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나라 권력을 장악했던 후경은 자신도 연이어 패배하고 전선의 휘하 장수들의 패전 소식이 계속 전해오자 온종일 술을 마시며 간문제의 딸인 율양공주를 끌어안을 뿐이었다. 당시 율양공주와 왕위는 서로를 후경 앞에서 헐뜯었다. 사태가 불리하게 흐르자 왕위는 간문제를 제거하고 속히 보위에 오를 것을 권했다. "자고로 새 왕조가 들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폐립을 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위세를 보여 줄 수 있고, 양나라에 대한 백성들의 헛된 기대를 끊을 수 있습니다." 이즈음, 전투에서 패해 포로로 붙잡힌 안지추는 양나라 건강으로 끌려와 당시의 참상을 이렇게 술회했다. "포로가 되어 옛 땅 건강에 돌아와 보니, 이곳은 오랑캐 놈에 짓밟혀 있다. 선조의 사당을 보니 폐허가 된 수도를 마음 아파하는 옛 서리의 시가 ..
환온의 측근인 치초 일가 중 일부가 오두미도 도교를 신봉했던 것으로 추측되며, 훗날 손은의 난이 발생했을 때, 성문을 열고 손은을 받아들인 사씨 일가도 있었다. 이를 보면, 도교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파촉과 동진 일대에 넓게 퍼져있었다. 관련 일화를 하나 살펴보면, 동진 치초 일가 중 한 사람인 치음은 도교를 독실하게 믿었는데, 배탈이 오래 지속되자 우법개란 유명 의원을 찾아간다. "군후께서 앓고 있는 병은 바로 정진精進을 너무 지나치게 해서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탕약 한 제를 받아 마셨더니 곧바로 설사가 나왔고, 주먹 크기만 한 종이 뭉치가 몇 개 나왔는데, 이전에 삼켰던 도교 부적들이었다. 또, 지위가 높았던 왕헌지는 자신의 병이 위독해지자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훗날 사중랑 사만은..
갈족 석륵, 위진남북조 시대에 왕미 세력을 흡수한 사건 [17화] 연주자사 구희에게 대패해 유연에게 몸을 맡겼으니 석륵이 큰 인물이라 판단한 유연은 그에게 장군의 직을 내렸고 전장터에서 공을 세우기를 10여 년, 마침내 노예 출신으로 왕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석륵은 유연의 한나라 휘하로 많은 전투에 참여했으나 처음부터 독립할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인망을 쌓는 데도 주력했다. 약탈은 물론이고 민간인을 함부로 죽이는 것을 절대 금했으며 기주를 함락한 뒤에는 군자영을 세워 문인들을 길러냈다. 석륵의 수하였던 장빈도 이런 군자영에 스스로 찾아간 인물이었다. 유총이 황제가 되자 석륵은 다시 정동대장군, 병주자사에 임명되었고 유총의 아들 유찬과 낙양을 칠 때, 양양으로 진격해 장강과 한수 이북의 거점을 얻어냈..
화북 쟁탈전 - 유요 근준 석륵 삼국지, 두개의 조나라 [15화] 연이어 적국의 황제 두 명을 사로잡은 전대미문의 일이 벌어졌다. 이에 유총은 이에 더욱더 사치에 힘썼다(?). 수렵하며 술을 마시는 것 외에 그가 즐긴 것은 각 대신의 집을 차례로 돌며 미인을 감상하는 것이었다. 그는 중호군 근준의 집에서 그의 두 딸 근월광과 근월화 모두 미모가 뛰어난 것을 보고 곧바로 귀빈으로 삼았다. 그리고 몇 달 후 근월광을 황후로 세웠다. 천하가 한나라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그렇지만 한나라엔 건국자 유연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여전히 존재했다. 왕준, 석륵 등의 대장군들을 조정에서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문제는 여전히 한나라에게 큰 문제였으며, 결국에 해결하지 못했기에 후조가 탄생한 배경으로 작용한다. 유총..
사마월 진회제 민제 최후, 한나라 유총 사치향락 빠지다 [14화] "지금 호로胡虜들이 낙양 근교까지 다가왔는데 모두 지킬 뜻이 없소. 조정은 모두 그대만을 믿고 있는데 어찌 지금 군사를 이끌고 멀리 출정하겠다는 것이오? 낙양을 포기하려는 것이오?" 진회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마월은 석륵을 토벌해 조정의 권위를 다시 세우겠다며 기어코 출병한다. 누가 봐도 임지인 동해로 돌아가겠다는 뜻이며 낙양은 버리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낙양의 수비병』은 거의 없어지고 기근은 더욱 심각해졌다. 사마월이 남긴 장수들은 공경들의 재산을 약탈하거나 공주들을 능욕하기까지 한다. 진회제는 참을 수 없어 구희에게 사마월 토벌을 명하는 밀조를 내렸고 그나마 사마월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서진의 마지막 숨통은 그의 폭사와 함..
한나라 건국 시조 위진남북조 흉노 유연, 사마영 실수 [12화] 후한 건안 21년(216), 조조가 흉노 세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좌, 우, 남, 북, 중앙의 5부로 나눠 부마다 1명의 도위를 두고 중앙에선 사마를 파견해 이들을 감독했다. 1만여 부락민을 거느린 좌부는 부씨현(산서성 임분현)에 거주.6천여 부락민을 거느린 우부는 기현(산서성 기현)에 거주.6천여 부락의 중부는 대릉현(산서성 문수현)에 거주. 이로써 분수 일대는 남흉노 3만여 부락이 사살싱 점령한 셈이 되었다. 중원으로 들어온 흉노 19개 부족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도각, 강서, 노수호 부족이 있었다. 이중 도각부는 한고조 시절부터 흉노로 공주들을 시집보냈기에 귀족들이 유劉를 성으로 삼았다. 그리고 중원에서 오래 살았던 탓에 한화가 많이..
사마의 막내 아들 사마륜과 가밀 사마휼의 대결, 강통의 사융론 궁중 암투로 혼란스러운 이 시기에 강통은 사융론을 올리며 5호(흉노, 선비, 저족, 갈족, 강족)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괴이한 기풍으로 극도로 탐욕스럽기 그지없고, 흉포하고 사나운 데다 인정도 없는 자들입니다. 저들은 힘이 약하면 우리를 두려워하며 복종하나 강하면 곧바로 침략하며 반기를 듭니다... ... 지금 화하의 사서士庶가 저들을 업신여기자 그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있습니다. 반드시 틈을 보아 흉포한 성정을 드러낼 터이니 지금 저들이 피폐하고 우리의 무력이 성한 때를 이용해 저들을 원래 살던 곳으로 쫓아내느니만 못합니다." 사마의가 살아있었더라면 강통의 사융론을 받아들였을까? (특이하게 동진 16국 시대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훗날..
왕휘지 형제의 인물 평가, 사마상여와 정단 유효표의 세설신어에 왕자유王子猷 왕자경王子敬 형제의 인물평 이야기가 일부 전해집니다. 어느 날 왕자유(왕휘지 王徽之), 왕자경(왕헌지 王獻之) 형제가 함께 고사전高士傳 속의 인물과 찬을 품평합니다. 왕자경이 정단井丹의 고결함을 칭찬하자 왕휘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야. 장경長卿(사마상여, 司馬相如)이 세상에 도도했던 것만은 못하지." 이어서 『송나라 유효표가 남긴 주석』을 보면 이렇습니다. 왕휘지 왕헌지 형제는 사마상여 정단 두 사람 중 한 명을 더 좋게 생각한 이유가 보입니다. 출처 : 혜강嵇康의 고사전高士傳정단과 신양후 음취정단(자는 대춘大春, 신양후에게 시달렸던 인물)은 부풍扶風 미郿 땅 사람입니다. 박학하고 논의에 뛰어나 수도(후한 수도 낙양)에선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