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연이 혼란스러운 위진남북조 시기, 탁발도는 북연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가해 10여 개 큰 군을 먼저 손에 얻는다. 풍홍은 송나라에 칭신했으나 송나라도 별수가 없었다. 북위 연화 2년(433), 풍홍은 용성 아래에 북위군이 진을 치자 몰래 고구려로 도망쳤으며 북위군은 용성을 불태운다. 풍홍은 이후에 송나라로 도망치려 하거나 황제 노릇을 하려 했기에 고구려 장수왕에게 일족과 함께 주살 당한다(437년). 이전에 동생 탁발고를 인질로 잡아 두었다가 살해한 정동과 부고패의 5족도 도살했다. 이후 등장할 유명한 북위의 풍태후는 풍홍의 손녀이기도 하다. 탁발도의 북방 통일을 위해 남은 건 북량 정벌뿐이다. 북량은 옛 전진의 신하 여광이 세운 후량의 후신으로 여광의 부하 저거몽손은 여광을 배신하고 단업을 양왕凉으..
태무제 탁발도 즉위태상 8년(423), 탁발사가 병사하니 아들 탁발도가 보위를 잇는다. 북위를 화북의 지배자로 만든 태무제가 바로 그다. 명원제의 사망 사실이 알려지자 유연은 북위를 공격해 대국의 옛 수도 성락을 함락시킨다. 탁발도는 친히 경기를 이끌고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가 운중에 이르렀다. 유연의 국왕 흘승개가 북위군을 포위했으나 눈 하나 까닥하지 않는 어린 황제를 보고 용기를 얻은 북위군은 유연의 대장 어척근을 활로 쏘아 죽이며 포위를 풀었다. 시광 2년(425) 11월, 탁발도가 고비사막을 가로질러 유연을 격파했고, 이듬해인 시광 3년(426)엔 관중의 대하를 멸망시킨다. 대하 수도 통만성위진남북조 시대 413년, 혁련발발은 대하를 세우고 유유가 동진으로 돌아간 틈을 노려 관중을 손에 넣었..
고팔부古八部 시절 거란족과 선비족(북위), 거란과 북제 등국 3년(386년), 북위의 정벌로 인해 고막해와 분리된 거란족은 반세기가 지나면서 안정을 되찾았고 점차 세력을 회복하면서 북위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북위의 세조 탁발도 태연 3년(437)에 거란은 사신을 파견해 공물을 바쳤다. 태평, 진군 연간(440~450)에는 좋은 말을 매년 공납했다. 현조 탁발홍(466~470 재위) 시기에 거란족은 북위와 이미 여러 해 동안 왕래하면서 마침내 정식으로 승인을 받아 "여러 나라의 말석에 끼여 향응에 참가하는 지위를 얻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6세기 중엽까지 거란은 고팔부古八部의 연맹 단계에 해당한다. 고팔부의 명칭과 관련해 위서의 현조기와 거란전 및 책부원귀 요사의 영위지와 세표의 기록이 서로 일치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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