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연, 오두미도 멸망: 위진남북조 영웅 유유 [48화]
- 한중일 역사 / 위진남북조 100화
- 2020. 1. 28.
[위진남북조 시대 동진 군대 북벌군 진격로] 단 한번의 전쟁으로 남연은 유유에게 멸망 당함
동진 유유의 북벌이 시작되었다. 목표는 남연. 남연 황제 모용초는 관문을 지키고 후방을 교란해 보급을 끊자는 의견보단, 대현관으로 들어오게 한 후 정병을 보내 싸우도록 명하는 패착을 저지른다.
유유의 예상과 딱 맞아 떨어진 것이다.
"저들 선비족은 탐람한 까닭에 멀리 내다보는 계략이 없다."
남조 유유가 남연의 수도 인근 대현관에 다다를 때까지 남연의 병사는 한 명도 없었다.
위진남북조 시대 영웅 유유
모용초는 단휘와 하뢰로에게 5만 보병으로 임구성을 지키게 하고 곧, 자신도 병사 4만을 이끌고 임구로 간다. 유유는 병거 4천 대로 장벽을 만들어 남연의 기병을 무력화시키고 3천의 병사가 지키는 임구성을 급습해 함락시킨다. 동진의 단휘는 추격전을 펼쳐 남연의 장수 10여 명을 벤다.
다음 날에도 광고의 외성을 함락시키고 광고의 내성으로 도주한 모용초를 쫓아 계속된 추격전을 벌인다.
마침내 광고의 내성을 세 겹으로 포위하자 모용초는 완전히 고립된다. 모용초는 후진의 요흥에게 원군을 요청하지만 대하의 혁련발발과 치열하게 전투 중이던 후진은 고작 유유의 동진군에 겁을 주는 내용의 서신밖에 쓰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남북조시대 북벌 운동
유유는 당연히 겁을 먹지도 않았다.
"낙양에 10만 명의 철기가 출격을 준비하고 있다. 속히 철군하지 않으면 이들이 곧바로 진격해 올 것이다."
"철기의 출격 준비가 끝났다면 속히 내려오도록 하라!"
실제 요흥은 1만 정병을 보내려 했으나 혁련발발이 후진의 군대에 승기를 잡자 이마저도 이뤄지지 않는다. 당시 유유는 계책을 써서 장안으로 원군을 요청하러 간 남연의 사자 한범을 납치, 회유한다.
남연 신하 한범이 광고 내성을 포위하는 진중으로 끌려오자 유유는 항복을 권할 것을 요구한다.
유유 : "경이 저들에게 화복을 말해 귀향토록 만드시오."
한범 : "비록 장군의 은총을 입었으나 장군을 위해 연나라를 도모하는 일은 할 수가 없습니다!"
유유는 더이상 권하지 않고 한범을 수레에 태워 광고 성 밖을 한 바퀴 돌게 했다.
사기가 바닥난 남연의 군대는 이후에도 근근이 버티니 시간은 흘러 동진 의희 6년(410) 정월에 이른다. 광고 내성 안에서는 주전론과 항복론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공손오루와 하뢰로 등의 지하 갱도 공격도 무위로 돌아가자 유유는 마침내 사면에서 공격을 지시한다. 이에 남연의 상서 열수가 성문을 열며 투항을 권하자 모용초는 도주 중 생포된다.
모용초는 건강에서 목이 베이고 왕공 이하 3천 명도 도륙된다. 유유는 하비에 머물며 몇 년간 힘을 비축하여 후진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급보가 날아들었으니, 오두미도 손은의 매부인 영남의 노순이 건강을 향해 진격한다는 것이었다.
[위진남북조 시대] 모용초 남연 토벌한 동진 유유
오두미도 반란
유유는 건강으로 귀환하면서 조정에 서신을 하나 보낸다. 자신에게 태위 벼슬과 황월을 내리도록 요구하는 서신으로 찬위의 뜻이 있던 유유, 조정 대신들의 반응을 살펴보고 싶었다. 당시 조정에선 이를 수락할 정도로 동진 조정은 더이상 유유를 제어할 힘이 없었다.
이전에, 노순과 함께 무리를 이끌던 서도복은 유유가 남연으로 향하자 이런 말을 했다.
"조정은 줄곧 당신을 심복지환으로 생각하고 있소. 유유가 모용초를 생포해 돌아오면 틀림없이 당신을 제거하려 들 것이오."
오두미도 노순은 이를 좇아 남강, 노릉을 격파하고 예장으로 직행했다. 진남장군 하무기는 함선에 올라 영격에 나섰지만 교전할 때 큰바람이 불어 하무기의 배가 해안으로 밀려나 노순의 병사에 도륙을 당한다. 노순은 상동, 장사를 함락시키고 파릉으로 진격하니, 이때 조정이 유유에게 급보를 보내어 회군할 것을 명한 것이다.
환현 토벌 당시 유유와 함께했던 유의는 공을 세우려는 욕심이 강해 단독으로 2만 수군을 징발해 상락주에서 10여 만의 노순, 서도복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대패했다.
이전에도 유유가 북벌에 나서 남연을 토벌하려 하자 비슷한 공을 세우기 위해 남벌을 추진하여 노순 토벌을 요구했었다.
"애초 환현을 토벌했을 때, 나는 겸양하며 대공을 유유에게 양보했다. 어찌 내가 세운 공이 유유만 못할 리 있겠는가?"
그러나 탐욕을 부렸던 유의는 실패했다.
[위진남북조 시대] 위진남북조 노순이 진격한 남강과 노릉2
[위진남북조 시대] 노순이 진격한 남강과 노릉1 오호십육국
이러자 건강의 조정 대신들은 피난을 생각했으나 이미 입성한 유유는 이를 결사반대한다. 이때 노순과 서도복의 군대는 승세를 탔고 유유의 군사는 지쳤기에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내는 것이 유리했다. 계책이 없는 노순은 서도복의 공격 제안을 무시한다.
"이제 일이 성사되기 어렵게 됐구나!"
서도복이 한탄하는 사이 유유는 병사들을 내보내 석두성 주변에 방책과 보루를 쌓았다. 노순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뒤늦게 공격에 나섰지만, 소득이 없었다. 게다가 광풍과 폭우가 몰아쳐 노순이 타고 온 배가 난파했으며 생전 처음 보는 선비족 기병의 모습에 병사들 사기가 떨어졌다. 이에 서도복은 형주를 취하고 훗날을 도모하기로 한다. 이때부터 동진 유유의 섬멸전이 이어진다.
동진 의희 6년(410) 말, 좌뢰에서 노순과 서도복의 군사를 대파하자 이 둘은 근거지인 시흥과 번우로 도주한다.
의희 7년(411) 2월, 시흥을 공략하여 서도복의 목을 벤다.
의희 7년(411) 4월, 노순이 동진 군사를 포위했으나 장수 손처 등이 역포위하여 노순을 패퇴시킨다. 노순은 교주(베트남 북부) 부근까지 도주했지만 협격을 당하자 독주를 처자식에게 먹이고 자신은 물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근 11년간 이어진 오두미도의 난은 이렇게 종지부를 찍었으나 동진의 국력도 크게 쇠퇴한다.
또한, 대족인 왕씨와 사씨 일족의 자제들이 대거 피살되었는데, 이들이 오두미도에 몸을 맡겼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반면, 유유처럼 군공을 세워 귀족의 반열에 오르는 경우가 많아지니, 이후 송, 제, 양, 진의 4개 국가에서 공통으로 찾아볼 수 있는 특색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