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남북조를 가로지르는 비수대전 승리 이후, 동진은 이 기회를 틈타 양양, 익주, 양주 등지를 수복한다. 하지만, 중원 수복 의지는 약해 회수와 관중 일대의 요충지는 얼마 안 가 다시 잃는다. 전진 멸망의 원인은 비수대전 패배이다. 국력이 크게 손상된 것은 아님에도 부견의 무리한 융화 정책이 불러온 부작용으로 볼 수 있다. 강제적으로 살던 곳을 떠나 중원의 낯선 곳으로 이주한 이민족들의 고충을 부견은 이해했을까?황실과 가까운 저족들은 국가의 중심부가 아닌 변방으로 나간 것에 만족했을까? 부견은 꿈만 좇았지 현실적인 감각이 매우 떨어지던 인물로 보인다. "왕맹 같은 시어머니"가 곁에 없는 "뜬구름 잡기 대마왕 부견"의 패망은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큰일을 치룬 위진남북조 시대 동진 효무제 사마요는..
동진의 군사는 기세를 놓칠라, 빠른 속도로 전진의 군대를 추격했다. 동진은 곧 수양을 회복하고 전진의 회남태수도 포로로 잡는다. 그러나 전진의 전선이 꽤 길었기에 동진의 추격전도 그다지 오래가진 못했다. 후방의 전진 군대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기에 비수대전은 그걸로 끝이 난다. 부견은 모용수의 부대만이 진을 유지하며 퇴각했기에 그곳으로 몸을 의지했다. 배고픔과 화살에 맞은 통증 때문에 힘들었던 부견은 회수 부근에서 한 백성에게 밥과 돼지 넓적다리를 받자 비단 열 필과 솜 열 근을 하사하기도 했다. "폐하께서는 안락함에 싫증을 느끼셔서 스스로 위험과 곤경에 처하게 되셨습니다. 신은 폐하의 자식이고 폐하는 신의 아버지이시니 어찌 자식이 그 아버지를 봉양하고서 보답을 바랍니까!" 전진군의 전선이 길었고 선봉군이..
중국 전진 불안 요소부씨 일족의 저족은 봉건제의 여파로 전진의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었으나 중원엔 선비, 흉노, 강, 저 등이 섞여 살고 있었다. 겉으론 부강한 국가였으나 내부적으론 결코 안정적이라 볼 수 없는 불안 요소가 너무나도 뚜렷했다. "내가 대업을 이은 지 30년. 사방은 대략 평정되었으나 오직 동남 한구석만은 아직 왕화를 입히지 못하고 있었다." 이전에 부견은모용수 - 관군장군, 경조윤전연 마지막 황제 모용위 - 신흥후모용위 동생 모용충 - 평양태수구지 양통 - 평원장군, 남진주자사전량 장천석 - 귀의후강족 요장 - 양무장군에 임명했었다. 비수대전 이후 중국 전진이 빠르게 해체된 이유다. 결국 부견은 왕맹의 간언과는 정반대의 행위를 벌인 것이다. 매우 위험하고 누구나가 우려할만한 조치였다. 중..
북조 통일왕조 전진, 세상을 떠나는 왕맹 전진 건원 6년 11월의 일이었으니 병사를 일으킨 지 고작 1년도 되지 않아 전연은 전진에 멸망했다. 전연을 멸망시킨 부견은 양주의 전량국 장천석에서 투항을 권했고 장천석은 번국을 칭한다. 이후 부견은 요장을 보내 양주를 함락시키고 장천석은 장안으로 끌려와 시중, 비부상서, 귀의후에 봉해진다. 이후 그는 비수대전에서 패배할 당시 동진에 투항하여 효무제에게 중용되었다. 그러나 부견에게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으니, 건원 11년(375), 왕맹이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직전 유소를 올렸다. "폐하는 공업이 쉽게 이뤄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응당 전전긍긍하며 여림심연如臨深淵(두려워하고 조심하고 삼가며, 깊은 못 가에 서 있는 듯, 얇은 얼음을 밟듯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