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희 13년(417) 2월, 유유가 팽성을 출발했다. 왕진악과 단도제 등은 이미 동관에서 후진의 수비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후진은 전황이 끊임없이 불리해지자 북위에 원군을 요청한다. 당시 북위 조정에선 반대 여론이 강했고, 대신 최호도 이같이 말했다. "요흥은 이미 죽었고, 요홍은 나약합니다. 지금 유연柔然이 북쪽 변경을 노략질하고 있습니다. 유유와 싸우게 되면 남북으로 적을 맞이하는 셈이 됩니다. 유유의 청을 받아들여 저들을 서쪽으로 보낸 뒤 군사들을 요소에 배치해 동쪽을 지키면 됩니다. 만일 유유가 승리하면 우리가 길을 빌려준 것에 고마워할 것이고, 만일 패하면 저들이 철군할 때 공격을 가함으로써 요씨의 진나라를 도와줬다는 명분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북위 원제는 이를 듣지 않고 원군을 보냈다. 처음..
동진 유유의 북벌이 시작되었다. 목표는 남연. 남연 황제 모용초는 관문을 지키고 후방을 교란해 보급을 끊자는 의견보단, 대현관으로 들어오게 한 후 정병을 보내 싸우도록 명하는 패착을 저지른다. 유유의 예상과 딱 맞아 떨어진 것이다. "저들 선비족은 탐람한 까닭에 멀리 내다보는 계략이 없다." 남조 유유가 남연의 수도 인근 대현관에 다다를 때까지 남연의 병사는 한 명도 없었다. 위진남북조 시대 영웅 유유모용초는 단휘와 하뢰로에게 5만 보병으로 임구성을 지키게 하고 곧, 자신도 병사 4만을 이끌고 임구로 간다. 유유는 병거 4천 대로 장벽을 만들어 남연의 기병을 무력화시키고 3천의 병사가 지키는 임구성을 급습해 함락시킨다. 동진의 단휘는 추격전을 펼쳐 남연의 장수 10여 명을 벤다. 다음 날에도 광고의 외성..
후연, 후진 북방 상황후연이 창건될 당시 하동에선 모용홍이 서연을 세웠으나 16국에는 포함되지 못할 정도로 세력이 미약했다. 고작 2년 동안 보위가 7번이나 바뀌면서 최종적으론 모용외의 동생인 모용운의 손자 모용영이 황제가 되었다. 처음엔 후연의 번국을 자청했지만 386년 장자에서 황제를 선포했다. 중흥 8년(393), 남북조시대 영웅 모용수의 공격에 장자가 함락되며 모용영은 목이 베였다. 모용수의 뒤를 이은 모용보는 모용덕(전연의 황제 모용황의 막내아들이자 후연 모용수의 동생)에게 기, 연, 청, 서, 형, 예주 6개의 군사를 총괄케 했다. 당시 북위는 이제 막 건국된 신생 국가였지만 훗날 도무제로 추존되는 탁발규의 대군은 기세가 등등했다. 북중국의 최강자인 후연을 공격해 황제 모용보를 압박했고, 이내..
처음, 동진 무너뜨리고 황제가 된 환현(환온의 막내 아들, 환초 황제)은 제위에 올랐다. 그리고 황제 환현은 변범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옛날 양부는 언제나 내가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되도록 말렸었어. 이제 심복인 양부를 잃었고, 색원도 잃었다고. 그러니 무모하게 이런 당돌한 일을 함에 있어 하늘의 뜻을 헤아릴 필요가 있겠는가?" 아마도 남조에서 환현을 따르는 무리에서도 환현의 동진 황위 찬위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범상치 않은 ㅠㅠ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애초 그는 환현이 환온의 아들이기에 높은 직책에 오르는 것엔 찬성했지만 마침내 황제의 자리까지 빼앗자 두고 볼 수가 없었다. 환현도 그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았었다. 이제 갓 황제가 된..
위진남북조를 가로지르는 비수대전 승리 이후, 동진은 이 기회를 틈타 양양, 익주, 양주 등지를 수복한다. 하지만, 중원 수복 의지는 약해 회수와 관중 일대의 요충지는 얼마 안 가 다시 잃는다. 전진 멸망의 원인은 비수대전 패배이다. 국력이 크게 손상된 것은 아님에도 부견의 무리한 융화 정책이 불러온 부작용으로 볼 수 있다. 강제적으로 살던 곳을 떠나 중원의 낯선 곳으로 이주한 이민족들의 고충을 부견은 이해했을까?황실과 가까운 저족들은 국가의 중심부가 아닌 변방으로 나간 것에 만족했을까? 부견은 꿈만 좇았지 현실적인 감각이 매우 떨어지던 인물로 보인다. "왕맹 같은 시어머니"가 곁에 없는 "뜬구름 잡기 대마왕 부견"의 패망은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큰일을 치룬 위진남북조 시대 동진 효무제 사마요는..
중국 전진 불안 요소부씨 일족의 저족은 봉건제의 여파로 전진의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었으나 중원엔 선비, 흉노, 강, 저 등이 섞여 살고 있었다. 겉으론 부강한 국가였으나 내부적으론 결코 안정적이라 볼 수 없는 불안 요소가 너무나도 뚜렷했다. "내가 대업을 이은 지 30년. 사방은 대략 평정되었으나 오직 동남 한구석만은 아직 왕화를 입히지 못하고 있었다." 이전에 부견은모용수 - 관군장군, 경조윤전연 마지막 황제 모용위 - 신흥후모용위 동생 모용충 - 평양태수구지 양통 - 평원장군, 남진주자사전량 장천석 - 귀의후강족 요장 - 양무장군에 임명했었다. 비수대전 이후 중국 전진이 빠르게 해체된 이유다. 결국 부견은 왕맹의 간언과는 정반대의 행위를 벌인 것이다. 매우 위험하고 누구나가 우려할만한 조치였다. 중..
이전에, 전연의 황제 모용위는 모용수에게 영격을 맡기는 한편, 전진 부견에 호뢰 이서의 땅을 베어주는 조건으로 원군을 요청했다. 전진의 대다수 중신이 반대하는 와중에 왕맹만은 원군 파병을 부견에게 강력히 주장한다. "전연(연나라)이 비록 강하다고는 하나 환온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 환온이 패주한 후 전연(연나라)의 원기가 크게 상해 있을 때 기회를 틈타 연나라를 도모할 만합니다." 전진 황제 부견은 이를 받아들여 2만 병사로 전연과 모용수의 군대를 돕는다. 당시 환온은 우물쭈물하며 사태를 관망했는데 그는 북벌을 나왔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 계속 동진 조정의 내부 동태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황위를 찬탈할 생각에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사령관이 이러니 동진의 북벌군이 제대로 ..
한편, 평양까지 도주한 요양은 관중을 얻기 위해 부견과 싸우나 이내 패하고 포로가 된 뒤 살해된다. 요양의 동생 요장이 남은 병력을 추스른 뒤 부견에게 항복하니, 당시로선 "그 날, 그런 일이 벌어질 줄" 예상이나 했을까. (위진남북조 시대에 큰 사건) (출처 : 위진남북조, 오호(五胡)의 쟁패 20 - Exodus) 목제 승평 5년(361), 5월 환온은 동생 환활에게 허창을 치게 하여 전연의 대장 모용진을 몰아내고 함락시킨다. 6월에 목제 사마담이 병사했으나 후사가 없어 성제 사마연의 장자 낭야왕 사마비가 보위를 이으니 그가 애제이다. 애제 흥년 원년(363), 전연의 군사가 낙양을 공격하자 환온은 구원병을 보내는 한편 낙양 천도를 주장하는 상주문을 올린다. 중원의 옛 영토 회복과 강남의 재산을 포기..
환온은 파촉의 성한 평정의 공으로 정서대장군, 개부, 임하군공에 봉해졌다. 촉을 평정하자 환온의 위명이 천하를 진동시켰고 조정을 장악하던 회계왕 사마욱은 환온을 견제하기 위해 양주자사 은호를 심복으로 삼아 조정 대사에 참여시킨다. 이런 조치로 동진 조정은 환온의 지지파와 반대파로 갈리게 된다. 이런 일은 이후 벌어질 환온과 은호의 북벌, 양쪽 모두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특히 은호의 강족 불신은 동진 북벌 군대에 악영향을 미친다. 동진 목제 영화 5년(349), 동진으로선 북벌하기 좋은 시기였다. 후조의 석호가 병사하며 석씨 종친 간 내분이 일어나자, 환온이 북벌의 상주문을 올렸다. 그러나 사마욱을 위시한 동진 조정은 환온이 더 많은 공을 세우는 게 탐탁지 않았다. 환온 대신 저태후의 부친인 저부에..
환온의 측근인 치초 일가 중 일부가 오두미도 도교를 신봉했던 것으로 추측되며, 훗날 손은의 난이 발생했을 때, 성문을 열고 손은을 받아들인 사씨 일가도 있었다. 이를 보면, 도교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파촉과 동진 일대에 넓게 퍼져있었다. 관련 일화를 하나 살펴보면, 동진 치초 일가 중 한 사람인 치음은 도교를 독실하게 믿었는데, 배탈이 오래 지속되자 우법개란 유명 의원을 찾아간다. "군후께서 앓고 있는 병은 바로 정진精進을 너무 지나치게 해서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탕약 한 제를 받아 마셨더니 곧바로 설사가 나왔고, 주먹 크기만 한 종이 뭉치가 몇 개 나왔는데, 이전에 삼켰던 도교 부적들이었다. 또, 지위가 높았던 왕헌지는 자신의 병이 위독해지자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훗날 사중랑 사만은..
조약의난 종결, 동진 군벌 해체, 위진남북조 성한 [32화] 10월 중엔 왕도가 변심한 소준의 심복 노영의 안내로 유량이 주둔하고 있는 백석으로 달아나는 등 전황은 소준에게 불리해지는 듯 보였다. 그렇지만 실전 경험이 풍부한 소준의 병사들은 동진의 군대에 계속 승리를 거뒀다. 당시 온교는 군량이 떨어져 도간에게 빌리기도 하는 등 전황은 되려 포위한 쪽이 수비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소준은 계속된 승리에 고무되어 건강 주변의 포위군 영채를 공격했다. 온교와 도간 등은 보병전에 익숙지 않으니 석두성을 치는 것이 좋겠다 판단하여 보병 1만여 명을 이끌고 높은 곳으로 올라 진을 펼쳤으나 소준의 아들 소석과 용장 광효의 수십 기에 대패했다. 수십 기가 1만여 명의 보병을 낮은 곳에서 위로 향하며 격파한 것이다. 큰..
사마소 - 황제의 반란, 권력 찬탈자 왕돈을 내쫓는 동진 [29화] 훗날(왕돈이 사마소 황제에게 패망하던 날), 왕함(왕함의 아들이 왕돈의 장남으로 입양)은 왕빈과의 사이가 틀어졌다는 것으로 생각해 왕빈에게 의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빈은 이런 일화에도 불구하고 그를 받아들이려 했었다. 같은 해 말, 반란에 성공했던 왕돈은 대군을 이끌고 무창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원격으로 조정을 제어한다. 비록 동진 조정은 제압했지만, 지방 군벌은 확실히 제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약은 왕돈이 조정을 뜯어고친다는 소식을 듣고 왕돈의 사자에게 거친 목소리로 말한 적이 있다. "너는 아흑阿黑(왕돈의 어렸을 때 자字)에게 말하라. 어디서 감히 불손한 짓을!서둘러 군대를 수습하여 돌아가라!즉시로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3..
동진 왕돈 반란 성공, 허수아비 황제 사마예 [28화] 진원제 대흥 4년(321), 사마승을 상주자사로 삼았다. 대연에겐 사주, 연주, 예주, 병주, 옹주, 기주 6개 주의 군사를 총괄케 했고,유외는 진북장군 겸 청주, 서주, 유주, 평주의 군사를 총괄케 했다. 동진 원제는 후조의 석륵을 서와 북에서 막는다는 취지로 임명했으나, 실질적으론 왕돈 반란을 미리 방비하려 한 것이다. 진원제 영창 원년(326), 왕돈이 마침내 유외를 주살한다는 명목으로 건강을 향해 진군한다. 왕돈은 상주자사 사마승을 설복시키려 했으나 실패했고, 비슷한 시기 사마예는 유외와 대연에게 건강을 지킬 것을 명한다. 당시 건강의 대신들은 왕돈이 결코 그럴 리 없다고들 말했다. 그러나 주의 등은 그가 반란을 일으킬 인물이라며 조정의 대책..
왕씨와 사마씨가 천하를 공유한다. 사마예 동진 건국 [27화] 이 직전에 『진민제는 한나라(흉노 유연이 세운 국가)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해 장안 함락 전 사마예에게 이런 친서를 보낸다. "짐은 지금 궁지에 몰려 성에 유폐돼 온갖 걱정이 든다. 만일 하루아침에 붕괴하는 날이면 승상이 가히 만기를 통섭해 낙양을 되찾고 종묘를 수복함으로써 이 치욕을 설욕하기 바란다." 사마예는 사마업이 포로로 잡히자 보위에 오르진 않았지만 진민제 건흥 6년(317)에 진민제가 피살되자 유곤, 단필제, 단진, 소속 등의 상표로 보위에 올랐다. 사마예가 동진의 창업주 진원제元帝이다. 동진 건국 이전에 이미 왕씨들이 강남의 주요 요직을 차지한 상태였다. 왕돈은 호북, 호남을 비롯한 양자강 중류, 왕도는 양자강 하류를 ..
염위 멸망, 선비족 모용준 연나라 건국, 강남의 사마예 [25화] 당초 유현 또한 독립할 의지가 있었던 인물인 것으로 추측된다. 유현은 곧 업성과 양국의 거리가 먼 것을 이용해 왕을 칭한 뒤 염민의 영토 중 하나인 상산을 공격한다. 그러나 유현이 큰 인물은 아니었다. 염민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상산의 구원에 나서자 유현의 군대는 도망치기 바빴고 양국을 지키지도 못했다. 결국 『유현과 공경 1백여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양국 또한 초토화되었다. 염위 영흥 3년(352) 4월, 시기를 조율하던 모용준이 마침내 움직인다. 동생 모용각과 모용패에게 대군을 주어 염위를 비롯한 후조와 인근 군벌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염민은 잇따른 승리에 도취해 친히 영격에 나섰으나 모용각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염민의..
중국 황제 동진 사마덕종 소개, 유유 장군의 꼭두각시였던 인물 중국황제 중 한 명인 동진 안제 사마덕종은 382년 출생하여 419년 1월 28일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했습니다. 자는 안덕安德이며, 동진 14대 황제로 397년에서 419년까지 제위에 있었습니다. 사마덕종은 효무제孝武帝 사마요司马曜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진귀녀陈归女(후에 위덕황태후为德皇太后로 봉해짐)이며, 387년 9월 16일 태자로 책봉됩니다. 397년 11월 6일 효무제가 사망하자 보위에 올랐고, 왕희지王羲之의 손녀 왕신수王神爱를 황후로 책봉합니다. 사마덕종이 보위에 올랐을 무렵, 동진 황제의 권위는 이미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변방의 장수들은 사실상 자립하여 조정의 명을 듣지 않았고, 중앙 권력도 조정 대신들의 손에 넘어가 있었..
위진남북조01. 진무제 사마염 사치향락, 백치 사마충 (서진 쇠퇴) 중국의 역대 통일 왕조 중 최악으로 평가받는 위진남북조 진나라晉의 창업자 진무제 사마염은 자신의 나라를 망치는 데 일조한다. 천하 통일 이후에 권문세가의 사치 풍조를 막기는커녕, 자신도 그 속으로 몸을 담갔다. 후궁의 수가 만 명을 넘어섰으니 서진은 통일과 함께 멸망의 징조가 드러난 셈이다. (진나라, 서진과 오나라, 삼국시대 말기) 위진남북조 시대, 서진의 은사隱士 노포魯褒의 전신론錢神論에서, "돈이야말로 신이다" 유송 시절의 유의경이 지은 세설신어에는 태치汰侈 편이 존재한다. 때찌,, 때찌 때찌 해줄 만한 낭비와 사치에 대한 내용인데 주인공은 무제의 외숙 왕개, 창업 공신 석포의 아들 석숭, 오나라 토벌에 공을 세운 왕혼의 아들로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