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진악 죽음위진남북조 시대, 장안에서 두 군대가 합세하자 심전자는 헛소문을 퍼뜨린다. 왕진악이 남방 병사를 몰살하고 장안에서 모반을 일으킬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병사들이 서로를 의심했고, 왕진악은 심전자의 요청으로 부홍지의 대영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부홍지는 없고 심전자가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곧이어 심씨 일족인 심경인이 왕진악의 목을 베고, 왕진악의 형제와 사촌 등 7명을 더 죽였다. "유태위의 명을 받아 모반을 주도한 왕진악을 주살했다!" 부홍지는 심전자가 졸지에 자신의 영채 안에서 왕진악을 죽이자 매우 놀라 유의진에게 알렸다. 막료장 왕수 등은 심전자 일행이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장안성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아무 까닭 없이 대장을 죽인 죄로 그의 목을 베었다. 부홍지가 지양에서 혁련괴의 ..
사마소 - 황제의 반란, 권력 찬탈자 왕돈을 내쫓는 동진 [29화] 훗날(왕돈이 사마소 황제에게 패망하던 날), 왕함(왕함의 아들이 왕돈의 장남으로 입양)은 왕빈과의 사이가 틀어졌다는 것으로 생각해 왕빈에게 의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빈은 이런 일화에도 불구하고 그를 받아들이려 했었다. 같은 해 말, 반란에 성공했던 왕돈은 대군을 이끌고 무창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원격으로 조정을 제어한다. 비록 동진 조정은 제압했지만, 지방 군벌은 확실히 제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약은 왕돈이 조정을 뜯어고친다는 소식을 듣고 왕돈의 사자에게 거친 목소리로 말한 적이 있다. "너는 아흑阿黑(왕돈의 어렸을 때 자字)에게 말하라. 어디서 감히 불손한 짓을!서둘러 군대를 수습하여 돌아가라!즉시로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3..
동진 왕돈 반란 성공, 허수아비 황제 사마예 [28화] 진원제 대흥 4년(321), 사마승을 상주자사로 삼았다. 대연에겐 사주, 연주, 예주, 병주, 옹주, 기주 6개 주의 군사를 총괄케 했고,유외는 진북장군 겸 청주, 서주, 유주, 평주의 군사를 총괄케 했다. 동진 원제는 후조의 석륵을 서와 북에서 막는다는 취지로 임명했으나, 실질적으론 왕돈 반란을 미리 방비하려 한 것이다. 진원제 영창 원년(326), 왕돈이 마침내 유외를 주살한다는 명목으로 건강을 향해 진군한다. 왕돈은 상주자사 사마승을 설복시키려 했으나 실패했고, 비슷한 시기 사마예는 유외와 대연에게 건강을 지킬 것을 명한다. 당시 건강의 대신들은 왕돈이 결코 그럴 리 없다고들 말했다. 그러나 주의 등은 그가 반란을 일으킬 인물이라며 조정의 대책..
왕씨와 사마씨가 천하를 공유한다. 사마예 동진 건국 [27화] 이 직전에 『진민제는 한나라(흉노 유연이 세운 국가)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해 장안 함락 전 사마예에게 이런 친서를 보낸다. "짐은 지금 궁지에 몰려 성에 유폐돼 온갖 걱정이 든다. 만일 하루아침에 붕괴하는 날이면 승상이 가히 만기를 통섭해 낙양을 되찾고 종묘를 수복함으로써 이 치욕을 설욕하기 바란다." 사마예는 사마업이 포로로 잡히자 보위에 오르진 않았지만 진민제 건흥 6년(317)에 진민제가 피살되자 유곤, 단필제, 단진, 소속 등의 상표로 보위에 올랐다. 사마예가 동진의 창업주 진원제元帝이다. 동진 건국 이전에 이미 왕씨들이 강남의 주요 요직을 차지한 상태였다. 왕돈은 호북, 호남을 비롯한 양자강 중류, 왕도는 양자강 하류를 ..
강남 호족과 낭야 왕씨가 옹립한 사마예, 동진 왕도 [26화] 영흥 2년(305) 봄, 서진의 장군인 진민이 강남에서 할거할 뜻을 밝히며 강남 호족의 호응을 요구하자 중원에서 무시를 받던 오군의 명족 고씨顧 일가를 비롯한 대다수가 찬동한다. 그렇지만 진민은 정치력도 없고 서진 정부가 점차 역적과 함께한다며 의심을 하자 진민을 영가 원년(307)에 제거한다. 이후에도 강회의 장창, 광릉의 전회의 난 등을 제압한 당시 강남 호족들의 상호 협력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겐 상호 배타적이고 대립, 경쟁적인 성격이 강했기에 유유의 송나라 이후론 통합 세력으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자신들의 가문조차 지켜내지 못하게 된다. 영가 원년(307), 사마월은 사마예를 진동대장군, 도독, 양주 강주 호주..
염위 멸망, 선비족 모용준 연나라 건국, 강남의 사마예 [25화] 당초 유현 또한 독립할 의지가 있었던 인물인 것으로 추측된다. 유현은 곧 업성과 양국의 거리가 먼 것을 이용해 왕을 칭한 뒤 염민의 영토 중 하나인 상산을 공격한다. 그러나 유현이 큰 인물은 아니었다. 염민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상산의 구원에 나서자 유현의 군대는 도망치기 바빴고 양국을 지키지도 못했다. 결국 『유현과 공경 1백여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양국 또한 초토화되었다. 염위 영흥 3년(352) 4월, 시기를 조율하던 모용준이 마침내 움직인다. 동생 모용각과 모용패에게 대군을 주어 염위를 비롯한 후조와 인근 군벌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염민은 잇따른 승리에 도취해 친히 영격에 나섰으나 모용각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염민의..
[위진남북조 시대] 사마예를 받아들인 강남 호족들, 그 이유는? 서진은 팔왕의난을 기점으로 국운이 서서히 몰락합니다. 그리고 사마씨 왕들 사이에 의심이 만연하게 퍼지죠. 팔왕의난 최종 승자는 동해왕 사마월이지만, 그도 결국 자신이 끌어들인 이민족의 손에 제거됩니다. 그 유명한 영가의난 당시에 말이죠. 강남으로 이주한 사마예는 황위 계승권에서도 멀고, 그도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영향력』이 없던 그를 주시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다만, 동해왕 사마월이 사마예를 의심해 끊임없이 속박하고 낭야 일대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감시했습니다. 그렇게 험난한 시기를 넘어 기어코 강남으로 이주하여 동진 건국자 동진 원제로 추앙받습니다. (결국 강남의 주인이 된 것은 낭야왕이 아닌, 낭야 왕씨 일..
성도왕 사마영 압박하는 동해왕 사마월, 업으로 끌려간 진혜제 [8화] 장사왕 사마예는 1백여의 선봉대를 이끌고 진혜제를 손안에 넣은 뒤 제왕 사마경을 공격했다. 제왕 사마경은 : "장사왕이 조서를 멋대로 고쳤다."장사왕 사마예는 : "대사마 제왕이 모반했다." 라고 서로를 모함하며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너무 많은 화살이 빗발쳐 어전으로도 유시가 들어왔고 몇몇 군신들은 화살에 맞아 쓰러지기까지 하였다. 이런 격렬한 사흘간의 전투 끝에 제왕 사마경은 휘하의 장사 조연에게 체포돼 궁 안으로 보내졌다. 혜제는 복위에 힘쓴 그를 살려주고자 했으나 사마예는 사마경을 죽이고야 만다. 이내 평화가 다시 찾아오려나 싶었으나 사소한 이유로 장사 이함이 사마예에게 죽임을 당하자 하간왕 사마옹은 성도왕 사마영과 반년만에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