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남북조 시대 말기, 제나라(북제) 멸망 이후 풍소련은 이후에 고위가 모반을 일으키다 발각되어 주살되니 우문달에게 하사됐으며 양견이 북주의 보위를 찬탈하자 우문달의 정비인 이씨의 오빠 이순에게 하사됐다가 이순의 모친에 의해 자진한다. 주나라 (북주) 위진남북조 시대 북방 통일을 이룬 북주의 무제 우문옹의 뒤를 이은 건 아들 선제 우문윤이다. 선제에겐 북주와 북제의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그러나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온 선제는 황제가 되자마자 주색에 빠지고 공신들을 제거하며 국력을 소진했다. 재위한 이듬해인 579년, 7살에 불과한 태자 우문천(우문연衍에서 우문천闡으로 개명)에게 보위를 물려주니 그가 정제이다. 선제는 스스로 천원 황제를 칭하며 전횡을 일삼..
풍태후 사후 진정한 황제가 되어 한화 정책을 추진했던 위진남북조 시대 효문제 원굉의 치세가 저문다. 북위 효문제 태화 21년(497), 20만 명의 군사를 동원해 제나라로 진격했으나 남제 남양 태수 방백옥의 복병계에 걸려 거의 죽을 뻔했다. 이듬해엔 제명제 소란이 죽자 국상이 있는 나라는 치지 않는다며 이내 철군했다. 499년, 효문제가 사망하고 황태자 원각이 즉위하니 이가 북위 선무제다. 선무제는 황숙 원희가 모반하자 원씨 종친을 불신하고 외숙인 고조를 신임했다. 그 배경엔 자귀모사의 원칙을 어기고 살아남은 그의 생모 영태후(호씨라서 호태후라고도 함)가 있었다. 자귀모사를 어긴 이 시기부터 북위는 점차 쇠락의 길을 걷는다. 고조가 붕당을 결성해 북해왕 원상, 청하왕 원역을 사사로이 죽이고 권위를 높이기..
북위 효문제 모순 - 한화정책 효문제 태화 19년(495)엔 제나라 공격을 감행했으나 무덥고 습한 날씨에 군수품 조달이 늦어지면 소득 없이 귀환한다. 이해 7월, 북위는 5호 16국 국가들이 행해오던 호한분치를 버리고 한화漢化를 공식적으로 천명한다. 물물교환 방식을 버리고 태화오수전을 주조해 화폐 개혁을 시도했고, 낙양에 국자감, 태학, 사문소학을 두었다. "오늘 짐(효문제 탁발굉)은 선비어를 포함한 모든 북방어를 금지하고 한어로 통일해 쓰기로 했다. 30세 이상의 관원은 이미 오랜 습관이 된 까닭에 서서히 바꾸는 것을 윤허하나 조정에서 오랫동안 봉직한 30세 이하의 관원은 선비어로 말하는 것을 금한다. 이를 어길 경우 곧바로 강등과 면직 조처를 취할 것이다." 북위 태화 20년(496), 탁발씨를 원씨..
효문제 태화 17년(493), 북위 황제 효문제(탁발굉)는 낙양 천도를 결정했다. "평성은 매우 한랭했다. 6월에도 비와 눈이 내리고, 모래바람이 수시로 불었다. 이에 낙양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위진남북조 시대 사서인 위서의 기록에 따르면 기후로 인해 천도를 결정한 것이나 내막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국력이 커질수록 수도인 평성으로 몰려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이들이 머물 집과 식량 문제가 생긴 것이다. 가축으로 식량을 옮기더라도 중간의 소진분이 너무 커서 이 또한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북쪽의 유연과 수도의 거리가 가까웠고, 북중국 통일 이후엔 국가 유지를 위한 행정의 문제도 생겼다. 이에 북위 효문제는 낙양 천도를 결정하고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이전에 북위 중신들 사이에선 만약 "수도를 이전한다면..
북위 헌문제 연흥 6년(476) 8월, 풍태후가 술에 독을 타 헌문제 탁발홍을 살해한다. 풍태후는 태황태후가 되어 국가 대정을 장악했고 보위에 오른 효문제 탁발굉은 12세에 불과했다. 북위 효문제 탁발굉은 황제가 되어서도 풍태후(문명태후)한테 체벌 당하며 성장한다. ㅠㅠ 이 일이 있기 12년 전인 문성제 화평 5년(464), 위진남북조 시대 유연의 가한 토하진이 죽고 아들 여성予成이 뒤를 잇고 자신을 수라부진가한이라 칭하며 연호를 영강永康이라 하였다. 이전의 가한처럼 그도 북위의 북방을 공격하여 약탈하였다. 6년 뒤인 헌문제 황흥 4년(470), 경조왕 원자추, 동양공 원비, 임성왕 원운, 여음왕 원천사, 제남공 나오발, 농서왕 원하에게 명해 태무제 탁발도 시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연 토벌에 마침표를 찍..
탁발도가 남정에 나섰을 때 태자 탁발황이 감국으로 있었는데 휘하의 도성이 탁발도가 총애하는 태감인 종애와 반목했다. 종애는 탁발도가 돌아오자 도성 일당의 죄를 날조해 보고했고 탁발도는 이에 도성 일당을 죽인다. 탁발황은 이에 병을 얻어 곧 사망하고 종애는 탁발도가 추궁할까 두려운 나머지 늦은 밤, 영안궁에서 자고 있던 탁발도를 죽였다. 황망한 5호16국 시대 영웅의 죽음이다. 다음 날, 황태자에 이어 황제가 죽자 황제의 손자 탁발준이 보위에 올라야 했다. 그러나 나이가 어려 상서좌복야 난연, 시중 화정, 시중 설제는 탁발도의 3남인 북위 진왕 탁발한을 옹립고자 했다. 그러나 종애가 미리 눈치채고 무장한 태감들로 이 세 사람을 죽인 뒤 탁발한 마저도 살해한다. 그리고 조서를 조작해 오왕 탁발여를 보위에 올..
북위 문소황후 일가, 발해 고씨인가 고구려 고씨인가? 출처 : 고구려 유민 북위 문소황후 일가의 비지(碑誌) 연구, 민경삼 [링크]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북위 문소황후(고조용)의 5대조인 고고高顧, 고무高撫 형제가 영가의난에 고구려로 피난한다. 그 후 북위 헌문제獻文帝 때에 고무의 손자 고잠高潛은 돌아가 요동에 거하게 되고, 고고의 4세손인 고양, 고승신도 효문제 때에 북위로 들어간다. 고양의 딸과 손녀는 북위의 황후가 되고, 고양의 아들 고조와 손자 고맹은 부마가 된다. 고조는 당시 상서령의 지위에 있으며 조야의 전권을 행사한다. 고고, 고무의 친족은 여러 대에 걸쳐 고구려에 살았다. 그중 일부는 북위로 갔으며 일부는 고구려에 남게 되었다. 이 기록은 대다수의 학자들이 위서나 북사 속의 고구려 관련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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