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견과 그의 참모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저족을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저족 번세를 죽여 황제의 권위를 높이는 한편, 중앙 정부의 군사력 확충을 위한 일화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외에도 제후왕들의 작위를 공公으로 낮췄다. 그러나 백성에겐 따뜻했던 부견은 중농억상 정책으로 세금과 요역을 크게 감면하고 태학의 학생들을 격려했다. 호한분치에서 호한융합으로 가는 시발점이었다. 이는 큰 반발에 부딪혀 흉노 좌우현왕과 부생의 형제인 부류, 부쌍, 부유 등이 반란을 일으킨다. 부견은 이를 빠르게 제압하고 국외로 시야를 돌린다. 동진 환온의 북벌 당시 전연은 전진에게 땅을 떼어주는 조건으로 구원을 청했었다. 호뢰 이서의 땅, 그 땅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부견은 악덕 채무자에게 원금과 이자를 꼭 받아내려 했다...
위진남북조 시대 전진秦은 부씨符씨 황제들이 다스린 나라다. 전진의 특징은 건국에서 멸망까지 지나치게 참언에 휘둘리는 경향이 짙었다는 것이다. 부견의 조부 부홍의 성은 원래 포蒲씨로 "초부응왕草付應王"이란 참언에 따라 성을 바꿨다. 포홍은 하남에서 거병했으며, 부견의 백부 부건은 황시 2년(삼진왕을 칭하던 당시의 연호, 352) 황제를 칭했다. 부홍(부견 할아버지)은 이후 6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며, 세자 부건(부견 큰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했다. "중원은 너희 형제들이 능힘 점거할 곳이 아니다. 관중의 형세가 좋으니 내가 죽은 뒤 서쪽으로 진격해 이를 취하도록 하라!" 환온의 2차 북벌 이후 부건은 몰래 관중 일대를 공격해 동진의 장수 두홍과 장선을 격파하고 장안을 도성으로 삼았다. 이미 독립 상태나 ..
환온의 측근인 치초 일가 중 일부가 오두미도 도교를 신봉했던 것으로 추측되며, 훗날 손은의 난이 발생했을 때, 성문을 열고 손은을 받아들인 사씨 일가도 있었다. 이를 보면, 도교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파촉과 동진 일대에 넓게 퍼져있었다. 관련 일화를 하나 살펴보면, 동진 치초 일가 중 한 사람인 치음은 도교를 독실하게 믿었는데, 배탈이 오래 지속되자 우법개란 유명 의원을 찾아간다. "군후께서 앓고 있는 병은 바로 정진精進을 너무 지나치게 해서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탕약 한 제를 받아 마셨더니 곧바로 설사가 나왔고, 주먹 크기만 한 종이 뭉치가 몇 개 나왔는데, 이전에 삼켰던 도교 부적들이었다. 또, 지위가 높았던 왕헌지는 자신의 병이 위독해지자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훗날 사중랑 사만은..
갈족 살호령을 내린 염민, 위나라 세우고 후조 멸망시키다 [24화] 석민 등의 한족은 호인들은 이들이 나가봐야 자신들에게 도움이 안 되리라 판단하고 살호령을 내린다. 한족 장병들이 호인들을 도륙해 20여만 명이 목숨을 잃게 되었고, 업성 인근 지에서의 도륙까지 합치면 그 수는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또한 이전에 기주 일대로 강제로 이주당한 수백만의 호인들도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으나, 도중에 서로 약탈과 살육을 일삼으며 굶주림과 병으로 쓰러졌다. 고향으로 돌아간 자는 열에 두셋에 지나지 않았으며 들에는 시체가 가득하고 경작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이런 살호령에 격분해 여음왕 석곤이 태위 장거 등과 업성을 공격했으나 무예가 뛰어난 석민과 이농의 반격으로 패퇴하고 되려 대장 장하도 등을 잃..
후조 멸망 직전, 모용선비, 동진 환온 북벌, 석민 반란 [23화] 태녕 원년(349) 5월, 석호의 아들이자 정실 소생으론 둘째인 석준이 황위에 올랐다. 석준은 곧 석씨 일가를 요직에 배치하며 제후왕들을 위로한다. 유황후와 장시에게 살해당한 석빈의 아들 석연을 황태자로 삼고 석감을 시중, 석충을 태보, 석포를 대사마, 석곤을 대장군, 석민은 도독중외제군사로 임명했으며 자신이 보위에 오르도록 공을 세운 이농도 원래의 관직으로 복직시켰다. 당시 석준의 쿠데타에 반대하는 종실 제후왕들 또한 많았다. 계성의 패왕 석충은 5만의 정병으로 업성으로 진군했는데 업성에 다다르자 군세는 10만에 육박했다. 석준은 석충에게 친서를 보내며 형제의 우애를 역설하며 중병을 거느리는 것을 승인한다 했다. 석충은 형제의 의를 생..
후조 왕자의 난, 석수 석도 석세 석준, 흉노 유씨 후예 [22화] 후조 건무 14년(348) 9월, 하루는 석호가 석선이 마음에 안 들어 석도를 태자로 세우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다는 말을 했다. 이에 석도는 기뻐한 나머지 자신의 태위부에 선광전을 지으며 자축했다. 석선은 이 소식을 듣고 몰래 선광전을 둘러보던 중 선광전의 宣이 눈에 띄었다. 바로 자신의 이름이었다. 이에 선광전을 지은 장인들을 모조리 죽이고 선광전 마저 불살랐다. 얼마 후, 몰래 양배, 모성, 조생 등을 보내 동생 석도를 죽였다. 이들이 움직일 수 있었던 건 석선이 황제가 되면 석도의 봉지를 넘겨주겠다는 말을 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석호도 석선과 석도의 반목을 모르진 않았다. 석호는 이를 그냥 넘기려 했는지 눈에 띄는 후계자가 있으면..
후조 대조천왕 석호의 태자 문제, 고구려 공격, 장안 증축 [21화] 후조 건무 3년(337), 안정의 후자광이 스스로 불태자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장군 석광에게 제압당한다. 후자광은 대진국(로마)에서 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불교를 빙자하여 반란을 획책한 것은 특이하다 할 수 있겠다. 석호는 불교를 신봉하여 구자국 출신의 불도징을 크게 대우했는데 사공 이농에게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리게 했고 조회가 열리는 날에는 태자와 여러 공작이 불도징을 부축하여 전각에 오르게 하는 등 후조 전역에서 불교를 숭상하는 문화를 스스로 만들었다. 불도징은 이후 석호가 황태자 석수의 문제를 함께 논의하기도 했다. 같은 해, 석호는 대조천왕을 칭하며 석수를 황태자로 삼았다. 석수는 황태자에 책봉된 뒤 여인을 납치, 강..
후조 황제가 된 폭군 석호, 갈족 석씨 일가의 분열 [20화] 석륵이 마침내 유언을 남겼다. "...(중략) 중산왕 석호는 재삼 옛날 주나라 건국 공신 주공이 성왕을 보좌한 공을 생각도록 하고 이를 구실로 삼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석호는 석륵의 아들, 또는 조카로 기록되어 있는데 295년생 토끼띠의 석호는 274년생 말띠인 석륵과 21세 차이가 나기에 아들, 조카 모두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석륵이 태자를 314년생 개띠 석홍으로 삼은 것으로 보아 아들은 조카의 오기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서진 말기, 오랑캐들이 노비처럼 매매가 되었는데 이들에 대한 처우는 형편없었다. 석호도 어려서부터 호족 노비로 하북과 회하 일대를 전전했다. 어렸을 때 『개와 돼지』의 음식을 ..
갈족 석륵 조나라(후조) 건국, 남북조 시대 성군 등장 [18화] 이즈음, 진나라 유곤은 석륵의 모친과 조카 석호를 얻는다(저족이 하도 이곳저곳으로 분산되어 살다 보니 이 둘이 어찌어찌 그리하여 유곤의 손아귀에 붙잡힌 것으로 예측됨). 그리곤 이 둘을 송환하면서 장문의 서신을 보내 항복을 권했다. "장군은 예주와 연주를 석권한 뒤, 강회 일대를 횡행하고 한면(한수와 면수)을 위협하니 .... 유총을 배반하는 것은 화를 제거하는 것이고 진나라를 좇는 것은 복을 불러들이는 것이오." 당연히 석륵은 무시하고 갈피에서 큰 배를 건조해 장차 『건업을 도모』할 뜻을 비쳤다. 예전 조조가 그러했듯 석륵에게도 불운이 찾아온다. 회수 일대에서 석 달간 장대비가 연이어 내리면서 북방의 기후에 익숙한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