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나라 마지막 황제 양경제 소방지 양경제 소태 원년(555) 말, 왕승변의 잔여 세력인 두감과 왕승지가 거병해 북제의 군사를 이끌고 건강성 인근까지 다다르지만 양나라 진패선이 출격해 북제의 군사까지 대파하는 큰 승리를 거둔다. 그리고 조카 진현랑을 북제로 보내며 화친을 요구한다. 양경제 태평 원년(556) 4월, 북제의 소궤, 동방로, 임약이 10만 대군으로 공격에 나서지만 진패선의 대장 황업이 양산에서 대파하며 양군은 대치전에 이른다. 북제가 먼저 퇴각의 뜻을 갖고 소연명을 되돌려 줄 것을 요구하지만 건강을 나서던 도중 등창이 나서 죽는다. 누가 봐도 양나라 진패선이 손을 쓴 것임에 틀림없었다. 화가 난 북제군은 무호에서 출발해 건강으로 진격했지만 후안도의 군사가 북제의 의동삼사 걸복무로 등을 생포하는..
북주 외척 양견, 수나라 세우다 양견(수문제)이 정권을 장학한 581년 2월 13일, 양견은 외손자 정제(우문연)로부터 선양을 받아 수 왕조를 세운다. 정제(우문천)는 개공介으로 봉해졌지만 5월에 살해된다. 양견은 우문태의 자손 27명, 효민제의 아들 1명, 명제의 자손 7명, 효무의 자손 12명, 정제의 형제 2명, 기타 종족 12명을 살해하여 위진남북조 여느 왕조처럼 우문씨의 씨를 말렸다. (훗날, 양견의 다섯 아들도 일찌감치 사망한다. 뿌린 데로 거두는 법) 양견은 수나라 왕조를 개창한 뒤 유가 사상을 기반으로 조세와 법률을 정비한다. 구품관인법을 폐지하고 과거를 시작했는데 이미 귀족제 사회가 무너졌기에 중정관이 관리 후보자를 추천할 필요성이 없었다. 이후 수문제 개황 7년(587), 강릉의 괴뢰 ..
위진남북조 중기 - 양원제 승성 2년(553) 10월, 왕승변은 건강, 진패선은 경구에 주둔케 했다. 승성 3년(554) 4월, 서위의 사자를 북제의 사자보다 홀대했다는 이유로 우문태가 11월에 출병을 명한다. 우근, 우문호, 양충 등이 한수를 넘어 강릉에서 40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황화에 이르렀다. 왕승변을 대도독으로 삼고 진패선에겐 양주로 군영을 옮기게 했다. 소역은 밤에 봉황각에 올라가 천문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객성(혜성처럼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별)이 형초의 영역으로 들어왔으니 우리가 필히 패하겠구나!" 강을 건너는 서위 군을 왕포, 호승우, 주매신, 사답인 등이 영격했지만 모두 패했다. 목책을 두고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 양나라 장수 호승우가 유시에 맞아 전사한다. 서위군은 여세를 몰아 목책..
후경으로 인해 양나라 많은 지역이 동위와 서위에 편입되었고 각지의 군웅들은 할거하여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았기에 황제가 된 소역(양원제)이 다스릴 수 있는 지역은 많지 않았다. 이보다 앞선 7달 전, 파촉의 친동생 무릉왕 소기가 스스로 칭제하여 세자 소원조를 황태자에 봉했고, 같은 해 8월엔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내려왔다. 태자 소원조는 처음에 후경에 소역이 패했다 거짓말을 해 아버지와 동으로 왔고, 서위가 철기 1만으로 병사가 거의 없는 성도를 포위하자 이번엔 강릉 일대를 함락시키자 제안한다. 그러나 병사들은 고향인 촉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말뿐인 포상만을 들어온 데다 군량마저도 떨어져 전투 능력을 거의 상실했다. 이에 소역에게 강화를 요청했으나 소역은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양원제 승성 2년(553)..
양나라 권력을 장악했던 후경은 자신도 연이어 패배하고 전선의 휘하 장수들의 패전 소식이 계속 전해오자 온종일 술을 마시며 간문제의 딸인 율양공주를 끌어안을 뿐이었다. 당시 율양공주와 왕위는 서로를 후경 앞에서 헐뜯었다. 사태가 불리하게 흐르자 왕위는 간문제를 제거하고 속히 보위에 오를 것을 권했다. "자고로 새 왕조가 들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폐립을 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위세를 보여 줄 수 있고, 양나라에 대한 백성들의 헛된 기대를 끊을 수 있습니다." 이즈음, 전투에서 패해 포로로 붙잡힌 안지추는 양나라 건강으로 끌려와 당시의 참상을 이렇게 술회했다. "포로가 되어 옛 땅 건강에 돌아와 보니, 이곳은 오랑캐 놈에 짓밟혀 있다. 선조의 사당을 보니 폐허가 된 수도를 마음 아파하는 옛 서리의 시가 ..
태청 3년(549) 8월, 양나라 서강독 진패선이 후경에게 투항하려던 광주자사 원경중을 습격해 살해하고 정곡후 소발을 광주자사로 삼는다. 상동왕 소역의 세자 소방이 조카인 하동왕 소예에게 기습을 받아 살해당하자 왕승변과 포천에게 명해 소예를 공격한다. 신주자사 포천은 하동왕 소예에게 승리를 거듭하며 장사에서 그를 포위하자, 소예의 동생 악양왕 소절이 소역의 근거지인 강릉을 공격한다. 이에 양나라 소역은 왕승변의 계책을 받아들여 소절의 근거지인 양양을 공격하니 소절은 왕비와 세자를 서위에 인질로 보내며 구원을 청한다. 우문태는 양충에게 명해 형주 일대 15주의 군사를 총지휘하는 한편, 경릉을 지키며 소절을 위협하던 유중례와 대치하도록 명한다. 소릉왕 소륜은 소역이 조카인 소예, 소절이 서로 다투고 서위까지..
상황이 무르익은 태청 3년(549) 3월, 후경이 격문을 발표하며 총공격에 나선다. 이를 위진남북조 시대 후경의난이라 한다. "폐하가 미덥지 않은 것을 높이면서 선비들을 배척하니 이는 전한 말기 신나라를 세운 왕망의 법입니다. 철로 화폐를 주조하면서 그 무게가 수시로 변하니 이는 후한 초기 촉나라에 점거했던 공손술의 제도입니다. 함부로 관직을 남발한 것은 갱시제와 조왕 사마륜의 행위입니다. 뇌물이 성행하고, 환관이 발호하고, 승려들이 배를 불리고, 황태자는 주옥과 주색을 탐하고, 상동왕 소역은 방종합니다. 남강왕 소회리와 정양왕 소기 등은 목후이관(목욕한 원숭이가 갓을 씀, 멍청하다고 놀리는 뜻)한 자들입니다. 그러니 누가 근왕에 나서고자 하겠습니까? 오늘의 거사가 어찌 죄가 될 수 있겠습니까." 남강왕..
후경의난으로 어지러운 위진남북조 시대 549년. 당대 역사가인 하지원何之元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양나라의 인민은 대부분 병사가 되어 농업을 버리고 병사로 생활하고 있었다. 그들은 장관의 부하가 되어 악행을 저지르며 죄 없는 민중을 잡아들이고 선량한 사람들을 압박했다. 그로 인하여 인민은 유망하였고 도적은 더욱 횡행했다. 이런 상태가 몇 년이나 계속되었고 국가는 심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양나라는 한漢의 1군郡 보다도 적으나 태반의 사람이 부곡이 되어 경작하지 아니하면서 먹고, 누에를 치지 아니하면서 옷을 입고 혹자는 왕후를 섬기고 장수에 기대어 처자를 거느리고 동서로 따라다니면서 백성들의 것을 빼앗고 양민을 해치는 악당이 되어 죄 없는 사람을 잡아 묶고 어진 사람을 핍박하니 백성들은 유..
양무제 태청 2년(548) 9월, 반란 준비를 치밀하게 준비하던 후경이 마침내 수양성에서 반기를 든다. 양나라에선 그전부터 후경의 반란 조짐이 있다는 상소가 꾸준히 올라왔었지만 간신 주이가 이를 모두 불태우거나 숨기는 바람에 양무제는 정작 이같은 사실을 알지 못했다가 느닷없는 후경의 반란 소식을 접하곤 매우 놀랐다. 후경은 먼저 회하 일대의 양아인에게 함께 거병할 것을 권했지만 양아인은 사자를 체포해 건강으로 보냈다. 후경은 이에 양아인 살해와 강서 일대의 할양을 요구하며 이를 거부할 시 민월(복건 일대)을 치겠다고 위협했다. 그런데도 양무제는 비상식적인 답신을 보낸다. "빈궁한 집도 5명 또는 10명의 빈객을 맞아들여 사람들을 기쁘게 만든다. 짐에게 그대는 단 한 명의 빈객에 해당한다. 원망의 말을 듣..
양무제 태청 원년(547) 9월, 양무제는 조카 정양후 소연명에게 15만의 대병을 주어 동위 토벌을 명한다. 소연명은 계책도 없고 황족임을 내세운 교만한 소인배였다. 처음 제장들의 반대에도 팽성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고, 원군으로 합류한 동위 모용소종의 기습이 벌어지자 작은 손해를 입곤 겁에 질려 서둘러 철군한다. 당시 모용소종은 양나라 곽봉의 진영을 급습했으나 실패했었다. 소연명은 예하 장수들이 잘 막아냈음에도 이것에 겁을 먹고 철군을 결정했었다. 이에 노련한 모용소종이 거짓으로 먼저 철군한다. 양나라 군대의 군율이 엄격하고 방비도 철저해 쉽게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내가 먼저 짐짓 퇴각하는 모습을 보여 적들이 쳐들어오도록 유인할 것이다. 너희는 기회를 보아 그들의 배후를 격살하라!"..
영희 3년(534) 7월, 북위 효무제가 10만 병사로 위진남북조 시대 남조 양나라를 치겠다며 병사를 일으켰지만, 이는 북쪽의 고환을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고환은 22만 병사를 다섯 갈래로 나눠 효무제의 친정을 돕겠다고 했으나 이는 효무제와 대적하겠다는 의미였다. 효무제가 친히 10만의 군사로 진양의 고환 공격을 개시한다. 이전에 효무제는 관서의 군벌인 우문태를 상서좌복야에 임명하며 공주를 보내 처로 삼게 했다. 믿을 만한 보험을 하나 둔 것이다. 그러나 효무제나 주변 대신들은 소인배에 불과했다. 곡사춘이 급히 내려오느라 피로한 고환의 군사를 기습하려 했으나 황문시랑 양관이 이를 막았다. "곡사춘이 도하 한 후 기습에 성공해 고환을 토벌할지라도 이는 또 하나의 고환을 만드는 것입니다."우매한 효무제가 이..
이주영은 황하를 사이에 두고 진경지와 대치했다. 3일 동안 열한 번 싸워 모두 패하자 빠르게 도강하여 역습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이것이 성공하여 원호의 아들 원관수를 포로로 잡았다. 이에 원호 휘하의 안풍왕 원연명 휘하의 군사들이 사방으로 도주해 군세가 약해지고 곧 낙양이 함락됐다. 이에 원호에게 투항했던 수많은 성이 다시 북위로 귀항했으니 양나라 병사들은 퇴각을 시작했다. 원래 병력도 적었고 이주영의 추격군이 빠르게 들이닥치자 진경지 조차도 승려 복장을 하며 간신히 양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원호는 임영까지 도주했으나 임영현의 병사에게 죽임을 당하고 수급은 낙양의 이주영에게 보내진다. 원호의 난을 평정하자 효장제 원자유는 이주영을 위로한다. 이주영은 원호에 호응했던 만사추노 등을 제압해 하주, 위주,..
(하음의 변) 당시 효장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줄 몰랐으나 형인 원소와 동생 원자정이 병사들에게 끌려가 토막 나 살해되는 모습은 목격했다. 이에 효장제는 이주영에게 찬위할 생각이 있으면 그리하라 이른다. 이주영 휘하의 장수들은 이에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제왕의 흥망과 성쇠는 무상한 법이오. 만일 천명이 장군에게 돌아간다면 장군은 응당 때에 맞춰 존호를 받아야 할 것이오." 휘하의 고환이 칭제할 것을 권했으나 거부한다. 위나라 신하 이주영얼마 후 이주영은 본인이 저지른 짓이 너무나도 흉포하다는 것을 깨닫고 환궁한 이후 효장제를 향해 머리를 거듭 조아리며 벌을 줄 것을 요청했으나 효장제는 그리할 수 없었다. 당시 왕공 대신을 도륙하자 낙양의 백성들은 두려운 나머지 급히 도성을 빠져나갔다. 성내 인구는 1..
"작은 현의 현령이 유능하면 큰 현으로 승진시키고 큰 현의 현령이 유능하면 이천석 관리로 승진시키라." 이런 양무제의 조명 덕택에 산음현령 구중부가 장사 내사, 무강 현령 하원이 선성태수로 승진하기도 했다. 위진남북조 시대, 유송과 남제에서 시행하던 오관五館을 일반 수재에게도 개방하고 정원에 제한을 두지 않았으며, 오관 출신 중 유능한 자들을 뽑아 바로 관리로 임명했다. 이 시책은 수나라 시기 과거제를 촉진하는 계기가 된다. 적어도 양나라 중기까지는 남조의 문학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활발하게 꽃을 피웠다. 또한, 관원이 되기 위한 교양 습득을 위해 학관을 세웠다. 오경 박사가 한 명씩 임명되어, 수백 명이 소속된 한 관을 담당했으며, 이 관에서 시험을 시행하여 우수한 학생을 관료로 발탁하였다. 기존의 구..
소의는 제나라 최혜경의 난을 진압한 후 상서령, 위위에 임명됐으나 소보권의 심복들은 그를 꺼려 죽이려 했다. "소의는 소란이 울림왕을 폐립 한 것을 흉내 내려 합니다!" 이에 소보권은 소의(양나라 무제 소연의 친형)에게 사약을 내렸다. 소의는 이 사약을 받아 마시고 죽었는데, 아무리 봐도 소의는 앞뒤가 꽉 막혀 도무지 말도 안 통하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자고로 사람은 언젠가 죽기 마련이다. 상서령이 어찌 반기를 들어 도주할 수 있겠는가?" 당시 제나라엔 경릉팔우竟陵八友란 영명체의 대표적인 시인들이 있었다. 왕융王融, 사조謝朓, 범운范雲, 임방任昉, 심약沈約, 육수陸倕, 소침蕭琛, 소연蕭衍이 그들이다. 이중 사조는 명문 사씨 일가의 자제로 유송의 마지막 황제인 유욱의 목을 벤 왕경칙의 사위이기도 했다...
소소업은 남제 경성(수도)으로 돌아와 아픈 아버지를 위해 곡성을 내는 등 그럴듯하게 연기를 해서 황제가 되었다. 소색은 이 연극에 속아 문혜태자의 뒤를 이어 소소업을 제나라 황태손으로 삼아 제위를 물려준다. 방탕한 소소업은 국고를 함부로 썼고 황후 하씨도 난교를 즐기자 종실 소심과 소탄지는 은밀히 서창후 소란과 모의해 폐립을 준비했다. 애초 소색(소도성 아들)은 소소업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었다. "5년 동안은 모든 것을 재상에게 맡기고 너는 의견을 섞지 말 것이며, 5년이 지나서는 다시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마라. 만약 스스로 이룬 것이 없더라도 아주 한스러워하지 마라 ... 만약 할아버지를 기억하며 당연히 잘 해나가겠지!" 이전에 소소업이 황제가 되기 직전, 소색의 장례 중에도 소소업은 기녀들은 불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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