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약의난 종결, 동진 군벌 해체, 위진남북조 성한 [32화] 10월 중엔 왕도가 변심한 소준의 심복 노영의 안내로 유량이 주둔하고 있는 백석으로 달아나는 등 전황은 소준에게 불리해지는 듯 보였다. 그렇지만 실전 경험이 풍부한 소준의 병사들은 동진의 군대에 계속 승리를 거뒀다. 당시 온교는 군량이 떨어져 도간에게 빌리기도 하는 등 전황은 되려 포위한 쪽이 수비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소준은 계속된 승리에 고무되어 건강 주변의 포위군 영채를 공격했다. 온교와 도간 등은 보병전에 익숙지 않으니 석두성을 치는 것이 좋겠다 판단하여 보병 1만여 명을 이끌고 높은 곳으로 올라 진을 펼쳤으나 소준의 아들 소석과 용장 광효의 수십 기에 대패했다. 수십 기가 1만여 명의 보병을 낮은 곳에서 위로 향하며 격파한 것이다. 큰..
가황후를 축출한 승자 사마륜, 태자 사마휼의 억울한 죽음 [6화] 원강 9년(299), 가황후는 미남자로 유명했단 반악에게 태자의 필체를 흉내 내 모반의 글을 쓰도록 한다. "폐하는 응당 스스로 명을 끊어야 한다. 그러지 않을 경우 태자인 내가 대신할 수밖에 없다. 생모인 사숙비와 함께 날짜 안에 동시에 행하기로 약조했으니 의심하며 머뭇거리지 마라." 다음 날 아침, 가남풍 황제가 병이 났다는 이유로 태자에게 입조를 명했다. 가황후는 시비 진무를 시켜 술 3되와 대추가 가득한 쟁반을 들고 가 태자에게 마시게 했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던 사마휼은 공복에 술을 마셨다가 실수할까 두렵다며 사양했다. 가황후는 당연히 질책한다. "너는 어찌 이처럼 불효한가? 부모가 술을 내려도 마시지 않으니 술에 무엇이라도 들..
사마의 막내 아들 사마륜과 가밀 사마휼의 대결, 강통의 사융론 궁중 암투로 혼란스러운 이 시기에 강통은 사융론을 올리며 5호(흉노, 선비, 저족, 갈족, 강족)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괴이한 기풍으로 극도로 탐욕스럽기 그지없고, 흉포하고 사나운 데다 인정도 없는 자들입니다. 저들은 힘이 약하면 우리를 두려워하며 복종하나 강하면 곧바로 침략하며 반기를 듭니다... ... 지금 화하의 사서士庶가 저들을 업신여기자 그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있습니다. 반드시 틈을 보아 흉포한 성정을 드러낼 터이니 지금 저들이 피폐하고 우리의 무력이 성한 때를 이용해 저들을 원래 살던 곳으로 쫓아내느니만 못합니다." 사마의가 살아있었더라면 강통의 사융론을 받아들였을까? (특이하게 동진 16국 시대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훗날..
위진남북조 4화. 팔왕의난 1차전, 사마량 사마위 폐출과 승자 가남풍 사마량은 태보 위관과 친했는데 사마위의 호전적인 성격을 꺼려 병권을 빼앗은 뒤 봉지로 돌아가도록 조치했다. 팔왕의난을 불러온 작은 사건이었다. 2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사마위는 크게 분노했고 공손굉, 기성, 이조를 황후 가남풍에게 보내 사마량과 위관의 모반을 고한다. 이전에 가남풍은 위관이 사마염 앞에서 사마충이 보위를 잇기 어렵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기에 앙심을 품고 곧 남편에게 조서를 만들게 한다. 위관은 예전에 연회 자리에서 술에 취한 것을 기회로 하여 무제의 옥좌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아뢰었다. "신은 아뢰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공이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오?" 위관은 하려던 말을 그만두기 세 차례에 이르렀다. 그리고 ..
위진남북조02. 팔왕의난을 유발한 서진 황제 사마충 [사마유 억울함] 귀가 얇았던 진무제 사마염의 실수는 크게 아래와 같다. 이 실수로 위진남북조 시대(팔왕의난)가 시작되었다. 1. 사마염은, 부부의 금실이 좋아 양황후의 말만 듣고 사마충을 후계자로 선택했으며, 가남풍을 내치지 않았다.2. 사마염은, 귀가 얇아 가남풍을 맞아들이고 사마충의 어리석은 행동들을 애써 무시했다.3. 사마염은, 사마휼에게 큰 기대를 했는데, 그 이유로 가남풍이 사마휼을 타락하게 만든 뒤 죽였다.4. 사마염은, 훗날의 정쟁을 예견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사마충이 황제가 되면 사마염 생전처럼 가씨와 양씨는 손을 잡을 이유가 없었다. 또 한가지 추가하자면 동생 사마유를 억울하게 죽게 만든 일이다. 총명하며 가뭄이 들면 스스로 반찬..
위진남북조01. 진무제 사마염 사치향락, 백치 사마충 (서진 쇠퇴) 중국의 역대 통일 왕조 중 최악으로 평가받는 위진남북조 진나라晉의 창업자 진무제 사마염은 자신의 나라를 망치는 데 일조한다. 천하 통일 이후에 권문세가의 사치 풍조를 막기는커녕, 자신도 그 속으로 몸을 담갔다. 후궁의 수가 만 명을 넘어섰으니 서진은 통일과 함께 멸망의 징조가 드러난 셈이다. (진나라, 서진과 오나라, 삼국시대 말기) 위진남북조 시대, 서진의 은사隱士 노포魯褒의 전신론錢神論에서, "돈이야말로 신이다" 유송 시절의 유의경이 지은 세설신어에는 태치汰侈 편이 존재한다. 때찌,, 때찌 때찌 해줄 만한 낭비와 사치에 대한 내용인데 주인공은 무제의 외숙 왕개, 창업 공신 석포의 아들 석숭, 오나라 토벌에 공을 세운 왕혼의 아들로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