예컨대 집을 다스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밭일은 머슴에게 맡기고, 베 짜는 일은 하녀에게 시키는 법. 폐하는 지금 적국을 치려고 하면서 백면서생들과 일을 의논하고 있으니 어떻게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유송 문제는 웃으며 이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북위 태무제 탁발도의 대대적인 송나라 공격과 시기가 겹쳐 북벌군은 되려 수세에 몰린다. 공격에 나선 병사가 수비를 맡은 것이다. ..
원가 6년(429), 팽성왕 유의강을 형주자사, 장사왕 의흔을 남연주 자사, 강하왕 유의공을 남서주자사로 삼으며 황권 강화를 도모한다. 원가 7년(430), 문제 유의륭은 재위 기간 국력이 강성해지고 북위에 빼앗긴 황하 이남을 수복해야 한다는 의론에 따라 첫 번째 북벌을 시도한다. (위진남북조 시대 총 두 차례 북벌을 시도하지만 모두 실패) 원가 8년(431), 북벌군은 사실상 영토 확장의 의지가 없었다. 유송 문제 본인이 권신들을 지나치게 의식해 북벌에 나선 장군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도 못했으며, 황하 이남의 땅들은 공격하긴 쉬워도 지키긴 어려우므로 이때의 북벌은 사실상 군사 시위에 불과했다. 총주자사 유흥조가 하북으로 진격해 태항산 일대를 장악해야 한다고 상주했으나 조정에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유유는 363년 봄, 위진남북조 시대, 북부군단의 소재지인 경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관청의 하급 서기관으로, 일가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생활에 쪼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난산으로 목숨을 잃었고 돈이 없었던 아버지는 아이를 죽이려고도 했다. 마침,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은 의붓누이가 아이에게 젖을 물려 주었기에 유유는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택할 수 있었던 건 전장에서 공을 세워 출세하는 것뿐이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처럼 정말 X구멍 찢어지게 가난한 곳에서 태어나 황제(송무제)가 되었으니 누가 이를 상상이나 했으랴. 유송 무제 유유, 위진남북조 시대 2번째 남조 국가 송나라 건국유유가 420년 6월에 보위에 오르니 그가 송나라 무제다. 유유는 재위 후 중앙재정 확립과 황제권력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