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나라 수도 건강성은 함락되었다. 이미 진숙보는 백성과 신하들의 인망을 잃은 상태였다. 황궁으로 수나라 군대가 몰려오자 진숙보는 달아나려 했으나 이내 포기하고 포로로 잡힌다. 이전에 건강성 안으로 수나라 군대가 몰려오자 백관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상서복야 원헌만이 옆에 남았다. "내가 평소 경을 심히 박하게 대했는데 오늘 참으로 참괴할 뿐이오! 이는 내가 덕이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강동의 사대부들 역시 도가 다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오." "폐하는 의관을 단정히 한 후 어전에 앉아 양무제가 후경에게 했던 고사를 좇으십시오." 그리곤 경양전으로 달려가 장귀비와 공귀빈을 챙겨 우물 안에 숨는다. 그러나 이는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우물 안에 성인 남녀 3명이 들어간다는 자체가 비상식적인 ..
진숙보가 태자 시절 매부였던 공범은 시문경, 심객경 등과 재정 대권을 장악해 부정한 부를 쌓았고 마침내 진나라 군권까지 탈취한다. "밖에 주둔하고 있는 무장들은 모두 잡졸 출신입니다. 필부지용밖에 없는 이들에게 무슨 심모원려가 있겠습니까?" 진숙보는 바로 그에게 병권을 내줄 순 없었고 장수들의 사소한 실수를 빌미로 조금씩 그에게 병권을 나눠 주었다. 이외에 충직했던 중서통사사인 부재가 고구려 사자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거짓 참소를 받아들여 옥중에서 죽게 하고, 충심이 깃든 표문을 올린 장화를 죽이는 등 조금씩 나라의 힘을 갉아먹었다. 무너져내리는 왕국 진후주(진숙보) 지덕 원년(583), 양견의 얼굴이 기이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자를 수나라로 보내 그의 얼굴을 그려오게 했다. 진숙보는 양견의 모습을 보고..
진문제 천강 원년(566) 4월, 진나라 진문제가 사망하자 태자 진백종이 뒤를 이었으니 그가 진폐제이다. 진백종은 작은아버지 진욱을 표기대장군, 사도, 녹상서사, 도독중외제군사에 임명했다. 중서사인 유사지, 상서복야 도중거, 동궁통사사인 은불녕 등은 진욱의 권세가 지나치게 비대하다고 생각해 양주로 내보내길 권했다. 진욱은 임지로 떠날 준비를 했으나 모희가 그에게 떠나지 말 것을 권했다. 진욱은 애초에 모반의 뜻이 없었으나 진폐제의 막료들이 심태후를 속이면서까지 자신을 사사할 것을 청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진백종이 이를 허락하자 진욱은 유사지 등을 죽이며 조정을 장악한다. 진선제 진욱 즉위 (진후주 진숙보 아버지) 진폐제 광대 2년(568) 말, 진욱이 황태후의 명으로 진폐제를 내쫓고 자신이 보위에 오르니 ..
양나라 마지막 황제 양경제 소방지 양경제 소태 원년(555) 말, 왕승변의 잔여 세력인 두감과 왕승지가 거병해 북제의 군사를 이끌고 건강성 인근까지 다다르지만 양나라 진패선이 출격해 북제의 군사까지 대파하는 큰 승리를 거둔다. 그리고 조카 진현랑을 북제로 보내며 화친을 요구한다. 양경제 태평 원년(556) 4월, 북제의 소궤, 동방로, 임약이 10만 대군으로 공격에 나서지만 진패선의 대장 황업이 양산에서 대파하며 양군은 대치전에 이른다. 북제가 먼저 퇴각의 뜻을 갖고 소연명을 되돌려 줄 것을 요구하지만 건강을 나서던 도중 등창이 나서 죽는다. 누가 봐도 양나라 진패선이 손을 쓴 것임에 틀림없었다. 화가 난 북제군은 무호에서 출발해 건강으로 진격했지만 후안도의 군사가 북제의 의동삼사 걸복무로 등을 생포하는..
북주 외척 양견, 수나라 세우다 양견(수문제)이 정권을 장학한 581년 2월 13일, 양견은 외손자 정제(우문연)로부터 선양을 받아 수 왕조를 세운다. 정제(우문천)는 개공介으로 봉해졌지만 5월에 살해된다. 양견은 우문태의 자손 27명, 효민제의 아들 1명, 명제의 자손 7명, 효무의 자손 12명, 정제의 형제 2명, 기타 종족 12명을 살해하여 위진남북조 여느 왕조처럼 우문씨의 씨를 말렸다. (훗날, 양견의 다섯 아들도 일찌감치 사망한다. 뿌린 데로 거두는 법) 양견은 수나라 왕조를 개창한 뒤 유가 사상을 기반으로 조세와 법률을 정비한다. 구품관인법을 폐지하고 과거를 시작했는데 이미 귀족제 사회가 무너졌기에 중정관이 관리 후보자를 추천할 필요성이 없었다. 이후 수문제 개황 7년(587), 강릉의 괴뢰 ..
수나라 양견의 탄생 설화 서위 대통大統 7년(541) 6월, 풍상馮翔(섬서성 대려현)의 반야사般若寺에서 양견(수나라 문제, 수문제)이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절 주위에는 자색 기운이 감돌고 상서로운 구름이 뒤덮었다는 류의 진룡천자 전설이 전해진다. - 머리에 뿔이 자람 - 몸에 비늘이 있음 - 콧대가 정수리까지 통함 - 눈에서 빛이 남 - 손에는 문文자 손금 - 상체가 길고 하체가 짧음 - 표정엔 위엄, 말과 웃음에 구애받지 않음 아마도 생모 여씨呂氏의 출신이 비천했기에 이런 가공하고 포장한 전설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양견은 15세에 아버지의 후광을 받아 차기대장군에 임명되고 현공에 봉해졌다. 위진남북조 시대 북주 무제 이후로 두각을 나타냈던 양견은 마침내 장녀를 무제의 황태자비로 삼았다. 황태자는..
위진남북조 시대 말기. 북주가 북제를 멸망하기 직전, 이 당시 북방에선 유연이 멸망하고 돌궐이 부상했다. 위진남북조 시대 유연과 돌궐 서위 폐제 원년(552), 회황진 일대에서 유연이 돌궐의 공격을 받아 아나괴 가한이 자결하고 그 아들 암라진이 남은 백성들을 이끌고 북제로 도망간다. 또, 남은 백성들은 아나괴의 숙부인 등숙자(유연의 마지막 가한)를 왕으로 세운다. 비슷한 시기에 1대 돌궐 가한인 토문이 죽고 아들 과라가 뒤를 잇는다. 또, 그 뒤는 아들 사근이 잇는데 그가 목간가한이다. 사근은 바로 등숙자를 격파했고, 등숙자가 남은 백성들을 데리고 서위로 도망가자 유연은 마침내 멸망하게 된다. 돌궐의 존재는 북주와 북제에게 중요했다. 이전에 북주는 유연에 공주를 시집보내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었고, 이 ..
위진남북조 시대, 오랜 전란으로 전통 귀족들이 주살 또는 도륙을 당해 세가 약해졌으나, 부를 많이 축적한 이들의 권세는 오히려 강해졌다. 고위는 화사개 같은 은행들을 통해 자신도 많은 부를 축적했다. 또한, 고위는 목황후의 시비였던 풍소련을 총애해 항상 그녀와 함께 다니며 사치를 일삼았다. 후세의 사가들이 북제는 풍숙비 때문에 망했다는 말을 하는 이유다. 무평 2년(571), 고위의 어머니 호태후의 음란행위가 드러났다. 승려들을 총괄하던 사문통 담헌과 통정했던 것이었다. 고위는 처음 어머니의 이런 일탈 행위를 믿지 않았으며, 호태후 근처의 여장 비구니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이 발각되자 호태후 근처의 모든 사람을 죽이고 그녀를 고립시켰다. 두 명의 황후 무평 4년(573), 위진남북조 ..
북제 천보 3년(552), 4년(553), 5년(554)에 문선제 고양은 북으로 병사를 보내 유목민들을 공격하여 소와 양 등을 비롯해 수많은 백성을 포로로 잡는다. 천보 6년(555), 반격에 나선 유연을 물리치고 유주 북하구에서 시작해 총 9백여 리에 달하는 거대한 장성을 축조한다. 이후 고양은 공업을 자긍한 나머지 음란하고 포학한 짓을 행하기 시작했다. (위진남북조 시대 북위와 끊임없이 전쟁하던 그 유연이 맞음) 어리석은 황제 북제 문선제 고양 벌거벗은 채 사방을 돌아다니거나, 기혼 여부를 막론하고 눈에 띄는 여성을 강간하거나, 집단 음행을 구경하거나, 눈이 마주친 병사와 그 일족을 도륙하거나, 취하면 사람을 잔인하게 죽였다. 이후에도 술에 취하면 장모를 채찍으로 때리거나 전각 위에 올라가 위험한 놀..
조조는 생전에 칭제를 하지 않았다. 다만, 여러 차례 문서를 통해서만 아들(조비인지 누군지 하여간 누가 됐건)이 찬위할 여지는 남겨두었다. 5호 16국. 위진남북조 시대의 막바지에 동위를 지배한 고환도 조조와 마찬가지였다. 고환은 하급 소대장 출신으로 이주씨가 효무제 원수를 옹립하자 효정제 원선견을 옹립했었다. 동위 효정제 무정 2년(544), 고환이 아들 고징을 대장군, 영중서감, 섭이부상서에 임명했다. 고징은 옛 친구들이 자신에게 무례하거나 뇌물을 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 고환은 생전에 이런 말을 했었다. "공들은 되도록 내 아들을 피하도록 하시오." 고징은 고환 사후 지방의 군벌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되어 발상을 미뤘다. 실제로 하남에서 반란(후경)이 일어나자 한궤에게 명해 이를 토벌하고 ..
고환의 동위는 선비족과 한족 간의 갈등이 컸다. 선비족 고관들이 한족을 경멸했기 때문이다. 고환의 총애를 받던 고오조는 휘하의 선비족 장병들 속에 한인들이 섞여 있으면 고환에게 요청해 이들을 다른 부대로 이전시키는 등 당시 선비족 대장들의 상황을 대변하는 일화를 몇 가지 남겼다. 한번은 황하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여러 명이 물에 빠져 죽자, "한 푼의 가치도 없는 한인들은 죽게 놓아두어라!" 라는 말을 했다. 고환도 이를 타개하려 시도는 했지만, 동위가 멸망하는 순간까지도 이는 해결되지 않았다. "한인은 너희 노복이다. 남자는 너희를 위해 경작하고, 여자는 너희를 위해 옷을 만든다. 곡식과 비단을 세금으로 내 너희를 따뜻하게 먹이고 있다. 왜 그들을 업신여기는 것인가?" "선비족은 너희가 고용한 용병이다...
이하 글은 아래의 3개 자료에서 발췌. 1.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가와카쓰 요시오, 임대회 옮김2. 위진남북조사, 이공범3. 동북아역사재단총서, 중국 정사 외국전 우문宇文흉노를 조상으로 하며 특히 (우문태는) 남선우의 후예이다. 본래 음산陰山 지역에 거주하였다가 1세기경 요동 일대로 이주하면서 점차 선비화 되었고, 마침내 우문선비라 불리게 되었다. 이후 서위를 건설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고 북주의 지배집단을 형성하였다. 위진남북조 3세기 후반에 이주한 이들은 유목을 주업으로 하고 수렵, 농경, 약탈을 부업으로 삼아 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종족과 혼합하여 거주하게 되었는데, 구심력이 있는 정치체제를 갖춘 우문 집단은 이미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토착 종종인 선비족을 지배하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정..
위진남북조 중기 - 양원제 승성 2년(553) 10월, 왕승변은 건강, 진패선은 경구에 주둔케 했다. 승성 3년(554) 4월, 서위의 사자를 북제의 사자보다 홀대했다는 이유로 우문태가 11월에 출병을 명한다. 우근, 우문호, 양충 등이 한수를 넘어 강릉에서 40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황화에 이르렀다. 왕승변을 대도독으로 삼고 진패선에겐 양주로 군영을 옮기게 했다. 소역은 밤에 봉황각에 올라가 천문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객성(혜성처럼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별)이 형초의 영역으로 들어왔으니 우리가 필히 패하겠구나!" 강을 건너는 서위 군을 왕포, 호승우, 주매신, 사답인 등이 영격했지만 모두 패했다. 목책을 두고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 양나라 장수 호승우가 유시에 맞아 전사한다. 서위군은 여세를 몰아 목책..
후경으로 인해 양나라 많은 지역이 동위와 서위에 편입되었고 각지의 군웅들은 할거하여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았기에 황제가 된 소역(양원제)이 다스릴 수 있는 지역은 많지 않았다. 이보다 앞선 7달 전, 파촉의 친동생 무릉왕 소기가 스스로 칭제하여 세자 소원조를 황태자에 봉했고, 같은 해 8월엔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내려왔다. 태자 소원조는 처음에 후경에 소역이 패했다 거짓말을 해 아버지와 동으로 왔고, 서위가 철기 1만으로 병사가 거의 없는 성도를 포위하자 이번엔 강릉 일대를 함락시키자 제안한다. 그러나 병사들은 고향인 촉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말뿐인 포상만을 들어온 데다 군량마저도 떨어져 전투 능력을 거의 상실했다. 이에 소역에게 강화를 요청했으나 소역은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양원제 승성 2년(553)..
양나라 권력을 장악했던 후경은 자신도 연이어 패배하고 전선의 휘하 장수들의 패전 소식이 계속 전해오자 온종일 술을 마시며 간문제의 딸인 율양공주를 끌어안을 뿐이었다. 당시 율양공주와 왕위는 서로를 후경 앞에서 헐뜯었다. 사태가 불리하게 흐르자 왕위는 간문제를 제거하고 속히 보위에 오를 것을 권했다. "자고로 새 왕조가 들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폐립을 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위세를 보여 줄 수 있고, 양나라에 대한 백성들의 헛된 기대를 끊을 수 있습니다." 이즈음, 전투에서 패해 포로로 붙잡힌 안지추는 양나라 건강으로 끌려와 당시의 참상을 이렇게 술회했다. "포로가 되어 옛 땅 건강에 돌아와 보니, 이곳은 오랑캐 놈에 짓밟혀 있다. 선조의 사당을 보니 폐허가 된 수도를 마음 아파하는 옛 서리의 시가 ..
양무제 태청 원년(547) 9월, 양무제는 조카 정양후 소연명에게 15만의 대병을 주어 동위 토벌을 명한다. 소연명은 계책도 없고 황족임을 내세운 교만한 소인배였다. 처음 제장들의 반대에도 팽성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고, 원군으로 합류한 동위 모용소종의 기습이 벌어지자 작은 손해를 입곤 겁에 질려 서둘러 철군한다. 당시 모용소종은 양나라 곽봉의 진영을 급습했으나 실패했었다. 소연명은 예하 장수들이 잘 막아냈음에도 이것에 겁을 먹고 철군을 결정했었다. 이에 노련한 모용소종이 거짓으로 먼저 철군한다. 양나라 군대의 군율이 엄격하고 방비도 철저해 쉽게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내가 먼저 짐짓 퇴각하는 모습을 보여 적들이 쳐들어오도록 유인할 것이다. 너희는 기회를 보아 그들의 배후를 격살하라!"..
이젠 시선을 위진남북조 시대 남쪽으로 돌려보자.그곳엔 싯다르타 덕후 소연(= 양무제)이 다스리는 양나라가 있다. 당시, 위진남북조 시대의 남조인 양나라 황제와 신하들은 사치스러웠고,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승려가 되길 원했으며, 일반 백성들은 가혹한 세금과 굶주림에 시달렸다. 부유했던 강남의 사회가 거의 무너져 내렸다. 그럼에도 양무제는 무너져가는 남조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조정에서는 오히려 공덕을 쌓았다(부처에게 돈을 많이 바쳤으니 다 괜찮다~라는 의미). 조정에서 쓰는 것은 모두 정원에서 나온 식물이고 하나의 호박을 변화시켜 수십 종류로 만들었고 하나의 나물을 변화시켜 수십 가지의 맛을 내게 한 것이어서, 변화를 시켜서 많은 것을 만들었으니, 어떤 일에도 손해를 끼치지 않았다."..
옥벽지전(玉璧之戰)은 망산지전 이후 3년이 지난 546년. 동위 무정 4년(546), 서위 문제(원보거) 대통 12년(546)에 일어난다. 서위와 동위의 5차 회전으로 마지막 회전이기도 하다. 2월, 양주에서 우문중화가 토욕혼과 반란을 일으키지만 금세 제압된다. 이때 영천의 동위 후경이 형주로 진격하나 서위 조정은 이 역시 막아낸다. 10월, 동위와 서위의 마지막 회전이 벌어진다. 고환은 친히 10만 대군으로 분하 하류의 서위 요충지인 옥벽(지금의 산서 직현의 서쪽)을 겹겹이 포위한다. 서위의 장수 위효관에겐 고작 수천의 병사밖에 없었다. (위진남북조 시대 가장 처절했던 공성전) 고환은 서위의 분수 하류에 있는 주요 거점을 없애고자 밤낮으로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한편으로 성의 남쪽에 토산을 쌓고, 다시..
3차 하교지전(538) 이후 5년이 흐른 동위 효정제 무정 원년(543) 다시 전쟁의 불이 붙는다. 이것이 남북조 시대 유명한 망산지전이다. [주로 여기 참조] 전쟁의 원인은 고환의 아들 고징은 여색을 밝혀 고중밀(고오조의 형)의 처 이씨를 강간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비슷한 시기에 북예주 자사로 임명된 고중밀은 이같은 사실에 앙심을 품고 서위에 투항한다. 동위의 요충지 호뢰관이 서위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에 동위와 서위의 네 번째 회전이 벌어진다. ▶ 말썽꾸러기 고징훗날 남북조 시대 북제의 황제게 오르는 고징은 532년 효정제孝靜帝의 누이동생 풍익장공주馮翊長公主를 아내로 맞습니다. 고징은 14세 때 부친 고환이 총애하는 희첩 정대거와 간통했다가 부친에 의해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당시 사마자여가 중간에 ..
서위 우문태는 사원대첩 후, 사기가 올라서 적극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여, 일거에 하동의 포판과 낙양의 금용성을 확보했다. 기세를 몰아 우문귀가 영천까지 공격하여 의주, 양주, 예주, 광주, 형주 일대를 서위 영토로 만든다. (당시 동위는 효정제, 서위는 문제 시기) 동위 효정제 원상 원년(538), 동위 고환의 장수 후경이 낙양 금용성을 탈취한 뒤 약탈을 감행한다. (3차 회전 하교지전, 이 글을 주로 참고) 후경은 낙양 내외의 많은 민가와 관청을 불살랐다. 서위의 문제 원보거와 승상 우문태는 원래 낙양을 점령한 후 선제의 능원에 제사 지내고자 하였는데, 후경이 금용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는 우문태가 친히 대군을 이끌고 가서 지원했다. 전군이 곡성(谷城, 하남 신안현 동쪽)에 이르렀을 때, 고환의 동위 선봉..
위진남북조 시대 천평 4년(537), 동위 서위간에 사원지전이 폭발한다. (2차 회전 이 글을 주로 참고해 작성) 8월, 우문태는 이필, 독고신, 양어, 조귀, 우근, 약간혜, 이봉, 유량, 왕덕, 후막진숭, 이원과 달해무등 12명의 장수를 이끌고 동위로 진격한다. 병력이 동관에 이르렀을 때, 우문태는 병사들 앞에서 맹세하며 말한다. "이번 출병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폭란한 자를 주살하기 위한 것이다. 모두 여러 병사에게 달려 있다. 무기와 전마를 잘 정돈하여, 혈전에 대비하라. 재물을 탐하거나 적을 경시하거나, 흉포하게 행동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명령을 따르는 자에게는 상을 내리고, 명령을 어기는 자는 죽일 것이다!" 바로 우근을 동정선봉으로 삼아, 그날로 반두(盤豆, 지금의 허남성 양평의 서북)..
(하음의 변) 당시 효장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줄 몰랐으나 형인 원소와 동생 원자정이 병사들에게 끌려가 토막 나 살해되는 모습은 목격했다. 이에 효장제는 이주영에게 찬위할 생각이 있으면 그리하라 이른다. 이주영 휘하의 장수들은 이에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제왕의 흥망과 성쇠는 무상한 법이오. 만일 천명이 장군에게 돌아간다면 장군은 응당 때에 맞춰 존호를 받아야 할 것이오." 휘하의 고환이 칭제할 것을 권했으나 거부한다. 위나라 신하 이주영얼마 후 이주영은 본인이 저지른 짓이 너무나도 흉포하다는 것을 깨닫고 환궁한 이후 효장제를 향해 머리를 거듭 조아리며 벌을 줄 것을 요청했으나 효장제는 그리할 수 없었다. 당시 왕공 대신을 도륙하자 낙양의 백성들은 두려운 나머지 급히 도성을 빠져나갔다. 성내 인구는 1..
남북조 시대 당시 6진 수용군 이주영은 영리했다. 반란군에 대해, 때로는 동조하거나 때로는 이들을 제압하면서 점차 자신의 힘을 키워나갔다. 하루는 사주를 지나던 중 자사 울경빈이 성문을 열고 영접하지 않자 성을 함몰시킨 뒤 스스로 자사를 배치했다. 북위 조정은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았는데,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영태후 제압한 이주영시간이 지날수록 북위 곳곳에서 반란이 심화하였다. 흉포한 영태후가 북위를 망치고 있던 것이었다. 수용군의 이주영은 틈을 타 세를 확장하기 위해 반군 진압에 나서겠다 여러 차례 요청했으나 매번 거절당했다. 이주영의 세력이 부담스러웠던 영태후는 군 내부의 분열을 일으키기 위해 이주영 휘하의 군신에게 녹봉을 내리려 했으나 이주영은 이를 간파하고 큰 원한을 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