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남북조를 가로지르는 비수대전 승리 이후, 동진은 이 기회를 틈타 양양, 익주, 양주 등지를 수복한다. 하지만, 중원 수복 의지는 약해 회수와 관중 일대의 요충지는 얼마 안 가 다시 잃는다. 전진 멸망의 원인은 비수대전 패배이다. 국력이 크게 손상된 것은 아님에도 부견의 무리한 융화 정책이 불러온 부작용으로 볼 수 있다. 강제적으로 살던 곳을 떠나 중원의 낯선 곳으로 이주한 이민족들의 고충을 부견은 이해했을까?황실과 가까운 저족들은 국가의 중심부가 아닌 변방으로 나간 것에 만족했을까? 부견은 꿈만 좇았지 현실적인 감각이 매우 떨어지던 인물로 보인다. "왕맹 같은 시어머니"가 곁에 없는 "뜬구름 잡기 대마왕 부견"의 패망은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큰일을 치룬 위진남북조 시대 동진 효무제 사마요는..
동진의 군사는 기세를 놓칠라, 빠른 속도로 전진의 군대를 추격했다. 동진은 곧 수양을 회복하고 전진의 회남태수도 포로로 잡는다. 그러나 전진의 전선이 꽤 길었기에 동진의 추격전도 그다지 오래가진 못했다. 후방의 전진 군대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기에 비수대전은 그걸로 끝이 난다. 부견은 모용수의 부대만이 진을 유지하며 퇴각했기에 그곳으로 몸을 의지했다. 배고픔과 화살에 맞은 통증 때문에 힘들었던 부견은 회수 부근에서 한 백성에게 밥과 돼지 넓적다리를 받자 비단 열 필과 솜 열 근을 하사하기도 했다. "폐하께서는 안락함에 싫증을 느끼셔서 스스로 위험과 곤경에 처하게 되셨습니다. 신은 폐하의 자식이고 폐하는 신의 아버지이시니 어찌 자식이 그 아버지를 봉양하고서 보답을 바랍니까!" 전진군의 전선이 길었고 선봉군이..
북조 통일왕조 전진, 세상을 떠나는 왕맹 전진 건원 6년 11월의 일이었으니 병사를 일으킨 지 고작 1년도 되지 않아 전연은 전진에 멸망했다. 전연을 멸망시킨 부견은 양주의 전량국 장천석에서 투항을 권했고 장천석은 번국을 칭한다. 이후 부견은 요장을 보내 양주를 함락시키고 장천석은 장안으로 끌려와 시중, 비부상서, 귀의후에 봉해진다. 이후 그는 비수대전에서 패배할 당시 동진에 투항하여 효무제에게 중용되었다. 그러나 부견에게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으니, 건원 11년(375), 왕맹이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직전 유소를 올렸다. "폐하는 공업이 쉽게 이뤄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응당 전전긍긍하며 여림심연如臨深淵(두려워하고 조심하고 삼가며, 깊은 못 가에 서 있는 듯, 얇은 얼음을 밟듯 하라..
부견과 그의 참모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저족을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저족 번세를 죽여 황제의 권위를 높이는 한편, 중앙 정부의 군사력 확충을 위한 일화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외에도 제후왕들의 작위를 공公으로 낮췄다. 그러나 백성에겐 따뜻했던 부견은 중농억상 정책으로 세금과 요역을 크게 감면하고 태학의 학생들을 격려했다. 호한분치에서 호한융합으로 가는 시발점이었다. 이는 큰 반발에 부딪혀 흉노 좌우현왕과 부생의 형제인 부류, 부쌍, 부유 등이 반란을 일으킨다. 부견은 이를 빠르게 제압하고 국외로 시야를 돌린다. 동진 환온의 북벌 당시 전연은 전진에게 땅을 떼어주는 조건으로 구원을 청했었다. 호뢰 이서의 땅, 그 땅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부견은 악덕 채무자에게 원금과 이자를 꼭 받아내려 했다...
위진남북조 시대 전진秦은 부씨符씨 황제들이 다스린 나라다. 전진의 특징은 건국에서 멸망까지 지나치게 참언에 휘둘리는 경향이 짙었다는 것이다. 부견의 조부 부홍의 성은 원래 포蒲씨로 "초부응왕草付應王"이란 참언에 따라 성을 바꿨다. 포홍은 하남에서 거병했으며, 부견의 백부 부건은 황시 2년(삼진왕을 칭하던 당시의 연호, 352) 황제를 칭했다. 부홍(부견 할아버지)은 이후 6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며, 세자 부건(부견 큰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했다. "중원은 너희 형제들이 능힘 점거할 곳이 아니다. 관중의 형세가 좋으니 내가 죽은 뒤 서쪽으로 진격해 이를 취하도록 하라!" 환온의 2차 북벌 이후 부건은 몰래 관중 일대를 공격해 동진의 장수 두홍과 장선을 격파하고 장안을 도성으로 삼았다. 이미 독립 상태나 ..
간문제는 온후한 성격으로 당당한 기량을 갖추고 있었다고 전하는 것으로 봐선, 이 당시 환온이 과연 적극적으로 찬위를 노렸을진 알 수 없다. 반면 이에 반대되는 사례가 하나 있는데 이 사례를 놓고 보면 환온이 간문제가 어떤 인물인지를 미처 알지 못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환온은 간문제, 태제 사마희와 함께 수레에 타고 가다가, 은밀히 사람에게 명하여 수레 앞뒤에서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게 하였다. 행렬은 깜짝 놀라 혼란에 빠졌다. 태재는 두려움에 떨며 수레에서 내려 달라고 했다. 뒤돌아서 간문제를 보니 조용히 있으면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환온이 말했다. "조정 안에도 이런 현인은 있는 법이로군." 그러나 간문제 또한 즉위하자마자 병에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기 힘들었다. 이에 그는 환온에게 양위의 뜻을 밝히..
한편, 평양까지 도주한 요양은 관중을 얻기 위해 부견과 싸우나 이내 패하고 포로가 된 뒤 살해된다. 요양의 동생 요장이 남은 병력을 추스른 뒤 부견에게 항복하니, 당시로선 "그 날, 그런 일이 벌어질 줄" 예상이나 했을까. (위진남북조 시대에 큰 사건) (출처 : 위진남북조, 오호(五胡)의 쟁패 20 - Exodus) 목제 승평 5년(361), 5월 환온은 동생 환활에게 허창을 치게 하여 전연의 대장 모용진을 몰아내고 함락시킨다. 6월에 목제 사마담이 병사했으나 후사가 없어 성제 사마연의 장자 낭야왕 사마비가 보위를 이으니 그가 애제이다. 애제 흥년 원년(363), 전연의 군사가 낙양을 공격하자 환온은 구원병을 보내는 한편 낙양 천도를 주장하는 상주문을 올린다. 중원의 옛 영토 회복과 강남의 재산을 포기..
환온은 파촉의 성한 평정의 공으로 정서대장군, 개부, 임하군공에 봉해졌다. 촉을 평정하자 환온의 위명이 천하를 진동시켰고 조정을 장악하던 회계왕 사마욱은 환온을 견제하기 위해 양주자사 은호를 심복으로 삼아 조정 대사에 참여시킨다. 이런 조치로 동진 조정은 환온의 지지파와 반대파로 갈리게 된다. 이런 일은 이후 벌어질 환온과 은호의 북벌, 양쪽 모두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특히 은호의 강족 불신은 동진 북벌 군대에 악영향을 미친다. 동진 목제 영화 5년(349), 동진으로선 북벌하기 좋은 시기였다. 후조의 석호가 병사하며 석씨 종친 간 내분이 일어나자, 환온이 북벌의 상주문을 올렸다. 그러나 사마욱을 위시한 동진 조정은 환온이 더 많은 공을 세우는 게 탐탁지 않았다. 환온 대신 저태후의 부친인 저부에..
※ 34화 요약 - 어린 황제가 연이어 즉위하는 동진. 군공을 세우는 환온 유익은 야심이 많던 사람이었다. 형주의 관청에서 대회가 열린 자리에서 막료들과 나눈 대화는 이렇다. "나는 한나라 고조라든가 위나라 무제(조조)가 되고자 하는데 어떠하오?" "(장사 강반이 말하길) 공께서는 제 환공이나 진 문공과 같은 사업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한고조나 위무제와 같은 분이 되시는 것은 원하지 아니합니다." 함강 8년(342), 성제 사마연이 22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유량의 동생이자 외숙인 유빙이 성제의 친동생인 사마악, 강제를 즉위시킨다. 유량 사후, 손작孫綽이 그를 위해 비문을 지었다. "유공은 원래부터 기꺼이 세속 밖에다 마음을 두고 있었다. 유연한 태도로 세상을 살면서 몸을 도회韜晦(재능이나 학식 따위를 숨..
환온의 측근인 치초 일가 중 일부가 오두미도 도교를 신봉했던 것으로 추측되며, 훗날 손은의 난이 발생했을 때, 성문을 열고 손은을 받아들인 사씨 일가도 있었다. 이를 보면, 도교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파촉과 동진 일대에 넓게 퍼져있었다. 관련 일화를 하나 살펴보면, 동진 치초 일가 중 한 사람인 치음은 도교를 독실하게 믿었는데, 배탈이 오래 지속되자 우법개란 유명 의원을 찾아간다. "군후께서 앓고 있는 병은 바로 정진精進을 너무 지나치게 해서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탕약 한 제를 받아 마셨더니 곧바로 설사가 나왔고, 주먹 크기만 한 종이 뭉치가 몇 개 나왔는데, 이전에 삼켰던 도교 부적들이었다. 또, 지위가 높았던 왕헌지는 자신의 병이 위독해지자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훗날 사중랑 사만은..
조약의난 종결, 동진 군벌 해체, 위진남북조 성한 [32화] 10월 중엔 왕도가 변심한 소준의 심복 노영의 안내로 유량이 주둔하고 있는 백석으로 달아나는 등 전황은 소준에게 불리해지는 듯 보였다. 그렇지만 실전 경험이 풍부한 소준의 병사들은 동진의 군대에 계속 승리를 거뒀다. 당시 온교는 군량이 떨어져 도간에게 빌리기도 하는 등 전황은 되려 포위한 쪽이 수비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소준은 계속된 승리에 고무되어 건강 주변의 포위군 영채를 공격했다. 온교와 도간 등은 보병전에 익숙지 않으니 석두성을 치는 것이 좋겠다 판단하여 보병 1만여 명을 이끌고 높은 곳으로 올라 진을 펼쳤으나 소준의 아들 소석과 용장 광효의 수십 기에 대패했다. 수십 기가 1만여 명의 보병을 낮은 곳에서 위로 향하며 격파한 것이다. 큰..
동진 군벌 소준의난, 명제 사마연과 외할아버지 유량 [31화] 유량은 회수 일대가 공략당하자 왕도를 대사마로 임명해 이를 막도록 하는 한편, 후조의 군대와 맞서며 전장에 있던 소준의 병권을 빼앗으려 시도한다. "소준은 승냥이의 야심을 지니고 있어 끝내 반란을 일으킬 것이오. (역모를 부추기는 발언)" 광록대부 변호가 반대했다. "소준은 강병을 이끌고 하루 만에 경성에 이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주둔하고 있소. 만일 변이 일어나면 화난이 가볍지 않을 것이오." 당연히 유량은 이런 말을 가볍게 skip하고 밀어붙인다. 명예직에 임명해 조정으로 불러들이고 군권을 소준의 동생 소일에게 넘기려 했다. 유량에게 압박을 받던 소준은 휘하의 사마를 유량에게 보낸다. "적들을 토벌하기 위해 밖으로 나와 중임을 맡고 있으..
어린 황제 성제 사마연 및 반역자 왕돈, 할아버지 유량 [30화] 반역자 왕돈은 태녕 2년(324) 8월, 온교를 주살한다는 명분으로 5만 명의 수군과 육군을 이끌고 재차 건강으로 진군한다.명제 사마소는 대범하게도 말을 타고 고숙까지 이동해 반역자 왕돈의 병력 상황 등을 살피는 등 문무를 겸비한 황제로서의 모습을 보인다. 한번은 몰래 군대의 형세를 정찰하려고 고숙까지 이르렀는데 반역자 왕돈 군영의 병사가 이를 알아차리고 소리를 질렀다. "이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왕돈은 누워 있다가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이는 틀림없이 누런 수염의 선비족 놈이 온 것이다." 동진 황제 사마소의 친모가 연나라 사람이라 그렇게 말은 했으나 추격하여 잡아내진 못했다. 이후 반역자 왕돈은 왕함에게 월성으로 향하도록 명했으나..
사마소 - 황제의 반란, 권력 찬탈자 왕돈을 내쫓는 동진 [29화] 훗날(왕돈이 사마소 황제에게 패망하던 날), 왕함(왕함의 아들이 왕돈의 장남으로 입양)은 왕빈과의 사이가 틀어졌다는 것으로 생각해 왕빈에게 의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빈은 이런 일화에도 불구하고 그를 받아들이려 했었다. 같은 해 말, 반란에 성공했던 왕돈은 대군을 이끌고 무창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원격으로 조정을 제어한다. 비록 동진 조정은 제압했지만, 지방 군벌은 확실히 제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약은 왕돈이 조정을 뜯어고친다는 소식을 듣고 왕돈의 사자에게 거친 목소리로 말한 적이 있다. "너는 아흑阿黑(왕돈의 어렸을 때 자字)에게 말하라. 어디서 감히 불손한 짓을!서둘러 군대를 수습하여 돌아가라!즉시로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3..
동진 왕돈 반란 성공, 허수아비 황제 사마예 [28화] 진원제 대흥 4년(321), 사마승을 상주자사로 삼았다. 대연에겐 사주, 연주, 예주, 병주, 옹주, 기주 6개 주의 군사를 총괄케 했고,유외는 진북장군 겸 청주, 서주, 유주, 평주의 군사를 총괄케 했다. 동진 원제는 후조의 석륵을 서와 북에서 막는다는 취지로 임명했으나, 실질적으론 왕돈 반란을 미리 방비하려 한 것이다. 진원제 영창 원년(326), 왕돈이 마침내 유외를 주살한다는 명목으로 건강을 향해 진군한다. 왕돈은 상주자사 사마승을 설복시키려 했으나 실패했고, 비슷한 시기 사마예는 유외와 대연에게 건강을 지킬 것을 명한다. 당시 건강의 대신들은 왕돈이 결코 그럴 리 없다고들 말했다. 그러나 주의 등은 그가 반란을 일으킬 인물이라며 조정의 대책..
강남 호족과 낭야 왕씨가 옹립한 사마예, 동진 왕도 [26화] 영흥 2년(305) 봄, 서진의 장군인 진민이 강남에서 할거할 뜻을 밝히며 강남 호족의 호응을 요구하자 중원에서 무시를 받던 오군의 명족 고씨顧 일가를 비롯한 대다수가 찬동한다. 그렇지만 진민은 정치력도 없고 서진 정부가 점차 역적과 함께한다며 의심을 하자 진민을 영가 원년(307)에 제거한다. 이후에도 강회의 장창, 광릉의 전회의 난 등을 제압한 당시 강남 호족들의 상호 협력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겐 상호 배타적이고 대립, 경쟁적인 성격이 강했기에 유유의 송나라 이후론 통합 세력으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자신들의 가문조차 지켜내지 못하게 된다. 영가 원년(307), 사마월은 사마예를 진동대장군, 도독, 양주 강주 호주..
염위 멸망, 선비족 모용준 연나라 건국, 강남의 사마예 [25화] 당초 유현 또한 독립할 의지가 있었던 인물인 것으로 추측된다. 유현은 곧 업성과 양국의 거리가 먼 것을 이용해 왕을 칭한 뒤 염민의 영토 중 하나인 상산을 공격한다. 그러나 유현이 큰 인물은 아니었다. 염민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상산의 구원에 나서자 유현의 군대는 도망치기 바빴고 양국을 지키지도 못했다. 결국 『유현과 공경 1백여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양국 또한 초토화되었다. 염위 영흥 3년(352) 4월, 시기를 조율하던 모용준이 마침내 움직인다. 동생 모용각과 모용패에게 대군을 주어 염위를 비롯한 후조와 인근 군벌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염민은 잇따른 승리에 도취해 친히 영격에 나섰으나 모용각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염민의..
후조 대조천왕 석호의 태자 문제, 고구려 공격, 장안 증축 [21화] 후조 건무 3년(337), 안정의 후자광이 스스로 불태자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장군 석광에게 제압당한다. 후자광은 대진국(로마)에서 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불교를 빙자하여 반란을 획책한 것은 특이하다 할 수 있겠다. 석호는 불교를 신봉하여 구자국 출신의 불도징을 크게 대우했는데 사공 이농에게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리게 했고 조회가 열리는 날에는 태자와 여러 공작이 불도징을 부축하여 전각에 오르게 하는 등 후조 전역에서 불교를 숭상하는 문화를 스스로 만들었다. 불도징은 이후 석호가 황태자 석수의 문제를 함께 논의하기도 했다. 같은 해, 석호는 대조천왕을 칭하며 석수를 황태자로 삼았다. 석수는 황태자에 책봉된 뒤 여인을 납치, 강..
후조 황제가 된 폭군 석호, 갈족 석씨 일가의 분열 [20화] 석륵이 마침내 유언을 남겼다. "...(중략) 중산왕 석호는 재삼 옛날 주나라 건국 공신 주공이 성왕을 보좌한 공을 생각도록 하고 이를 구실로 삼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석호는 석륵의 아들, 또는 조카로 기록되어 있는데 295년생 토끼띠의 석호는 274년생 말띠인 석륵과 21세 차이가 나기에 아들, 조카 모두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석륵이 태자를 314년생 개띠 석홍으로 삼은 것으로 보아 아들은 조카의 오기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서진 말기, 오랑캐들이 노비처럼 매매가 되었는데 이들에 대한 처우는 형편없었다. 석호도 어려서부터 호족 노비로 하북과 회하 일대를 전전했다. 어렸을 때 『개와 돼지』의 음식을 ..
황위를 노리는 석호, 세상을 떠난 석륵 장빈 [19화] 이후 대인배 석륵은 금군 소대장인 한족 풍저가 실수로 갈족을 갈호羯胡라 부른 것에 대해 익숙지 않으니 그럴 수도 있다며 넘어갔고, 참군 번원이 몇 년 전 갈족에게 도둑맞아 빈털터리가 됐다고 말하자 오히려 의복과 돈을 하사했다. 석륵이 노예 시절에 상당 지역에서 연못물을 놓고 『자주 다투었던 이양』이란 사람에겐 과거의 감정을 잊고 참군도위에 임명하는 등 동진의 조적과도 화친을 요청하며 국가 내부의 안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북조의 5호 16국 황제 중 드문 성군이었다. 이런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문맹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뛰어난 통찰력으로 문맹의 벽을 넘어섰다는 것을 증명할 일화도 있다. 한번은 한서 강독 시간에 유방의 참모 역..
갈족 석륵, 위진남북조 시대에 왕미 세력을 흡수한 사건 [17화] 연주자사 구희에게 대패해 유연에게 몸을 맡겼으니 석륵이 큰 인물이라 판단한 유연은 그에게 장군의 직을 내렸고 전장터에서 공을 세우기를 10여 년, 마침내 노예 출신으로 왕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석륵은 유연의 한나라 휘하로 많은 전투에 참여했으나 처음부터 독립할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인망을 쌓는 데도 주력했다. 약탈은 물론이고 민간인을 함부로 죽이는 것을 절대 금했으며 기주를 함락한 뒤에는 군자영을 세워 문인들을 길러냈다. 석륵의 수하였던 장빈도 이런 군자영에 스스로 찾아간 인물이었다. 유총이 황제가 되자 석륵은 다시 정동대장군, 병주자사에 임명되었고 유총의 아들 유찬과 낙양을 칠 때, 양양으로 진격해 장강과 한수 이북의 거점을 얻어냈..
흉노족 한나라 전조 멸망, 갈족 석륵 및 조카 석호의 평양성 [16화] 광초 2년(319) 여름, 유요는 조서를 내린다. "나의 선조는 북방에서 일어났다. 광문제(유연)가 한나라 종묘를 세워 백성의 뜻을 좇았다. 지금 의당 국호를 바꾸고 선우를 선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국호를 조로 바꾼 이후 진창, 초벽, 안정, 농성 등을 함락시키고 관중의 파족, 저족, 강족, 갈족 등을 제압했으며 태학과 소학을 세워 학자들 밑에서 수업을 받도록 했고, 궁실을 너무 크게 짓는 것이 옳지 않다 여겨 중단하기도 했다. 현명하게 내실을 다지던 유요는 광초 8년(325), 드디어 석륵의 조나라와 군사적 충돌을 시작한다. 석륵이 장수 석타에게 명해 상군을 쳐 3천여 명의 포로와 소와 양 등 가축 2만여 두를 빼앗은 것이다. ..
화북 쟁탈전 - 유요 근준 석륵 삼국지, 두개의 조나라 [15화] 연이어 적국의 황제 두 명을 사로잡은 전대미문의 일이 벌어졌다. 이에 유총은 이에 더욱더 사치에 힘썼다(?). 수렵하며 술을 마시는 것 외에 그가 즐긴 것은 각 대신의 집을 차례로 돌며 미인을 감상하는 것이었다. 그는 중호군 근준의 집에서 그의 두 딸 근월광과 근월화 모두 미모가 뛰어난 것을 보고 곧바로 귀빈으로 삼았다. 그리고 몇 달 후 근월광을 황후로 세웠다. 천하가 한나라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그렇지만 한나라엔 건국자 유연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여전히 존재했다. 왕준, 석륵 등의 대장군들을 조정에서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문제는 여전히 한나라에게 큰 문제였으며, 결국에 해결하지 못했기에 후조가 탄생한 배경으로 작용한다. 유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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