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위 탁발규와 참합피 전투: 후연 모용수 몰락 [53화]

출처 : 5胡16國 : 선비(鮮卑) - 모용부출처 : 5胡16國 : 선비(鮮卑) - 모용부


북위 vs 후연

탁발선비 탁발규는 처음에 후연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동생 탁발고를 보내 공물을 바치기도 했으나 후연 내부에서 화친을 반대하고 선비족 탁발고를 인질로 잡자 후연을 선제공격하고 이를 판도에 넣었다. 이에 위진남북조 시대 강자였던 후연은 태자 모용보, 모용농, 모용린 등으로 반격을 개시했으나 패배한다.


그렇지만 영특했던 모용수도 말년엔 어리석은 모습을 보였으니 북위에겐 기회였다. 태자 모용보에게 명해 북위를 공벌케 했다. 성공하면 자연스레 보위를 이을 수 있었다는 계산을 했지만, 착오였다.

동진 효무제 태원 20년(395) 8월, 탁발규는 변경의 병사를 뒤로 물러나게 한 뒤 기습할 생각이었다. 대장 장연의 계책이었다.


"연나라 군사는 최근 적교를 활대에서 격파하고, 장자에서 모용영(서연)을 멸망시켰습니다. 이제는 우리나라를 쳐들어왔으니 이는 우리를 가볍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짐짓 두려워하여 퇴각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저들을 오만에 빠지게 한 뒤 기회를 틈타 공격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황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당시 후연의 모용보는 잇따른 승리에 도취했었다. 탁발규의 명으로 북위의 변경 천여 리가 텅 비었으니 너무나도 쉽게 공을 세운 것이다.



탁발규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오원에 이르렀다. 이전에 붙잡아 두었던 후연의 사자들을 시켜 강변 맞은편의 모용보를 향해 큰소리로 외치게 했다.


"너의 부친이 이미 죽었다. 빨리 돌아가 보위를 잇도록 하라!"


모용수는 이미 중병을 앓고 있었으며, 모용보 형제는 서로 반목했다. 곧 대영 내부에서 혼란이 일어나 모용씨 간의 살육이 벌어지고 10월엔 후연군이 배를 불태우고 도주한다.


참합피 전투, 후연의 비극

12월, 황하가 얼자 도무제 탁발규가 친히 2만의 병사로 추격에 나섰다. 당시 후연 군사는 참합피에 머물고 있었는데 북위의 군대가 추격해올 것이라곤 예상치 못했다. 후방의 순라군도 마찬가지였다. 참합피 인근에 이르자 탁발규는 병사와 말에 재갈을 물리고 이른 아침에 공격을 감행한다.


이른 아침, 후연의 군사들이 잠에서 깨어나 보게 된 건 산 위의 북위 대군이었다. 북위군은 산 아래로 내려오며 후연의 군사를 도륙하니 이 전투에서만 후연의 군사 1만여 가 죽는다.


약양공 탁발준도 공격해 4~5만의 후연군을 포로로 삼자 도주한 자는 겨우 수천에 지나지 않았다. 탁발규는 이후 후연의 포로 송환 요청을 거부하고 중부 대인 왕건의 건의에 따라 5만에 이르는 포로를 산 채로 매장한다.


출처 : 오호망양(五胡望洋) 17 - 참합피의 비극출처 : 오호망양(五胡望洋) 17 - 참합피의 비극

이후 후연의 모용덕(남연의 창시자, 모용수 동생)은 모용수에게 권했다.


"위나라가 태자를 깨뜨렸으니 폐하가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가 이들을 쳐야 합니다."


위진남북조 시대 동진 효무제 태원 21년(396) 4월, 모용수가 친정에 나선다. 북위의 탁발선비 탁발건은 자만한 나머지 영격에 나섰다 병사들과 함께 몰살당한다.


탁발규는 수도를 옮기는 것까지 생각했으나 모용수는 우연히 참합피를 지나다 산처럼 쌓인 후연군의 해골을 보며 피를 토하며 병상에 드러눕는다.


10일 후, 모용수는 병사하지만 탁발규는 계략으로 생각해 이를 믿지 않았다. 나중에 사실로 확인되자 6월에 칭제하고, 7월엔 친히 40만 대군으로 후연 토벌에 나선다. 모용보의 군사와 맞서 12~13만의 군사가 죽는 대패를 안긴다.


얼마 뒤 내전을 거듭하던 후연은 북연, 남연으로 나뉘고 탁발규는 북방의 고거 30여 부락을 함락시킨다. 명실공히 북방의 1인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병성을 점거하고 대성臺省을 수립하고 백관을 설치하고 공, 후를 봉하여 장군, 자사, 태수, 상서랑 이하를 모두 문인으로 등용했다."


북위 초기 하북 형세도북위 초기 하북 형세도


내정에 집중한 북위 탁발규

위진남북조 시대, 황시 원년(396)에서 황시 2년까지 탁발선비 탁발규는 후연을 사실상 멸망시킨 이후 내정에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한족 사대부를 많이 등용했는데, 하북 청하의 최씨 일가가 대표적이다.


이후 황제들도 한인들을 신임했다.


 도무

 최굉, 장연, 봉의

 태종 명원제

 유결, 노로원

 세조 태무제

 최호, 모수지

이때 최씨들은 당나라 말기에 이를 때까지 화북의 명문 가문으로 이름을 떨친다. 탁발규는 수도인 평성을 충실하게 하려고 산동 6주의 백성과 요서, 고구려의 잡이雜夷 36만, 기술자 10만 남짓을 사민 하였고 농업에 종사하는 자에게는 토지를 지급하였다.


※ 고구려 포로에 대해선 과장된 수치란 해석이 많습니다.



2년 뒤인 천흥 원년(398), 황권 강화를 위해 선비족의 여러 부락을 해산시킨다. 각 부락을 통솔하는 대인大人은 부락에서 분리되어 통솔권을 빼앗기고 여러 부락은 일정한 지구에 정주하여 유목 민족적인 이동을 금지당했다. 그리고 부락민은 국가의 직접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조치로 종실 간의 다툼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천흥 2년(399), 북방의 고거 30여 부락을 격파하고 7만의 포로를 잡았으며 말 10여만 필을 비롯해 소와 양 140여만 마리를 노획했다. 위왕 탁발의는 3만여 기병으로 사막 1천여 리를 질주하며 고거의 7개 부락을 격파한다.


북위 도무제 탁발규북위 도무제 탁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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