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민족 지도 1] 선비족 셋으로 나뉘다 (한나라~5호16국~위진남북조 초기) 흉노, 동호, 돌궐, 회홀回鹘(위구르), 글단, 여진, 말갈, 선비족, 강, 오환, 유연, 카작哈萨克(카자흐족) 등은 북방민족입니다. 학교에선 잘 가르치지 않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아래 지도를 통해 북방민족의 시대별 영역과 역사를 간단히 설명합니다. 상주시대商周(상나라와 주나라)에 흉노와 동호, 위치는 대략 아래와 같습니다. 이후, 북방민족 흉노는 세력이 커지며 동호를 압박합니다. 동호는 너무 불쌍해졌네요. 흉노는 세력이 커지자 교만해지며 선비족과 오환으로 분열됩니다. 이후 강력한 한나라 왕조가 등장하며 북방민족 흉노를 꾸준히 공격하여 마침내 성공합니다. 한나라의 흉노 분열 계획은 성공하여 남흉노와 북흉노로 ..
조조는 생전에 칭제를 하지 않았다. 다만, 여러 차례 문서를 통해서만 아들(조비인지 누군지 하여간 누가 됐건)이 찬위할 여지는 남겨두었다. 5호 16국. 위진남북조 시대의 막바지에 동위를 지배한 고환도 조조와 마찬가지였다. 고환은 하급 소대장 출신으로 이주씨가 효무제 원수를 옹립하자 효정제 원선견을 옹립했었다. 동위 효정제 무정 2년(544), 고환이 아들 고징을 대장군, 영중서감, 섭이부상서에 임명했다. 고징은 옛 친구들이 자신에게 무례하거나 뇌물을 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 고환은 생전에 이런 말을 했었다. "공들은 되도록 내 아들을 피하도록 하시오." 고징은 고환 사후 지방의 군벌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되어 발상을 미뤘다. 실제로 하남에서 반란(후경)이 일어나자 한궤에게 명해 이를 토벌하고 ..
고환의 동위는 선비족과 한족 간의 갈등이 컸다. 선비족 고관들이 한족을 경멸했기 때문이다. 고환의 총애를 받던 고오조는 휘하의 선비족 장병들 속에 한인들이 섞여 있으면 고환에게 요청해 이들을 다른 부대로 이전시키는 등 당시 선비족 대장들의 상황을 대변하는 일화를 몇 가지 남겼다. 한번은 황하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여러 명이 물에 빠져 죽자, "한 푼의 가치도 없는 한인들은 죽게 놓아두어라!" 라는 말을 했다. 고환도 이를 타개하려 시도는 했지만, 동위가 멸망하는 순간까지도 이는 해결되지 않았다. "한인은 너희 노복이다. 남자는 너희를 위해 경작하고, 여자는 너희를 위해 옷을 만든다. 곡식과 비단을 세금으로 내 너희를 따뜻하게 먹이고 있다. 왜 그들을 업신여기는 것인가?" "선비족은 너희가 고용한 용병이다...
이하 글은 아래의 3개 자료에서 발췌. 1.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가와카쓰 요시오, 임대회 옮김2. 위진남북조사, 이공범3. 동북아역사재단총서, 중국 정사 외국전 우문宇文흉노를 조상으로 하며 특히 (우문태는) 남선우의 후예이다. 본래 음산陰山 지역에 거주하였다가 1세기경 요동 일대로 이주하면서 점차 선비화 되었고, 마침내 우문선비라 불리게 되었다. 이후 서위를 건설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고 북주의 지배집단을 형성하였다. 위진남북조 3세기 후반에 이주한 이들은 유목을 주업으로 하고 수렵, 농경, 약탈을 부업으로 삼아 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종족과 혼합하여 거주하게 되었는데, 구심력이 있는 정치체제를 갖춘 우문 집단은 이미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토착 종종인 선비족을 지배하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정..
삼오의 범위와 지역에 대해서 통전과 수경주가 말하는 곳은 다르다. (삼국지 오나라 손권과 위진남북조 시대 남조의 중심부) 통전 : 단양丹陽, 오흥吳興, 오군吳郡 수경주 : 오흥, 오, 회계군會稽 이렇게 일정하지 않으나 이른바 장강 삼각주지대, 당시의 행정구획으로는 양주 일부와 남서주가 해당하는 지역이다. 삼국지 오나라 손권이 기반을 잡았을 때, 개발이 더딘 지역이기도 하다. 삼오지방 지세의 특징은 저해발(2m~5m)의 대평원이 펼쳐져 있으며 이것은 주로 장강, 전당강錢塘江의 충적작용으로 형성된 것이다. 태호太湖를 중심으로 북, 동, 남의 세 지역 즉 육조시대(위진남북조 시대 남조의 역사)의 오군, 진릉군, 오흥군, 동부는 평탄하고도 저해발의 대평원 지대이며 태호의 배수로인 누累, 오송吳淞, 황포黃浦의 여..
후경으로 인해 양나라 많은 지역이 동위와 서위에 편입되었고 각지의 군웅들은 할거하여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았기에 황제가 된 소역(양원제)이 다스릴 수 있는 지역은 많지 않았다. 이보다 앞선 7달 전, 파촉의 친동생 무릉왕 소기가 스스로 칭제하여 세자 소원조를 황태자에 봉했고, 같은 해 8월엔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내려왔다. 태자 소원조는 처음에 후경에 소역이 패했다 거짓말을 해 아버지와 동으로 왔고, 서위가 철기 1만으로 병사가 거의 없는 성도를 포위하자 이번엔 강릉 일대를 함락시키자 제안한다. 그러나 병사들은 고향인 촉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말뿐인 포상만을 들어온 데다 군량마저도 떨어져 전투 능력을 거의 상실했다. 이에 소역에게 강화를 요청했으나 소역은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양원제 승성 2년(553)..
후경의난으로 어지러운 위진남북조 시대 549년. 당대 역사가인 하지원何之元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양나라의 인민은 대부분 병사가 되어 농업을 버리고 병사로 생활하고 있었다. 그들은 장관의 부하가 되어 악행을 저지르며 죄 없는 민중을 잡아들이고 선량한 사람들을 압박했다. 그로 인하여 인민은 유망하였고 도적은 더욱 횡행했다. 이런 상태가 몇 년이나 계속되었고 국가는 심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양나라는 한漢의 1군郡 보다도 적으나 태반의 사람이 부곡이 되어 경작하지 아니하면서 먹고, 누에를 치지 아니하면서 옷을 입고 혹자는 왕후를 섬기고 장수에 기대어 처자를 거느리고 동서로 따라다니면서 백성들의 것을 빼앗고 양민을 해치는 악당이 되어 죄 없는 사람을 잡아 묶고 어진 사람을 핍박하니 백성들은 유..
양무제 태청 원년(547) 9월, 양무제는 조카 정양후 소연명에게 15만의 대병을 주어 동위 토벌을 명한다. 소연명은 계책도 없고 황족임을 내세운 교만한 소인배였다. 처음 제장들의 반대에도 팽성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고, 원군으로 합류한 동위 모용소종의 기습이 벌어지자 작은 손해를 입곤 겁에 질려 서둘러 철군한다. 당시 모용소종은 양나라 곽봉의 진영을 급습했으나 실패했었다. 소연명은 예하 장수들이 잘 막아냈음에도 이것에 겁을 먹고 철군을 결정했었다. 이에 노련한 모용소종이 거짓으로 먼저 철군한다. 양나라 군대의 군율이 엄격하고 방비도 철저해 쉽게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내가 먼저 짐짓 퇴각하는 모습을 보여 적들이 쳐들어오도록 유인할 것이다. 너희는 기회를 보아 그들의 배후를 격살하라!"..
이젠 시선을 위진남북조 시대 남쪽으로 돌려보자.그곳엔 싯다르타 덕후 소연(= 양무제)이 다스리는 양나라가 있다. 당시, 위진남북조 시대의 남조인 양나라 황제와 신하들은 사치스러웠고,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승려가 되길 원했으며, 일반 백성들은 가혹한 세금과 굶주림에 시달렸다. 부유했던 강남의 사회가 거의 무너져 내렸다. 그럼에도 양무제는 무너져가는 남조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조정에서는 오히려 공덕을 쌓았다(부처에게 돈을 많이 바쳤으니 다 괜찮다~라는 의미). 조정에서 쓰는 것은 모두 정원에서 나온 식물이고 하나의 호박을 변화시켜 수십 종류로 만들었고 하나의 나물을 변화시켜 수십 가지의 맛을 내게 한 것이어서, 변화를 시켜서 많은 것을 만들었으니, 어떤 일에도 손해를 끼치지 않았다."..
옥벽지전(玉璧之戰)은 망산지전 이후 3년이 지난 546년. 동위 무정 4년(546), 서위 문제(원보거) 대통 12년(546)에 일어난다. 서위와 동위의 5차 회전으로 마지막 회전이기도 하다. 2월, 양주에서 우문중화가 토욕혼과 반란을 일으키지만 금세 제압된다. 이때 영천의 동위 후경이 형주로 진격하나 서위 조정은 이 역시 막아낸다. 10월, 동위와 서위의 마지막 회전이 벌어진다. 고환은 친히 10만 대군으로 분하 하류의 서위 요충지인 옥벽(지금의 산서 직현의 서쪽)을 겹겹이 포위한다. 서위의 장수 위효관에겐 고작 수천의 병사밖에 없었다. (위진남북조 시대 가장 처절했던 공성전) 고환은 서위의 분수 하류에 있는 주요 거점을 없애고자 밤낮으로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한편으로 성의 남쪽에 토산을 쌓고, 다시..
영희 3년(534) 7월, 북위 효무제가 10만 병사로 위진남북조 시대 남조 양나라를 치겠다며 병사를 일으켰지만, 이는 북쪽의 고환을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고환은 22만 병사를 다섯 갈래로 나눠 효무제의 친정을 돕겠다고 했으나 이는 효무제와 대적하겠다는 의미였다. 효무제가 친히 10만의 군사로 진양의 고환 공격을 개시한다. 이전에 효무제는 관서의 군벌인 우문태를 상서좌복야에 임명하며 공주를 보내 처로 삼게 했다. 믿을 만한 보험을 하나 둔 것이다. 그러나 효무제나 주변 대신들은 소인배에 불과했다. 곡사춘이 급히 내려오느라 피로한 고환의 군사를 기습하려 했으나 황문시랑 양관이 이를 막았다. "곡사춘이 도하 한 후 기습에 성공해 고환을 토벌할지라도 이는 또 하나의 고환을 만드는 것입니다."우매한 효무제가 이..
(75화는 74화 상세 설명에 해당합니다)유연 남침과 6진의 난북위 효명제 정광 4년(523), 유연이 남침한다. 회황의 군민들은 양식이 없어 굶게 되자 도리어 위나라 관료들을 죽이며 반란을 일으킨다. 위진남북조 시대, 북위 조정도 어쩔 수 없이 공격을 감행한 유연과 함께 이들을 제압해 버린다. 그리곤 포로가 된 20만의 군민을 하북으로 이주시켰지만 두락주, 선우수례, 갈영 등이 반란을 일으키며 하북 일대는 아수라장이 돼버린다. 기후가 좋지 않은 척박한 땅에 천대와 멸시를 받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포로의 신분으로 이주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당시 유연도 내분으로 일족 일부가 북위로 망명한 상황이었기에 저런 일이 가능했었습니다) 이들을 제압한 것이 이주영이고 제압한 공로로 위대장(친위도독)에 임명되었..
북위 절민제 즉위석 달 후, 건명 2년(531), 이주씨 일족은 광릉왕 원공을 새로 옹립하니 그가 위진남북조 시대 절민제이다.이주천광은 관우, 이주조는 병주와 분주, 이주중원은 서주와 연주를 점거했고 이주세륭은 조정을 장악했다. 이전에 이주영에게 칭제를 권했던 고환은 이미 수만 명의 지휘권을 얻은 상황이었으며, 위진남북조 시대 발해군의 고건 형제, 봉씨 일가, 범양 노씨 일가, 조군 이씨 일가들의 사병과 연계를 성사시켜 이주씨 타도의 총수로 추대된다. 중흥 2년(532) 초, 고환은 효장제 살해를 이유로 군사를 일으켜 효무제를 옹립하고, 광하에서 이주씨 군사를 대파한다. 고환은 전마 2천 필에 병사 3만에 지나지 않았으나 휘하 고오조가 분전해 업성의 이주씨 20만 대군을 대파했고, 4월엔 곡사춘이 하교를..
이주영은 황하를 사이에 두고 진경지와 대치했다. 3일 동안 열한 번 싸워 모두 패하자 빠르게 도강하여 역습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이것이 성공하여 원호의 아들 원관수를 포로로 잡았다. 이에 원호 휘하의 안풍왕 원연명 휘하의 군사들이 사방으로 도주해 군세가 약해지고 곧 낙양이 함락됐다. 이에 원호에게 투항했던 수많은 성이 다시 북위로 귀항했으니 양나라 병사들은 퇴각을 시작했다. 원래 병력도 적었고 이주영의 추격군이 빠르게 들이닥치자 진경지 조차도 승려 복장을 하며 간신히 양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원호는 임영까지 도주했으나 임영현의 병사에게 죽임을 당하고 수급은 낙양의 이주영에게 보내진다. 원호의 난을 평정하자 효장제 원자유는 이주영을 위로한다. 이주영은 원호에 호응했던 만사추노 등을 제압해 하주, 위주,..
북위 영태후 시기. 당시, 조정 내부에선 변란이 일어나 청렴하며 재능도 있고 문학도 뛰어났던 청하왕 원역이 매관매직을 일삼던 영태후, 유등, 원예를 비난했다. 유등은 크게 두려워하며 원역을 모함한 뒤 살해했다. 너무 어렸던 효명제 원후는 유등의 거짓말에 속아 충신 원역을 죽이라는 조서를 내렸었다. 이어 유등은 영태후의 동생 남편인 원예와 조서를 꾸며 영태후를 연금시켰다. "호랑이(유등)를 키우다 물린다고 하더니 바로 내(영태후)가 그 꼴이 되었구나!" 원예, 원예 부친 경조왕, 유등은 계속해서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변방 6진의 군사들을 가혹하게 착취하며 사사로이 남조와 교역해 부도 쌓았다. 위진남북조 시대 제국은 이렇게 서서히 몰락한다. 이때 국인國人의 처우도 빼앗기고 가혹한 수탈을 당하던 6진의 군민들..
풍태후 사후 진정한 황제가 되어 한화 정책을 추진했던 위진남북조 시대 효문제 원굉의 치세가 저문다. 북위 효문제 태화 21년(497), 20만 명의 군사를 동원해 제나라로 진격했으나 남제 남양 태수 방백옥의 복병계에 걸려 거의 죽을 뻔했다. 이듬해엔 제명제 소란이 죽자 국상이 있는 나라는 치지 않는다며 이내 철군했다. 499년, 효문제가 사망하고 황태자 원각이 즉위하니 이가 북위 선무제다. 선무제는 황숙 원희가 모반하자 원씨 종친을 불신하고 외숙인 고조를 신임했다. 그 배경엔 자귀모사의 원칙을 어기고 살아남은 그의 생모 영태후(호씨라서 호태후라고도 함)가 있었다. 자귀모사를 어긴 이 시기부터 북위는 점차 쇠락의 길을 걷는다. 고조가 붕당을 결성해 북해왕 원상, 청하왕 원역을 사사로이 죽이고 권위를 높이기..
"작은 현의 현령이 유능하면 큰 현으로 승진시키고 큰 현의 현령이 유능하면 이천석 관리로 승진시키라." 이런 양무제의 조명 덕택에 산음현령 구중부가 장사 내사, 무강 현령 하원이 선성태수로 승진하기도 했다. 위진남북조 시대, 유송과 남제에서 시행하던 오관五館을 일반 수재에게도 개방하고 정원에 제한을 두지 않았으며, 오관 출신 중 유능한 자들을 뽑아 바로 관리로 임명했다. 이 시책은 수나라 시기 과거제를 촉진하는 계기가 된다. 적어도 양나라 중기까지는 남조의 문학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활발하게 꽃을 피웠다. 또한, 관원이 되기 위한 교양 습득을 위해 학관을 세웠다. 오경 박사가 한 명씩 임명되어, 수백 명이 소속된 한 관을 담당했으며, 이 관에서 시험을 시행하여 우수한 학생을 관료로 발탁하였다. 기존의 구..
소의는 제나라 최혜경의 난을 진압한 후 상서령, 위위에 임명됐으나 소보권의 심복들은 그를 꺼려 죽이려 했다. "소의는 소란이 울림왕을 폐립 한 것을 흉내 내려 합니다!" 이에 소보권은 소의(양나라 무제 소연의 친형)에게 사약을 내렸다. 소의는 이 사약을 받아 마시고 죽었는데, 아무리 봐도 소의는 앞뒤가 꽉 막혀 도무지 말도 안 통하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자고로 사람은 언젠가 죽기 마련이다. 상서령이 어찌 반기를 들어 도주할 수 있겠는가?" 당시 제나라엔 경릉팔우竟陵八友란 영명체의 대표적인 시인들이 있었다. 왕융王融, 사조謝朓, 범운范雲, 임방任昉, 심약沈約, 육수陸倕, 소침蕭琛, 소연蕭衍이 그들이다. 이중 사조는 명문 사씨 일가의 자제로 유송의 마지막 황제인 유욱의 목을 벤 왕경칙의 사위이기도 했다...
498년 12월, 암군 동혼후 소보권이 남제의 보위를 잇는다. 제명제 소란은 죽기 전에 서효사를 상서령, 심문계를 좌복야, 강우를 우복야, 유훤을 위위, 진현달에겐 군정, 시안왕 소요광에겐 안팎의 정사를 맡겼지만 동혼후의 전횡을 막을 순 없었다. 소보권은 즉위하자마자 부황의 영구가 태극전에 안치된 모습이 눈에 거슬려 속히 매장케 했다. 곡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목이 아프다는 이유로 하지 않았다. 책을 읽거나 글 쓰는 것을 싫어했고 태감들과 함께 굴을 파 쥐를 잡는 쥐잡기 놀이를 밤새도록 했다. 말을 더듬는 버릇도 있어서 신료들과 정사를 논하는 것도 꺼려, 태감과 무뢰배 소년들과 어울리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옹주자사로 있던 종친 소연은 나라에 큰일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해 군비를 강화하고 사람을 ..
북위 헌문제 연흥 6년(476) 8월, 풍태후가 술에 독을 타 헌문제 탁발홍을 살해한다. 풍태후는 태황태후가 되어 국가 대정을 장악했고 보위에 오른 효문제 탁발굉은 12세에 불과했다. 북위 효문제 탁발굉은 황제가 되어서도 풍태후(문명태후)한테 체벌 당하며 성장한다. ㅠㅠ 이 일이 있기 12년 전인 문성제 화평 5년(464), 위진남북조 시대 유연의 가한 토하진이 죽고 아들 여성予成이 뒤를 잇고 자신을 수라부진가한이라 칭하며 연호를 영강永康이라 하였다. 이전의 가한처럼 그도 북위의 북방을 공격하여 약탈하였다. 6년 뒤인 헌문제 황흥 4년(470), 경조왕 원자추, 동양공 원비, 임성왕 원운, 여음왕 원천사, 제남공 나오발, 농서왕 원하에게 명해 태무제 탁발도 시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연 토벌에 마침표를 찍..
북연이 혼란스러운 위진남북조 시기, 탁발도는 북연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가해 10여 개 큰 군을 먼저 손에 얻는다. 풍홍은 송나라에 칭신했으나 송나라도 별수가 없었다. 북위 연화 2년(433), 풍홍은 용성 아래에 북위군이 진을 치자 몰래 고구려로 도망쳤으며 북위군은 용성을 불태운다. 풍홍은 이후에 송나라로 도망치려 하거나 황제 노릇을 하려 했기에 고구려 장수왕에게 일족과 함께 주살 당한다(437년). 이전에 동생 탁발고를 인질로 잡아 두었다가 살해한 정동과 부고패의 5족도 도살했다. 이후 등장할 유명한 북위의 풍태후는 풍홍의 손녀이기도 하다. 탁발도의 북방 통일을 위해 남은 건 북량 정벌뿐이다. 북량은 옛 전진의 신하 여광이 세운 후량의 후신으로 여광의 부하 저거몽손은 여광을 배신하고 단업을 양왕凉으..
건원 4년(482) 3월, 위진남북조 시대 제나라. 무제(남제 무제 소색, 소도성 장남)는 유송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지방관의 수탈을 막기 위해 보내던 검관(요즘으로 치면 감찰관)들이 지방관과 결탁하여 뇌물을 수수하는 행태가 많아 검관을 폐지했다. 조세를 포함해 건강으로 보내지는 많은 물자의 징수 방법과 수량도 법으로 정했으며, 조세 제도를 성공적으로 개혁하여 남제 중앙 정부의 재정이 풍부해졌다. 그러나, 예서를 잘 써서 천하에 독보적이었고, 조정 신하들의 찬사를 듣던 망나니 황태자 손자가 있었다. 소색과 소장무(소색 아들 문혜태자, 소소업 친부)의 편애를 받던 소소업이다. 제나라 소색은 즉위하자, 소소업을 남군왕에 임명하여 식읍 2천호 받도록 한다. 당시 나이 10살이었다. 호..
전폐제 유자업이 폐위되고 보위에 오른 명제 유욱(유의륭의 11남)은 472년에 사망하고 장남 후폐제 유욱昱이 즉위한다. 유욱은 고명대신으로 원찬, 저연, 채흥종 등을 지정했는데 남제를 세운 소도성은 저연이 발탁한 인물이기도 했다. 유송 원희 2년(474), 계양왕 유휴범은 종실의 어른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불만을 품고 심양에서 거병하나 우위장군 소도성에게 제압당한다. 소도성은 이때의 공으로 상서좌복야에 임명됐다. 이듬해엔 건평왕 유경소가 제위를 탐내 난을 일으켰으나 역시 진압되었다. 후폐제 유욱은 유송 황제로 즉위 당시 12세에 불과했다. 남조의 황제답게 즉위 한 그 날부터 막장 행보를 시작한다. 후폐제 유욱위진 남북조 시대를 대표(?)하는 유욱은 스스로를 이장군李이라 칭하며 궐 밖에서 망나니처럼 굴었다...
효무제는 조세를 포탈하는 관료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이 시기 유송은 재정이 악화되어 갔다. 또한 문벌귀족은 노력하지 않아도 고관에 오르나 한문, 서민들은 출세길이 막혀 서진 말기처럼 현학이나 풍류를 추구하는 행태가 악화하었다. 따라서 관료들의 업무는 항상 지체되었고 국가 운영은 말단 관리들이 담당하게 되어 유송은 내부가 흔들리게 된다. 국가의 내부 문제를 악화시킨 효무제 유준은 35세의 나이에 병사하고 태자 유자업이 465년 정월에 뒤를 이으니 그가 전폐제이다. 그 유명한 유.자.업. 유송 전폐제 유자업은 어려서부터 조급하고 포악했는데, 하루는 어머니 왕태후가 병이 위독해지자 아들인 황제가 보고 싶다며 불러오게 했다. 그러자 유자업은 이렇게 말했다. "병자의 방에는 귀신이 많은데 어찌 갈 수 있는가!..
북위 vs 송나라원가 27년(450), 양양, 수양, 팽성 등에 황자들을 부임시키며 북벌의 의지를 굳건히 세워 두었었던 문제가 왕현모를 필두로 두 번째 북벌을 시도한다. 이때, 유송 문제는 여러 문인 귀족들과 회의 중이었는데 글자도 못 읽고, 책에는 손도 댄 적이 없던 골수 무인 심경지가 문제에게 직언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예컨대 집을 다스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밭일은 머슴에게 맡기고, 베 짜는 일은 하녀에게 시키는 법. 폐하는 지금 적국을 치려고 하면서 백면서생들과 일을 의논하고 있으니 어떻게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유송 문제는 웃으며 이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북위 태무제 탁발도의 대대적인 송나라 공격과 시기가 겹쳐 북벌군은 되려 수세에 몰린다. 공격에 나선 병사가 수비를 맡은 것이다. ..
원가 6년(429), 팽성왕 유의강을 형주자사, 장사왕 의흔을 남연주 자사, 강하왕 유의공을 남서주자사로 삼으며 황권 강화를 도모한다. 원가 7년(430), 문제 유의륭은 재위 기간 국력이 강성해지고 북위에 빼앗긴 황하 이남을 수복해야 한다는 의론에 따라 첫 번째 북벌을 시도한다. (위진남북조 시대 총 두 차례 북벌을 시도하지만 모두 실패) 원가 8년(431), 북벌군은 사실상 영토 확장의 의지가 없었다. 유송 문제 본인이 권신들을 지나치게 의식해 북벌에 나선 장군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도 못했으며, 황하 이남의 땅들은 공격하긴 쉬워도 지키긴 어려우므로 이때의 북벌은 사실상 군사 시위에 불과했다. 총주자사 유흥조가 하북으로 진격해 태항산 일대를 장악해야 한다고 상주했으나 조정에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유유는 363년 봄, 위진남북조 시대, 북부군단의 소재지인 경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관청의 하급 서기관으로, 일가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생활에 쪼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난산으로 목숨을 잃었고 돈이 없었던 아버지는 아이를 죽이려고도 했다. 마침,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은 의붓누이가 아이에게 젖을 물려 주었기에 유유는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택할 수 있었던 건 전장에서 공을 세워 출세하는 것뿐이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처럼 정말 X구멍 찢어지게 가난한 곳에서 태어나 황제(송무제)가 되었으니 누가 이를 상상이나 했으랴. 유송 무제 유유, 위진남북조 시대 2번째 남조 국가 송나라 건국유유가 420년 6월에 보위에 오르니 그가 송나라 무제다. 유유는 재위 후 중앙재정 확립과 황제권력의..
태무제 유연 공격태무제 탁발도는 대하를 멸망시킨 뒤 유연을 공격하려 했으나 대다수가 반대하고 최호만이 찬성했다. "저들이 방심하고 있는 지금 여름의 허를 틈타 정벌하지 않으면 후에 반드시 더 큰 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남적(송나라)은 고려할 필요가 없소. 전에 유연을 칠 때 남적은 말로만 우리를 친다고 했을 뿐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소." 태무제 탁발도와 다른 대신들에게 이런 말을 하자 태무제 탁발도는 최호의 의견을 좇는다. 위진남북조 시대 유연은 북위의 골칫거리여서 공격에 나선다. 신가 2년(429) 여름, 유연은 사방으로 흩어져 방목하고 있던 까닭에 각개격파 당한다. 북위군은 동서 5천 리, 남북 3천 리에 걸친 추격전을 펼쳐 포획한 사람과 노획한 말과 소 등의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
태무제 탁발도 즉위태상 8년(423), 탁발사가 병사하니 아들 탁발도가 보위를 잇는다. 북위를 화북의 지배자로 만든 태무제가 바로 그다. 명원제의 사망 사실이 알려지자 유연은 북위를 공격해 대국의 옛 수도 성락을 함락시킨다. 탁발도는 친히 경기를 이끌고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가 운중에 이르렀다. 유연의 국왕 흘승개가 북위군을 포위했으나 눈 하나 까닥하지 않는 어린 황제를 보고 용기를 얻은 북위군은 유연의 대장 어척근을 활로 쏘아 죽이며 포위를 풀었다. 시광 2년(425) 11월, 탁발도가 고비사막을 가로질러 유연을 격파했고, 이듬해인 시광 3년(426)엔 관중의 대하를 멸망시킨다. 대하 수도 통만성위진남북조 시대 413년, 혁련발발은 대하를 세우고 유유가 동진으로 돌아간 틈을 노려 관중을 손에 넣었..
북위 vs 후연탁발선비 탁발규는 처음에 후연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동생 탁발고를 보내 공물을 바치기도 했으나 후연 내부에서 화친을 반대하고 선비족 탁발고를 인질로 잡자 후연을 선제공격하고 이를 판도에 넣었다. 이에 위진남북조 시대 강자였던 후연은 태자 모용보, 모용농, 모용린 등으로 반격을 개시했으나 패배한다. 그렇지만 영특했던 모용수도 말년엔 어리석은 모습을 보였으니 북위에겐 기회였다. 태자 모용보에게 명해 북위를 공벌케 했다. 성공하면 자연스레 보위를 이을 수 있었다는 계산을 했지만, 착오였다. 동진 효무제 태원 20년(395) 8월, 탁발규는 변경의 병사를 뒤로 물러나게 한 뒤 기습할 생각이었다. 대장 장연의 계책이었다. "연나라 군사는 최근 적교를 활대에서 격파하고, 장자에서 모용영(서연)을 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