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조 시대 당시 6진 수용군 이주영은 영리했다. 반란군에 대해, 때로는 동조하거나 때로는 이들을 제압하면서 점차 자신의 힘을 키워나갔다. 하루는 사주를 지나던 중 자사 울경빈이 성문을 열고 영접하지 않자 성을 함몰시킨 뒤 스스로 자사를 배치했다. 북위 조정은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았는데,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영태후 제압한 이주영시간이 지날수록 북위 곳곳에서 반란이 심화하였다. 흉포한 영태후가 북위를 망치고 있던 것이었다. 수용군의 이주영은 틈을 타 세를 확장하기 위해 반군 진압에 나서겠다 여러 차례 요청했으나 매번 거절당했다. 이주영의 세력이 부담스러웠던 영태후는 군 내부의 분열을 일으키기 위해 이주영 휘하의 군신에게 녹봉을 내리려 했으나 이주영은 이를 간파하고 큰 원한을 품게 되었다...
후조 멸망 직전, 모용선비, 동진 환온 북벌, 석민 반란 [23화] 태녕 원년(349) 5월, 석호의 아들이자 정실 소생으론 둘째인 석준이 황위에 올랐다. 석준은 곧 석씨 일가를 요직에 배치하며 제후왕들을 위로한다. 유황후와 장시에게 살해당한 석빈의 아들 석연을 황태자로 삼고 석감을 시중, 석충을 태보, 석포를 대사마, 석곤을 대장군, 석민은 도독중외제군사로 임명했으며 자신이 보위에 오르도록 공을 세운 이농도 원래의 관직으로 복직시켰다. 당시 석준의 쿠데타에 반대하는 종실 제후왕들 또한 많았다. 계성의 패왕 석충은 5만의 정병으로 업성으로 진군했는데 업성에 다다르자 군세는 10만에 육박했다. 석준은 석충에게 친서를 보내며 형제의 우애를 역설하며 중병을 거느리는 것을 승인한다 했다. 석충은 형제의 의를 생..
후조 황제가 된 폭군 석호, 갈족 석씨 일가의 분열 [20화] 석륵이 마침내 유언을 남겼다. "...(중략) 중산왕 석호는 재삼 옛날 주나라 건국 공신 주공이 성왕을 보좌한 공을 생각도록 하고 이를 구실로 삼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석호는 석륵의 아들, 또는 조카로 기록되어 있는데 295년생 토끼띠의 석호는 274년생 말띠인 석륵과 21세 차이가 나기에 아들, 조카 모두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석륵이 태자를 314년생 개띠 석홍으로 삼은 것으로 보아 아들은 조카의 오기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서진 말기, 오랑캐들이 노비처럼 매매가 되었는데 이들에 대한 처우는 형편없었다. 석호도 어려서부터 호족 노비로 하북과 회하 일대를 전전했다. 어렸을 때 『개와 돼지』의 음식을 ..
황위를 노리는 석호, 세상을 떠난 석륵 장빈 [19화] 이후 대인배 석륵은 금군 소대장인 한족 풍저가 실수로 갈족을 갈호羯胡라 부른 것에 대해 익숙지 않으니 그럴 수도 있다며 넘어갔고, 참군 번원이 몇 년 전 갈족에게 도둑맞아 빈털터리가 됐다고 말하자 오히려 의복과 돈을 하사했다. 석륵이 노예 시절에 상당 지역에서 연못물을 놓고 『자주 다투었던 이양』이란 사람에겐 과거의 감정을 잊고 참군도위에 임명하는 등 동진의 조적과도 화친을 요청하며 국가 내부의 안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북조의 5호 16국 황제 중 드문 성군이었다. 이런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문맹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뛰어난 통찰력으로 문맹의 벽을 넘어섰다는 것을 증명할 일화도 있다. 한번은 한서 강독 시간에 유방의 참모 역..
갈족 석륵 조나라(후조) 건국, 남북조 시대 성군 등장 [18화] 이즈음, 진나라 유곤은 석륵의 모친과 조카 석호를 얻는다(저족이 하도 이곳저곳으로 분산되어 살다 보니 이 둘이 어찌어찌 그리하여 유곤의 손아귀에 붙잡힌 것으로 예측됨). 그리곤 이 둘을 송환하면서 장문의 서신을 보내 항복을 권했다. "장군은 예주와 연주를 석권한 뒤, 강회 일대를 횡행하고 한면(한수와 면수)을 위협하니 .... 유총을 배반하는 것은 화를 제거하는 것이고 진나라를 좇는 것은 복을 불러들이는 것이오." 당연히 석륵은 무시하고 갈피에서 큰 배를 건조해 장차 『건업을 도모』할 뜻을 비쳤다. 예전 조조가 그러했듯 석륵에게도 불운이 찾아온다. 회수 일대에서 석 달간 장대비가 연이어 내리면서 북방의 기후에 익숙한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렸..
흉노족 한나라 전조 멸망, 갈족 석륵 및 조카 석호의 평양성 [16화] 광초 2년(319) 여름, 유요는 조서를 내린다. "나의 선조는 북방에서 일어났다. 광문제(유연)가 한나라 종묘를 세워 백성의 뜻을 좇았다. 지금 의당 국호를 바꾸고 선우를 선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국호를 조로 바꾼 이후 진창, 초벽, 안정, 농성 등을 함락시키고 관중의 파족, 저족, 강족, 갈족 등을 제압했으며 태학과 소학을 세워 학자들 밑에서 수업을 받도록 했고, 궁실을 너무 크게 짓는 것이 옳지 않다 여겨 중단하기도 했다. 현명하게 내실을 다지던 유요는 광초 8년(325), 드디어 석륵의 조나라와 군사적 충돌을 시작한다. 석륵이 장수 석타에게 명해 상군을 쳐 3천여 명의 포로와 소와 양 등 가축 2만여 두를 빼앗은 것이다. ..
위진남북조03. 가남풍의 정권 장악, 제거된 양준 일파, 석륵의 봉기 준비 초왕 사마위(진무제 사마염의 5남)가 입경한 지 얼마 안 된 「진혜제 원강 원년(291) 4월」, 서진 황제 진혜제 사마충은 이조와 맹관이 내민 조서에 서명했다. 백치 황제 사마충은 그 내용도 잘 모른 체 서명을 닦달하는 신하의 청에 못 이겨 일단 서명부터 했을 것으로 보인다. 양준을 위시한 양씨 일가가 모반을 획책했으니 이를 제압(도륙해라)하라는 내용이었다. 만약 양준이 모반을 꾀했다면 양황후를 먼저 찾았거나 양씨 일가의 누구라도 불러들여 자초지종을 들으려 했을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가남풍의 정치적 술수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곧, 조서의 내용대로 서진 초왕 사마위는 사마문에 군사를 배치하고 동안공 사마요는 금군을 이끌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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