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문제 천강 원년(566) 4월, 진나라 진문제가 사망하자 태자 진백종이 뒤를 이었으니 그가 진폐제이다. 진백종은 작은아버지 진욱을 표기대장군, 사도, 녹상서사, 도독중외제군사에 임명했다. 중서사인 유사지, 상서복야 도중거, 동궁통사사인 은불녕 등은 진욱의 권세가 지나치게 비대하다고 생각해 양주로 내보내길 권했다. 진욱은 임지로 떠날 준비를 했으나 모희가 그에게 떠나지 말 것을 권했다. 진욱은 애초에 모반의 뜻이 없었으나 진폐제의 막료들이 심태후를 속이면서까지 자신을 사사할 것을 청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진백종이 이를 허락하자 진욱은 유사지 등을 죽이며 조정을 장악한다. 진선제 진욱 즉위 (진후주 진숙보 아버지) 진폐제 광대 2년(568) 말, 진욱이 황태후의 명으로 진폐제를 내쫓고 자신이 보위에 오르니 ..
북주 외척 양견, 수나라 세우다 양견(수문제)이 정권을 장학한 581년 2월 13일, 양견은 외손자 정제(우문연)로부터 선양을 받아 수 왕조를 세운다. 정제(우문천)는 개공介으로 봉해졌지만 5월에 살해된다. 양견은 우문태의 자손 27명, 효민제의 아들 1명, 명제의 자손 7명, 효무의 자손 12명, 정제의 형제 2명, 기타 종족 12명을 살해하여 위진남북조 여느 왕조처럼 우문씨의 씨를 말렸다. (훗날, 양견의 다섯 아들도 일찌감치 사망한다. 뿌린 데로 거두는 법) 양견은 수나라 왕조를 개창한 뒤 유가 사상을 기반으로 조세와 법률을 정비한다. 구품관인법을 폐지하고 과거를 시작했는데 이미 귀족제 사회가 무너졌기에 중정관이 관리 후보자를 추천할 필요성이 없었다. 이후 수문제 개황 7년(587), 강릉의 괴뢰 ..
북주 군대가 홍동과 영안을 함락시킬 때, 고위는 진주를 버리고 사냥을 떠나던 중이었다. 당시, 북제의 군사가 우문흔, 하란표자 등의 북주군을 패퇴시키며 평양성 성벽을 무너뜨려 승세를 이어가고자 했으나, 고위는 풍숙비와 승전의 기쁨을 나눈다며 진격을 중지토록 한다. 풍숙비가 진주 서쪽에 성인聖人의 흔적이 있다며 조심할 것을 권했기 때문이다. 북주의 군사들은 그 시간 동안 성벽을 수리했고 평양을 끝까지 지킬 수 있었다. "한 줌 정도의 도적은 말 위에서 베고 붙잡아서 분수 속에다 내던져 버릴 뿐입니다!" "저들도 역시 천자이고 우리 또한 천자입니다. 저들은 오히려 멀리에서 왔는데 우리가 어찌 해자를 지키고 약한 것을 내보입니까!" 멀쩡한 군대를 놔두고 후퇴하는 북제 장군들의 진격 건의에도 불구하고 무능한 우..
위진남북조 시대, 오랜 전란으로 전통 귀족들이 주살 또는 도륙을 당해 세가 약해졌으나, 부를 많이 축적한 이들의 권세는 오히려 강해졌다. 고위는 화사개 같은 은행들을 통해 자신도 많은 부를 축적했다. 또한, 고위는 목황후의 시비였던 풍소련을 총애해 항상 그녀와 함께 다니며 사치를 일삼았다. 후세의 사가들이 북제는 풍숙비 때문에 망했다는 말을 하는 이유다. 무평 2년(571), 고위의 어머니 호태후의 음란행위가 드러났다. 승려들을 총괄하던 사문통 담헌과 통정했던 것이었다. 고위는 처음 어머니의 이런 일탈 행위를 믿지 않았으며, 호태후 근처의 여장 비구니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이 발각되자 호태후 근처의 모든 사람을 죽이고 그녀를 고립시켰다. 두 명의 황후 무평 4년(573), 위진남북조 ..
북주가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 북제도 남조 양나라처럼 은행恩幸 세력이 대두했다. 대표적 인물로는 화사개가 있는데, 그는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무성제에게 향락을 권유하였다. 여느 위진남북조 시대 황제처럼 ... "예로부터 여러 왕도 결국은 죽어 타고 남은 재가 되는 것입니다. 요순걸주도 다를 것이 없었으니 폐하께서도 젊을 때 마음대로 즐기고 국사는 대신들에게 나누어 맡겨 스스로 고생을 피하십시오." 고담은 화사개를 좌복야, 조언심에겐 인사, 원문요에겐 재정, 당옹에겐 군사 문제를 위임하며 3~4일에 한 번 조정을 살필 뿐이었다. 남조 양나라처럼 전통적인 귀족 사회가 무너지고 한문 출신들이 크게 기용되었다. 군공을 많이 세운 자들이 황제가 되거나 새로운 명문 귀족으로 떠오르는 공통점이 북조에서도 나타..
조조는 생전에 칭제를 하지 않았다. 다만, 여러 차례 문서를 통해서만 아들(조비인지 누군지 하여간 누가 됐건)이 찬위할 여지는 남겨두었다. 5호 16국. 위진남북조 시대의 막바지에 동위를 지배한 고환도 조조와 마찬가지였다. 고환은 하급 소대장 출신으로 이주씨가 효무제 원수를 옹립하자 효정제 원선견을 옹립했었다. 동위 효정제 무정 2년(544), 고환이 아들 고징을 대장군, 영중서감, 섭이부상서에 임명했다. 고징은 옛 친구들이 자신에게 무례하거나 뇌물을 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 고환은 생전에 이런 말을 했었다. "공들은 되도록 내 아들을 피하도록 하시오." 고징은 고환 사후 지방의 군벌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되어 발상을 미뤘다. 실제로 하남에서 반란(후경)이 일어나자 한궤에게 명해 이를 토벌하고 ..
고환의 동위는 선비족과 한족 간의 갈등이 컸다. 선비족 고관들이 한족을 경멸했기 때문이다. 고환의 총애를 받던 고오조는 휘하의 선비족 장병들 속에 한인들이 섞여 있으면 고환에게 요청해 이들을 다른 부대로 이전시키는 등 당시 선비족 대장들의 상황을 대변하는 일화를 몇 가지 남겼다. 한번은 황하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여러 명이 물에 빠져 죽자, "한 푼의 가치도 없는 한인들은 죽게 놓아두어라!" 라는 말을 했다. 고환도 이를 타개하려 시도는 했지만, 동위가 멸망하는 순간까지도 이는 해결되지 않았다. "한인은 너희 노복이다. 남자는 너희를 위해 경작하고, 여자는 너희를 위해 옷을 만든다. 곡식과 비단을 세금으로 내 너희를 따뜻하게 먹이고 있다. 왜 그들을 업신여기는 것인가?" "선비족은 너희가 고용한 용병이다...
서진 말기 화북 농경 지대, 위진남북조 시대 강남 호족 [10화] 발췌 : 중국의 역사 - 위진남북조 - 가와카쓰 요시오, 혜안출판사 중국 본토는 대게 회수淮水를 기준으로 하여 그 이북과 이남으로 크게 나뉜다. 회수 이북은 개활지라 명명되며 건조도가 높아 삼림이 충분히 생육하지 못하고, 어느 정도 삼림이 자란다 하더라도 일단 한 번 채벌되면 재생되기 어렵다. 따라서, 회수 이북에는 삼림지대가 형성되기 힘들었고, 이에 『울창한 삼림』에 방해를 받지 않은 화북의 대평원은 전망이 좋고, 공간이 열려 있어 집단의 이동이 쉬웠다. 또한 치수가 어렵기로 유명한 황하의 물을 거의 이용할 수 없는 상태여서, 소규모 관개와 자연의 천수를 주로 이용하는 소위 소관개 천수 농경 지대였다. 뜻밖에 농사에 가혹한 환경에 처한 ..
고팔부古八部 시절 거란족과 선비족(북위), 거란과 북제 등국 3년(386년), 북위의 정벌로 인해 고막해와 분리된 거란족은 반세기가 지나면서 안정을 되찾았고 점차 세력을 회복하면서 북위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북위의 세조 탁발도 태연 3년(437)에 거란은 사신을 파견해 공물을 바쳤다. 태평, 진군 연간(440~450)에는 좋은 말을 매년 공납했다. 현조 탁발홍(466~470 재위) 시기에 거란족은 북위와 이미 여러 해 동안 왕래하면서 마침내 정식으로 승인을 받아 "여러 나라의 말석에 끼여 향응에 참가하는 지위를 얻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6세기 중엽까지 거란은 고팔부古八部의 연맹 단계에 해당한다. 고팔부의 명칭과 관련해 위서의 현조기와 거란전 및 책부원귀 요사의 영위지와 세표의 기록이 서로 일치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