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문제 태화 17년(493), 북위 황제 효문제(탁발굉)는 낙양 천도를 결정했다. "평성은 매우 한랭했다. 6월에도 비와 눈이 내리고, 모래바람이 수시로 불었다. 이에 낙양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위진남북조 시대 사서인 위서의 기록에 따르면 기후로 인해 천도를 결정한 것이나 내막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국력이 커질수록 수도인 평성으로 몰려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이들이 머물 집과 식량 문제가 생긴 것이다. 가축으로 식량을 옮기더라도 중간의 소진분이 너무 커서 이 또한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북쪽의 유연과 수도의 거리가 가까웠고, 북중국 통일 이후엔 국가 유지를 위한 행정의 문제도 생겼다. 이에 북위 효문제는 낙양 천도를 결정하고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이전에 북위 중신들 사이에선 만약 "수도를 이전한다면..
탁발도가 남정에 나섰을 때 태자 탁발황이 감국으로 있었는데 휘하의 도성이 탁발도가 총애하는 태감인 종애와 반목했다. 종애는 탁발도가 돌아오자 도성 일당의 죄를 날조해 보고했고 탁발도는 이에 도성 일당을 죽인다. 탁발황은 이에 병을 얻어 곧 사망하고 종애는 탁발도가 추궁할까 두려운 나머지 늦은 밤, 영안궁에서 자고 있던 탁발도를 죽였다. 황망한 5호16국 시대 영웅의 죽음이다. 다음 날, 황태자에 이어 황제가 죽자 황제의 손자 탁발준이 보위에 올라야 했다. 그러나 나이가 어려 상서좌복야 난연, 시중 화정, 시중 설제는 탁발도의 3남인 북위 진왕 탁발한을 옹립고자 했다. 그러나 종애가 미리 눈치채고 무장한 태감들로 이 세 사람을 죽인 뒤 탁발한 마저도 살해한다. 그리고 조서를 조작해 오왕 탁발여를 보위에 올..
북연이 혼란스러운 위진남북조 시기, 탁발도는 북연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가해 10여 개 큰 군을 먼저 손에 얻는다. 풍홍은 송나라에 칭신했으나 송나라도 별수가 없었다. 북위 연화 2년(433), 풍홍은 용성 아래에 북위군이 진을 치자 몰래 고구려로 도망쳤으며 북위군은 용성을 불태운다. 풍홍은 이후에 송나라로 도망치려 하거나 황제 노릇을 하려 했기에 고구려 장수왕에게 일족과 함께 주살 당한다(437년). 이전에 동생 탁발고를 인질로 잡아 두었다가 살해한 정동과 부고패의 5족도 도살했다. 이후 등장할 유명한 북위의 풍태후는 풍홍의 손녀이기도 하다. 탁발도의 북방 통일을 위해 남은 건 북량 정벌뿐이다. 북량은 옛 전진의 신하 여광이 세운 후량의 후신으로 여광의 부하 저거몽손은 여광을 배신하고 단업을 양왕凉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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