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 동호, 돌궐, 회홀回鹘(위구르), 글단, 여진, 말갈, 선비족, 강, 오환, 유연, 카작哈萨克(카자흐족) 등은 북방민족입니다. 학교에선 잘 가르치지 않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아래 지도를 통해 북방민족의 시대별 영역과 역사를 간단히 설명합니다. 상주시대商周(상나라와 주나라)에 흉노와 동호, 위치는 대략 아래와 같습니다. 이후, 북방민족 흉노는 세력이 커지며 동호를 압박합니다. 동호는 너무 불쌍해졌네요. 흉노는 세력이 커지자 교만해지며 선비족과 오환으로 분열됩니다. 이후 강력한 한나라 왕조가 등장하며 북방민족 흉노를 꾸준히 공격하여 마침내 성공합니다. 한나라의 흉노 분열 계획은 성공하여 남흉노와 북흉노로 분열되었는데, 요즘의 남한, 북한과 비슷합니다. 한나라는 흉노족 이간 계획을 멈추..
동진의 군사는 기세를 놓칠라, 빠른 속도로 전진의 군대를 추격했다. 동진은 곧 수양을 회복하고 전진의 회남태수도 포로로 잡는다. 그러나 전진의 전선이 꽤 길었기에 동진의 추격전도 그다지 오래가진 못했다. 후방의 전진 군대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기에 비수대전은 그걸로 끝이 난다. 부견은 모용수의 부대만이 진을 유지하며 퇴각했기에 그곳으로 몸을 의지했다. 배고픔과 화살에 맞은 통증 때문에 힘들었던 부견은 회수 부근에서 한 백성에게 밥과 돼지 넓적다리를 받자 비단 열 필과 솜 열 근을 하사하기도 했다. "폐하께서는 안락함에 싫증을 느끼셔서 스스로 위험과 곤경에 처하게 되셨습니다. 신은 폐하의 자식이고 폐하는 신의 아버지이시니 어찌 자식이 그 아버지를 봉양하고서 보답을 바랍니까!" 전진군의 전선이 길었고 선봉군이..
북조 통일왕조 전진, 세상을 떠나는 왕맹 전진 건원 6년 11월의 일이었으니 병사를 일으킨 지 고작 1년도 되지 않아 전연은 전진에 멸망했다. 전연을 멸망시킨 부견은 양주의 전량국 장천석에서 투항을 권했고 장천석은 번국을 칭한다. 이후 부견은 요장을 보내 양주를 함락시키고 장천석은 장안으로 끌려와 시중, 비부상서, 귀의후에 봉해진다. 이후 그는 비수대전에서 패배할 당시 동진에 투항하여 효무제에게 중용되었다. 그러나 부견에게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으니, 건원 11년(375), 왕맹이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직전 유소를 올렸다. "폐하는 공업이 쉽게 이뤄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응당 전전긍긍하며 여림심연如臨深淵(두려워하고 조심하고 삼가며, 깊은 못 가에 서 있는 듯, 얇은 얼음을 밟듯 하라..
부견과 그의 참모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저족을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저족 번세를 죽여 황제의 권위를 높이는 한편, 중앙 정부의 군사력 확충을 위한 일화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외에도 제후왕들의 작위를 공公으로 낮췄다. 그러나 백성에겐 따뜻했던 부견은 중농억상 정책으로 세금과 요역을 크게 감면하고 태학의 학생들을 격려했다. 호한분치에서 호한융합으로 가는 시발점이었다. 이는 큰 반발에 부딪혀 흉노 좌우현왕과 부생의 형제인 부류, 부쌍, 부유 등이 반란을 일으킨다. 부견은 이를 빠르게 제압하고 국외로 시야를 돌린다. 동진 환온의 북벌 당시 전연은 전진에게 땅을 떼어주는 조건으로 구원을 청했었다. 호뢰 이서의 땅, 그 땅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부견은 악덕 채무자에게 원금과 이자를 꼭 받아내려 했다...
강남 호족과 낭야 왕씨가 옹립한 사마예, 동진 왕도 [26화] 영흥 2년(305) 봄, 서진의 장군인 진민이 강남에서 할거할 뜻을 밝히며 강남 호족의 호응을 요구하자 중원에서 무시를 받던 오군의 명족 고씨顧 일가를 비롯한 대다수가 찬동한다. 그렇지만 진민은 정치력도 없고 서진 정부가 점차 역적과 함께한다며 의심을 하자 진민을 영가 원년(307)에 제거한다. 이후에도 강회의 장창, 광릉의 전회의 난 등을 제압한 당시 강남 호족들의 상호 협력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겐 상호 배타적이고 대립, 경쟁적인 성격이 강했기에 유유의 송나라 이후론 통합 세력으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자신들의 가문조차 지켜내지 못하게 된다. 영가 원년(307), 사마월은 사마예를 진동대장군, 도독, 양주 강주 호주..
염위 멸망, 선비족 모용준 연나라 건국, 강남의 사마예 [25화] 당초 유현 또한 독립할 의지가 있었던 인물인 것으로 추측된다. 유현은 곧 업성과 양국의 거리가 먼 것을 이용해 왕을 칭한 뒤 염민의 영토 중 하나인 상산을 공격한다. 그러나 유현이 큰 인물은 아니었다. 염민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상산의 구원에 나서자 유현의 군대는 도망치기 바빴고 양국을 지키지도 못했다. 결국 『유현과 공경 1백여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양국 또한 초토화되었다. 염위 영흥 3년(352) 4월, 시기를 조율하던 모용준이 마침내 움직인다. 동생 모용각과 모용패에게 대군을 주어 염위를 비롯한 후조와 인근 군벌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염민은 잇따른 승리에 도취해 친히 영격에 나섰으나 모용각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염민의..
후조 황제가 된 폭군 석호, 갈족 석씨 일가의 분열 [20화] 석륵이 마침내 유언을 남겼다. "...(중략) 중산왕 석호는 재삼 옛날 주나라 건국 공신 주공이 성왕을 보좌한 공을 생각도록 하고 이를 구실로 삼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석호는 석륵의 아들, 또는 조카로 기록되어 있는데 295년생 토끼띠의 석호는 274년생 말띠인 석륵과 21세 차이가 나기에 아들, 조카 모두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석륵이 태자를 314년생 개띠 석홍으로 삼은 것으로 보아 아들은 조카의 오기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서진 말기, 오랑캐들이 노비처럼 매매가 되었는데 이들에 대한 처우는 형편없었다. 석호도 어려서부터 호족 노비로 하북과 회하 일대를 전전했다. 어렸을 때 『개와 돼지』의 음식을 ..
황위를 노리는 석호, 세상을 떠난 석륵 장빈 [19화] 이후 대인배 석륵은 금군 소대장인 한족 풍저가 실수로 갈족을 갈호羯胡라 부른 것에 대해 익숙지 않으니 그럴 수도 있다며 넘어갔고, 참군 번원이 몇 년 전 갈족에게 도둑맞아 빈털터리가 됐다고 말하자 오히려 의복과 돈을 하사했다. 석륵이 노예 시절에 상당 지역에서 연못물을 놓고 『자주 다투었던 이양』이란 사람에겐 과거의 감정을 잊고 참군도위에 임명하는 등 동진의 조적과도 화친을 요청하며 국가 내부의 안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북조의 5호 16국 황제 중 드문 성군이었다. 이런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문맹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뛰어난 통찰력으로 문맹의 벽을 넘어섰다는 것을 증명할 일화도 있다. 한번은 한서 강독 시간에 유방의 참모 역..
사마륜의 짧은 집권기, 제왕 경, 성도왕 영, 하간왕 옹의 분열 [7화] 당시 황궁의 진혜제에게 진준이란 자가 고했다. "응당 사람을 시켜 백호번(싸움을 독려한다는 뜻)을 들고 밖으로 나가 싸움을 말려야 합니다." 상국부에 있던 태자좌솔 진휘의 형인 진준은 동생처럼 회남왕 사마윤을 지지하던 자였다. 당시엔 싸움을 말리는 추우번을 들고 가라 말했어야 했는데 우매한 진혜제는 이조차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진준은 일부러 거꾸로 말을 해 상국부를 포위한 사마윤의 군대에 힘을 보태려는 심산이었다. 사마도호 복윤은 곧 백호번을 들고 상국부로 향했다. 이때 사마륜의 아들 여음왕 사마건이 복윤에게 애원했다. "장차 부귀를 그대와 함께하겠소!" 복윤은 이 말을 믿고 사마윤에게 찾아가 황제의 조서를 받으라 명했다.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