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도무제 탁발규 시해되다: 탁발도 즉위 [54화]

북위 도무제 탁발규북위 도무제 탁발규


개혁 군주 탁발규 말년

천사 원년(404), 모든 부락의 자제에게 대대적으로 작위를 내렸는데 왕이 10명, 공이 22명, 후는 79명, 자는 103명에 달했으니 이는 선비족(탁발선비)의 나라 북위 말기에 중앙 정부의 재정적 부담으로 작용하게 된다. 마치 명나라 말기처럼 국가 재정으로 놀고먹는 자들을 챙기기엔 부담이 컸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진남북조 시대 영웅인 탁발규는 말년에 한식산을 복용해 건강이 나빠졌고 정신병까지 생겼다. 밤새도록 홀로 중얼거리고 군신들과 회의를 할 때는 기분이 쉽게 변하여 신하들이 이전에 행한 악행이나 원한 관계를 끄집어내 살해했다.

이외에도 신하들을 기분에 따라 죽인 뒤 시체를 천안전 앞에 내버려 두니 인심이 술렁였다.


탁발규는 이전에 작은 이모(하란비)에게 반해 첩으로 들이려 유부녀였던 그녀의 남편을 죽였다. 이후 첩으로 삼은 뒤 아들 탁발소를 얻었으나 사람 옷을 벗기거나 개와 돼지를 거꾸로 매달아 죽이는 게 삶의 낙인 개망나니였다.


북위 천사 6년(409), 정신병이 도진 탁발규가 하란비를 궁 안에 가둔 뒤 죽이려 하자, 탁발소는 환관 및 궁인들을 동원해 탁발규를 몰래 살해한다. 어려운 시기에 부족민을 추슬러 후연과의 어려운 전쟁도 치른 영웅의 말로는 비참했다.



자귀모사 - 목숨을 잃는 황태자 어머니

자귀모사子貴母死. 한무제의 고사를 좇은 선비족 북위의 전통이었다. 탁발규는 탁발사를 태자로 삼으며 그의 생모인 유귀인을 사사했다.


"과거 한무제도 태자를 세울 때 먼저 구익부인을 죽였다. 이는 어미가 강하고 자식이 약한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모후가 정치에 간섭해 정사를 어지럽게 하면 한고조 유방 사후의 여후 때와 같은 일이 빚어지게 된다. 이는 나라의 장구한 보전을 위한 불가피한 계책이다."


효성이 지긋했던 탁발사는 탁발규의 이런 얘기에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한식산을 복용하며 정신병이 있었던 탁발규는 화를 참지 못하고 탁발사를 때리다가 출궁시켰다.


한편, 탁발규는 젊은 시절에 이모였던 하란씨의 외모가 빼어난 것을 보고는 그 남편을 죽여버리고, 자신이 하란씨와 혼인한 일이 있었는데,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탁발소는 성격이 난폭해서 아버지인 탁발규와 사이가 나빴다.



409년, 제정신이 아니었던 탁발규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하란비에게 욕을 퍼붓고는 궁에 가두어 죽여버리려 하였다. 하란비는 아들 탁발소에게 도움을 청했고, 마침 아버지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탁발소는 궁인들과 모의하여 궁궐 담장을 넘어 아버지 탁발규를 살해하고 말았다.


탁발소가 아버지 탁발규를 살해하자 다음 날 아침, 궁 안으로 몰래 들어갔다.


"나에겐 숙부도 있고, 형도 있소. 공경들은 누구를 옹립고자 하오?"


"우리는 전하(탁발소)를 옹립고자 합니다!"


탁발소가 잠시나마 공경들을 속여 탁발규 살해 사실을 감췄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탁발소는 탁발사를 죽이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되려 위사들에게 붙잡혀 탁발사 앞으로 끌려갔다. 이내 탁발소는 어머니 하란비와 목이 잘렸다.

명원제 탁발사 즉위

탁발사는 공경들의 지지를 받으며 보위에 오르니 서기 409년 10월의 일이다. 유생들을 예로 대우하고 경사서를 수집하는 등 학문에 애정을 보였으나 아버지처럼 한식산을 복용해 육체, 정신적으로 건강을 크게 해쳤다.


태상 3년(418), 유유가 후진의 요홍을 치자 후진에선 원군을 청했다. 최호는 반대했으나 명원제 탁발사는 무리하게 후진에 지원군을 보냈다가 유유의 동진군에 패배하며 1만여 기병을 잃는다.


"유유는 필히 요홍을 이길 것입니다. 폐하에게 비록 정병이 있기는 하나 이들을 부릴 양장良將이 없습니다. 안정을 취하며 국세를 살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유유는 진나라를 멸한 후 틀림없이 남쪽으로 돌아가 찬위할 것입니다. 때가 되면 관중은 우리 손에 들어올 것입니다."



태상 7년(422), 최호의 건의를 받아들여 탁발도를 태자로 세운다. 그러나 최호의 반대에도 유유가 사망한 송나라에 공세를 가한다. 친정에 나서서 활대와 호뢰 등 요충지를 몇 개 차지했으나 피해 또한 적지 않아 잃은 게 더 많았다.


"요흥이 죽었을 때는 내분이 일어난 까닭에 유유가 그 기회를 노린 것입니다. 지금 유유가 비록 죽었으나 송나라 국내의 군심과 민심이 변하지 않았으니 필사적으로 싸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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