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주 외척 양견, 수나라 세우다 양견(수문제)이 정권을 장학한 581년 2월 13일, 양견은 외손자 정제(우문연)로부터 선양을 받아 수 왕조를 세운다. 정제(우문천)는 개공介으로 봉해졌지만 5월에 살해된다. 양견은 우문태의 자손 27명, 효민제의 아들 1명, 명제의 자손 7명, 효무의 자손 12명, 정제의 형제 2명, 기타 종족 12명을 살해하여 위진남북조 여느 왕조처럼 우문씨의 씨를 말렸다. (훗날, 양견의 다섯 아들도 일찌감치 사망한다. 뿌린 데로 거두는 법) 양견은 수나라 왕조를 개창한 뒤 유가 사상을 기반으로 조세와 법률을 정비한다. 구품관인법을 폐지하고 과거를 시작했는데 이미 귀족제 사회가 무너졌기에 중정관이 관리 후보자를 추천할 필요성이 없었다. 이후 수문제 개황 7년(587), 강릉의 괴뢰 ..
수나라 양견의 탄생 설화 서위 대통大統 7년(541) 6월, 풍상馮翔(섬서성 대려현)의 반야사般若寺에서 양견(수나라 문제, 수문제)이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절 주위에는 자색 기운이 감돌고 상서로운 구름이 뒤덮었다는 류의 진룡천자 전설이 전해진다. - 머리에 뿔이 자람 - 몸에 비늘이 있음 - 콧대가 정수리까지 통함 - 눈에서 빛이 남 - 손에는 문文자 손금 - 상체가 길고 하체가 짧음 - 표정엔 위엄, 말과 웃음에 구애받지 않음 아마도 생모 여씨呂氏의 출신이 비천했기에 이런 가공하고 포장한 전설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양견은 15세에 아버지의 후광을 받아 차기대장군에 임명되고 현공에 봉해졌다. 위진남북조 시대 북주 무제 이후로 두각을 나타냈던 양견은 마침내 장녀를 무제의 황태자비로 삼았다. 황태자는..
위진남북조 시대 말기. 북주가 북제를 멸망하기 직전, 이 당시 북방에선 유연이 멸망하고 돌궐이 부상했다. 위진남북조 시대 유연과 돌궐 서위 폐제 원년(552), 회황진 일대에서 유연이 돌궐의 공격을 받아 아나괴 가한이 자결하고 그 아들 암라진이 남은 백성들을 이끌고 북제로 도망간다. 또, 남은 백성들은 아나괴의 숙부인 등숙자(유연의 마지막 가한)를 왕으로 세운다. 비슷한 시기에 1대 돌궐 가한인 토문이 죽고 아들 과라가 뒤를 잇는다. 또, 그 뒤는 아들 사근이 잇는데 그가 목간가한이다. 사근은 바로 등숙자를 격파했고, 등숙자가 남은 백성들을 데리고 서위로 도망가자 유연은 마침내 멸망하게 된다. 돌궐의 존재는 북주와 북제에게 중요했다. 이전에 북주는 유연에 공주를 시집보내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었고, 이 ..
위진남북조 시대 말기, 제나라(북제) 멸망 이후 풍소련은 이후에 고위가 모반을 일으키다 발각되어 주살되니 우문달에게 하사됐으며 양견이 북주의 보위를 찬탈하자 우문달의 정비인 이씨의 오빠 이순에게 하사됐다가 이순의 모친에 의해 자진한다. 주나라 (북주) 위진남북조 시대 북방 통일을 이룬 북주의 무제 우문옹의 뒤를 이은 건 아들 선제 우문윤이다. 선제에겐 북주와 북제의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그러나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온 선제는 황제가 되자마자 주색에 빠지고 공신들을 제거하며 국력을 소진했다. 재위한 이듬해인 579년, 7살에 불과한 태자 우문천(우문연衍에서 우문천闡으로 개명)에게 보위를 물려주니 그가 정제이다. 선제는 스스로 천원 황제를 칭하며 전횡을 일삼..
북주 군대가 홍동과 영안을 함락시킬 때, 고위는 진주를 버리고 사냥을 떠나던 중이었다. 당시, 북제의 군사가 우문흔, 하란표자 등의 북주군을 패퇴시키며 평양성 성벽을 무너뜨려 승세를 이어가고자 했으나, 고위는 풍숙비와 승전의 기쁨을 나눈다며 진격을 중지토록 한다. 풍숙비가 진주 서쪽에 성인聖人의 흔적이 있다며 조심할 것을 권했기 때문이다. 북주의 군사들은 그 시간 동안 성벽을 수리했고 평양을 끝까지 지킬 수 있었다. "한 줌 정도의 도적은 말 위에서 베고 붙잡아서 분수 속에다 내던져 버릴 뿐입니다!" "저들도 역시 천자이고 우리 또한 천자입니다. 저들은 오히려 멀리에서 왔는데 우리가 어찌 해자를 지키고 약한 것을 내보입니까!" 멀쩡한 군대를 놔두고 후퇴하는 북제 장군들의 진격 건의에도 불구하고 무능한 우..
위진남북조 시대, 오랜 전란으로 전통 귀족들이 주살 또는 도륙을 당해 세가 약해졌으나, 부를 많이 축적한 이들의 권세는 오히려 강해졌다. 고위는 화사개 같은 은행들을 통해 자신도 많은 부를 축적했다. 또한, 고위는 목황후의 시비였던 풍소련을 총애해 항상 그녀와 함께 다니며 사치를 일삼았다. 후세의 사가들이 북제는 풍숙비 때문에 망했다는 말을 하는 이유다. 무평 2년(571), 고위의 어머니 호태후의 음란행위가 드러났다. 승려들을 총괄하던 사문통 담헌과 통정했던 것이었다. 고위는 처음 어머니의 이런 일탈 행위를 믿지 않았으며, 호태후 근처의 여장 비구니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이 발각되자 호태후 근처의 모든 사람을 죽이고 그녀를 고립시켰다. 두 명의 황후 무평 4년(573), 위진남북조 ..
북주가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 북제도 남조 양나라처럼 은행恩幸 세력이 대두했다. 대표적 인물로는 화사개가 있는데, 그는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무성제에게 향락을 권유하였다. 여느 위진남북조 시대 황제처럼 ... "예로부터 여러 왕도 결국은 죽어 타고 남은 재가 되는 것입니다. 요순걸주도 다를 것이 없었으니 폐하께서도 젊을 때 마음대로 즐기고 국사는 대신들에게 나누어 맡겨 스스로 고생을 피하십시오." 고담은 화사개를 좌복야, 조언심에겐 인사, 원문요에겐 재정, 당옹에겐 군사 문제를 위임하며 3~4일에 한 번 조정을 살필 뿐이었다. 남조 양나라처럼 전통적인 귀족 사회가 무너지고 한문 출신들이 크게 기용되었다. 군공을 많이 세운 자들이 황제가 되거나 새로운 명문 귀족으로 떠오르는 공통점이 북조에서도 나타..
고환의 동위는 선비족과 한족 간의 갈등이 컸다. 선비족 고관들이 한족을 경멸했기 때문이다. 고환의 총애를 받던 고오조는 휘하의 선비족 장병들 속에 한인들이 섞여 있으면 고환에게 요청해 이들을 다른 부대로 이전시키는 등 당시 선비족 대장들의 상황을 대변하는 일화를 몇 가지 남겼다. 한번은 황하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여러 명이 물에 빠져 죽자, "한 푼의 가치도 없는 한인들은 죽게 놓아두어라!" 라는 말을 했다. 고환도 이를 타개하려 시도는 했지만, 동위가 멸망하는 순간까지도 이는 해결되지 않았다. "한인은 너희 노복이다. 남자는 너희를 위해 경작하고, 여자는 너희를 위해 옷을 만든다. 곡식과 비단을 세금으로 내 너희를 따뜻하게 먹이고 있다. 왜 그들을 업신여기는 것인가?" "선비족은 너희가 고용한 용병이다...
이하 글은 아래의 3개 자료에서 발췌. 1.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가와카쓰 요시오, 임대회 옮김2. 위진남북조사, 이공범3. 동북아역사재단총서, 중국 정사 외국전 우문宇文흉노를 조상으로 하며 특히 (우문태는) 남선우의 후예이다. 본래 음산陰山 지역에 거주하였다가 1세기경 요동 일대로 이주하면서 점차 선비화 되었고, 마침내 우문선비라 불리게 되었다. 이후 서위를 건설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고 북주의 지배집단을 형성하였다. 위진남북조 3세기 후반에 이주한 이들은 유목을 주업으로 하고 수렵, 농경, 약탈을 부업으로 삼아 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종족과 혼합하여 거주하게 되었는데, 구심력이 있는 정치체제를 갖춘 우문 집단은 이미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토착 종종인 선비족을 지배하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정..
위진남북조 중기 - 양원제 승성 2년(553) 10월, 왕승변은 건강, 진패선은 경구에 주둔케 했다. 승성 3년(554) 4월, 서위의 사자를 북제의 사자보다 홀대했다는 이유로 우문태가 11월에 출병을 명한다. 우근, 우문호, 양충 등이 한수를 넘어 강릉에서 40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황화에 이르렀다. 왕승변을 대도독으로 삼고 진패선에겐 양주로 군영을 옮기게 했다. 소역은 밤에 봉황각에 올라가 천문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객성(혜성처럼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별)이 형초의 영역으로 들어왔으니 우리가 필히 패하겠구나!" 강을 건너는 서위 군을 왕포, 호승우, 주매신, 사답인 등이 영격했지만 모두 패했다. 목책을 두고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 양나라 장수 호승우가 유시에 맞아 전사한다. 서위군은 여세를 몰아 목책..
서진 말기 화북 농경 지대, 위진남북조 시대 강남 호족 [10화] 발췌 : 중국의 역사 - 위진남북조 - 가와카쓰 요시오, 혜안출판사 중국 본토는 대게 회수淮水를 기준으로 하여 그 이북과 이남으로 크게 나뉜다. 회수 이북은 개활지라 명명되며 건조도가 높아 삼림이 충분히 생육하지 못하고, 어느 정도 삼림이 자란다 하더라도 일단 한 번 채벌되면 재생되기 어렵다. 따라서, 회수 이북에는 삼림지대가 형성되기 힘들었고, 이에 『울창한 삼림』에 방해를 받지 않은 화북의 대평원은 전망이 좋고, 공간이 열려 있어 집단의 이동이 쉬웠다. 또한 치수가 어렵기로 유명한 황하의 물을 거의 이용할 수 없는 상태여서, 소규모 관개와 자연의 천수를 주로 이용하는 소위 소관개 천수 농경 지대였다. 뜻밖에 농사에 가혹한 환경에 처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