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 동호, 돌궐, 회홀回鹘(위구르), 글단, 여진, 말갈, 선비족, 강, 오환, 유연, 카작哈萨克(카자흐족) 등은 북방민족입니다. 학교에선 잘 가르치지 않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아래 지도를 통해 북방민족의 시대별 영역과 역사를 간단히 설명합니다. 상주시대商周(상나라와 주나라)에 흉노와 동호, 위치는 대략 아래와 같습니다. 이후, 북방민족 흉노는 세력이 커지며 동호를 압박합니다. 동호는 너무 불쌍해졌네요. 흉노는 세력이 커지자 교만해지며 선비족과 오환으로 분열됩니다. 이후 강력한 한나라 왕조가 등장하며 북방민족 흉노를 꾸준히 공격하여 마침내 성공합니다. 한나라의 흉노 분열 계획은 성공하여 남흉노와 북흉노로 분열되었는데, 요즘의 남한, 북한과 비슷합니다. 한나라는 흉노족 이간 계획을 멈추..
위진남북조 시대 말기, 제나라(북제) 멸망 이후 풍소련은 이후에 고위가 모반을 일으키다 발각되어 주살되니 우문달에게 하사됐으며 양견이 북주의 보위를 찬탈하자 우문달의 정비인 이씨의 오빠 이순에게 하사됐다가 이순의 모친에 의해 자진한다. 주나라 (북주) 위진남북조 시대 북방 통일을 이룬 북주의 무제 우문옹의 뒤를 이은 건 아들 선제 우문윤이다. 선제에겐 북주와 북제의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그러나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온 선제는 황제가 되자마자 주색에 빠지고 공신들을 제거하며 국력을 소진했다. 재위한 이듬해인 579년, 7살에 불과한 태자 우문천(우문연衍에서 우문천闡으로 개명)에게 보위를 물려주니 그가 정제이다. 선제는 스스로 천원 황제를 칭하며 전횡을 일삼..
북주 군대가 홍동과 영안을 함락시킬 때, 고위는 진주를 버리고 사냥을 떠나던 중이었다. 당시, 북제의 군사가 우문흔, 하란표자 등의 북주군을 패퇴시키며 평양성 성벽을 무너뜨려 승세를 이어가고자 했으나, 고위는 풍숙비와 승전의 기쁨을 나눈다며 진격을 중지토록 한다. 풍숙비가 진주 서쪽에 성인聖人의 흔적이 있다며 조심할 것을 권했기 때문이다. 북주의 군사들은 그 시간 동안 성벽을 수리했고 평양을 끝까지 지킬 수 있었다. "한 줌 정도의 도적은 말 위에서 베고 붙잡아서 분수 속에다 내던져 버릴 뿐입니다!" "저들도 역시 천자이고 우리 또한 천자입니다. 저들은 오히려 멀리에서 왔는데 우리가 어찌 해자를 지키고 약한 것을 내보입니까!" 멀쩡한 군대를 놔두고 후퇴하는 북제 장군들의 진격 건의에도 불구하고 무능한 우..
[북방민족 지도 1] 선비족 셋으로 나뉘다 (한나라~5호16국~위진남북조 초기) 흉노, 동호, 돌궐, 회홀回鹘(위구르), 글단, 여진, 말갈, 선비족, 강, 오환, 유연, 카작哈萨克(카자흐족) 등은 북방민족입니다. 학교에선 잘 가르치지 않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아래 지도를 통해 북방민족의 시대별 영역과 역사를 간단히 설명합니다. 상주시대商周(상나라와 주나라)에 흉노와 동호, 위치는 대략 아래와 같습니다. 이후, 북방민족 흉노는 세력이 커지며 동호를 압박합니다. 동호는 너무 불쌍해졌네요. 흉노는 세력이 커지자 교만해지며 선비족과 오환으로 분열됩니다. 이후 강력한 한나라 왕조가 등장하며 북방민족 흉노를 꾸준히 공격하여 마침내 성공합니다. 한나라의 흉노 분열 계획은 성공하여 남흉노와 북흉노로 ..
조조는 생전에 칭제를 하지 않았다. 다만, 여러 차례 문서를 통해서만 아들(조비인지 누군지 하여간 누가 됐건)이 찬위할 여지는 남겨두었다. 5호 16국. 위진남북조 시대의 막바지에 동위를 지배한 고환도 조조와 마찬가지였다. 고환은 하급 소대장 출신으로 이주씨가 효무제 원수를 옹립하자 효정제 원선견을 옹립했었다. 동위 효정제 무정 2년(544), 고환이 아들 고징을 대장군, 영중서감, 섭이부상서에 임명했다. 고징은 옛 친구들이 자신에게 무례하거나 뇌물을 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 고환은 생전에 이런 말을 했었다. "공들은 되도록 내 아들을 피하도록 하시오." 고징은 고환 사후 지방의 군벌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되어 발상을 미뤘다. 실제로 하남에서 반란(후경)이 일어나자 한궤에게 명해 이를 토벌하고 ..
고환의 동위는 선비족과 한족 간의 갈등이 컸다. 선비족 고관들이 한족을 경멸했기 때문이다. 고환의 총애를 받던 고오조는 휘하의 선비족 장병들 속에 한인들이 섞여 있으면 고환에게 요청해 이들을 다른 부대로 이전시키는 등 당시 선비족 대장들의 상황을 대변하는 일화를 몇 가지 남겼다. 한번은 황하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여러 명이 물에 빠져 죽자, "한 푼의 가치도 없는 한인들은 죽게 놓아두어라!" 라는 말을 했다. 고환도 이를 타개하려 시도는 했지만, 동위가 멸망하는 순간까지도 이는 해결되지 않았다. "한인은 너희 노복이다. 남자는 너희를 위해 경작하고, 여자는 너희를 위해 옷을 만든다. 곡식과 비단을 세금으로 내 너희를 따뜻하게 먹이고 있다. 왜 그들을 업신여기는 것인가?" "선비족은 너희가 고용한 용병이다...
이하 글은 아래의 3개 자료에서 발췌. 1.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가와카쓰 요시오, 임대회 옮김2. 위진남북조사, 이공범3. 동북아역사재단총서, 중국 정사 외국전 우문宇文흉노를 조상으로 하며 특히 (우문태는) 남선우의 후예이다. 본래 음산陰山 지역에 거주하였다가 1세기경 요동 일대로 이주하면서 점차 선비화 되었고, 마침내 우문선비라 불리게 되었다. 이후 서위를 건설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고 북주의 지배집단을 형성하였다. 위진남북조 3세기 후반에 이주한 이들은 유목을 주업으로 하고 수렵, 농경, 약탈을 부업으로 삼아 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종족과 혼합하여 거주하게 되었는데, 구심력이 있는 정치체제를 갖춘 우문 집단은 이미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토착 종종인 선비족을 지배하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정..
위진남북조 시대 천평 4년(537), 동위 서위간에 사원지전이 폭발한다. (2차 회전 이 글을 주로 참고해 작성) 8월, 우문태는 이필, 독고신, 양어, 조귀, 우근, 약간혜, 이봉, 유량, 왕덕, 후막진숭, 이원과 달해무등 12명의 장수를 이끌고 동위로 진격한다. 병력이 동관에 이르렀을 때, 우문태는 병사들 앞에서 맹세하며 말한다. "이번 출병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폭란한 자를 주살하기 위한 것이다. 모두 여러 병사에게 달려 있다. 무기와 전마를 잘 정돈하여, 혈전에 대비하라. 재물을 탐하거나 적을 경시하거나, 흉포하게 행동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명령을 따르는 자에게는 상을 내리고, 명령을 어기는 자는 죽일 것이다!" 바로 우근을 동정선봉으로 삼아, 그날로 반두(盤豆, 지금의 허남성 양평의 서북)..
남북조 시대 당시 6진 수용군 이주영은 영리했다. 반란군에 대해, 때로는 동조하거나 때로는 이들을 제압하면서 점차 자신의 힘을 키워나갔다. 하루는 사주를 지나던 중 자사 울경빈이 성문을 열고 영접하지 않자 성을 함몰시킨 뒤 스스로 자사를 배치했다. 북위 조정은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았는데,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영태후 제압한 이주영시간이 지날수록 북위 곳곳에서 반란이 심화하였다. 흉포한 영태후가 북위를 망치고 있던 것이었다. 수용군의 이주영은 틈을 타 세를 확장하기 위해 반군 진압에 나서겠다 여러 차례 요청했으나 매번 거절당했다. 이주영의 세력이 부담스러웠던 영태후는 군 내부의 분열을 일으키기 위해 이주영 휘하의 군신에게 녹봉을 내리려 했으나 이주영은 이를 간파하고 큰 원한을 품게 되었다...
북위 효문제 모순 - 한화정책 효문제 태화 19년(495)엔 제나라 공격을 감행했으나 무덥고 습한 날씨에 군수품 조달이 늦어지면 소득 없이 귀환한다. 이해 7월, 북위는 5호 16국 국가들이 행해오던 호한분치를 버리고 한화漢化를 공식적으로 천명한다. 물물교환 방식을 버리고 태화오수전을 주조해 화폐 개혁을 시도했고, 낙양에 국자감, 태학, 사문소학을 두었다. "오늘 짐(효문제 탁발굉)은 선비어를 포함한 모든 북방어를 금지하고 한어로 통일해 쓰기로 했다. 30세 이상의 관원은 이미 오랜 습관이 된 까닭에 서서히 바꾸는 것을 윤허하나 조정에서 오랫동안 봉직한 30세 이하의 관원은 선비어로 말하는 것을 금한다. 이를 어길 경우 곧바로 강등과 면직 조처를 취할 것이다." 북위 태화 20년(496), 탁발씨를 원씨..
태무제 탁발도 즉위태상 8년(423), 탁발사가 병사하니 아들 탁발도가 보위를 잇는다. 북위를 화북의 지배자로 만든 태무제가 바로 그다. 명원제의 사망 사실이 알려지자 유연은 북위를 공격해 대국의 옛 수도 성락을 함락시킨다. 탁발도는 친히 경기를 이끌고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가 운중에 이르렀다. 유연의 국왕 흘승개가 북위군을 포위했으나 눈 하나 까닥하지 않는 어린 황제를 보고 용기를 얻은 북위군은 유연의 대장 어척근을 활로 쏘아 죽이며 포위를 풀었다. 시광 2년(425) 11월, 탁발도가 고비사막을 가로질러 유연을 격파했고, 이듬해인 시광 3년(426)엔 관중의 대하를 멸망시킨다. 대하 수도 통만성위진남북조 시대 413년, 혁련발발은 대하를 세우고 유유가 동진으로 돌아간 틈을 노려 관중을 손에 넣었..
개혁 군주 탁발규 말년천사 원년(404), 모든 부락의 자제에게 대대적으로 작위를 내렸는데 왕이 10명, 공이 22명, 후는 79명, 자는 103명에 달했으니 이는 선비족(탁발선비)의 나라 북위 말기에 중앙 정부의 재정적 부담으로 작용하게 된다. 마치 명나라 말기처럼 국가 재정으로 놀고먹는 자들을 챙기기엔 부담이 컸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진남북조 시대 영웅인 탁발규는 말년에 한식산을 복용해 건강이 나빠졌고 정신병까지 생겼다. 밤새도록 홀로 중얼거리고 군신들과 회의를 할 때는 기분이 쉽게 변하여 신하들이 이전에 행한 악행이나 원한 관계를 끄집어내 살해했다. 이외에도 신하들을 기분에 따라 죽인 뒤 시체를 천안전 앞에 내버려 두니 인심이 술렁였다. 탁발규는 이전에 작은 이모(하란비)에게 반해 첩으로 들이려 ..
북위 vs 후연탁발선비 탁발규는 처음에 후연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동생 탁발고를 보내 공물을 바치기도 했으나 후연 내부에서 화친을 반대하고 선비족 탁발고를 인질로 잡자 후연을 선제공격하고 이를 판도에 넣었다. 이에 위진남북조 시대 강자였던 후연은 태자 모용보, 모용농, 모용린 등으로 반격을 개시했으나 패배한다. 그렇지만 영특했던 모용수도 말년엔 어리석은 모습을 보였으니 북위에겐 기회였다. 태자 모용보에게 명해 북위를 공벌케 했다. 성공하면 자연스레 보위를 이을 수 있었다는 계산을 했지만, 착오였다. 동진 효무제 태원 20년(395) 8월, 탁발규는 변경의 병사를 뒤로 물러나게 한 뒤 기습할 생각이었다. 대장 장연의 계책이었다. "연나라 군사는 최근 적교를 활대에서 격파하고, 장자에서 모용영(서연)을 멸..
위진남북조 시대, 중기에 접어들며 또다른 선비족 탁발선비가 등장한다. 탁발선비 대국 代國위진남북조 시대, 탁발부의 정치 활동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탁발역미의 손자 탁발의이, 탁발의려 형제 때부터이다.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으로 많은 한인이 참합에 근거지를 두었던 두 선비족 형제의 세력권 안으로 피난하였고 탁발의이 또한 병주자사 사마등에 호응하여 유연, 석륵과 대적했다. 이에 진 회제는 310년 대국공에 봉하니 이것이 대국代國의 시작에 해당한다. 탁발의려는 평성을 남도, 성락을 북도로 하였는데 이중 북도를 직접 다스리고 평성을 포함한 남부는 아들들에게 맡긴다. 이후 탁발의려의 장남 탁발육수는 아버지를 공격하여 승리했지만 탁발부는 이를 계기로 남부와 북부의 대치로 이어진다. 이를 하나로 합친 건 탁발의려의..
후연, 후진 북방 상황후연이 창건될 당시 하동에선 모용홍이 서연을 세웠으나 16국에는 포함되지 못할 정도로 세력이 미약했다. 고작 2년 동안 보위가 7번이나 바뀌면서 최종적으론 모용외의 동생인 모용운의 손자 모용영이 황제가 되었다. 처음엔 후연의 번국을 자청했지만 386년 장자에서 황제를 선포했다. 중흥 8년(393), 남북조시대 영웅 모용수의 공격에 장자가 함락되며 모용영은 목이 베였다. 모용수의 뒤를 이은 모용보는 모용덕(전연의 황제 모용황의 막내아들이자 후연 모용수의 동생)에게 기, 연, 청, 서, 형, 예주 6개의 군사를 총괄케 했다. 당시 북위는 이제 막 건국된 신생 국가였지만 훗날 도무제로 추존되는 탁발규의 대군은 기세가 등등했다. 북중국의 최강자인 후연을 공격해 황제 모용보를 압박했고, 이내..
이전에, 전연의 황제 모용위는 모용수에게 영격을 맡기는 한편, 전진 부견에 호뢰 이서의 땅을 베어주는 조건으로 원군을 요청했다. 전진의 대다수 중신이 반대하는 와중에 왕맹만은 원군 파병을 부견에게 강력히 주장한다. "전연(연나라)이 비록 강하다고는 하나 환온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 환온이 패주한 후 전연(연나라)의 원기가 크게 상해 있을 때 기회를 틈타 연나라를 도모할 만합니다." 전진 황제 부견은 이를 받아들여 2만 병사로 전연과 모용수의 군대를 돕는다. 당시 환온은 우물쭈물하며 사태를 관망했는데 그는 북벌을 나왔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 계속 동진 조정의 내부 동태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황위를 찬탈할 생각에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사령관이 이러니 동진의 북벌군이 제대로 ..
한편, 평양까지 도주한 요양은 관중을 얻기 위해 부견과 싸우나 이내 패하고 포로가 된 뒤 살해된다. 요양의 동생 요장이 남은 병력을 추스른 뒤 부견에게 항복하니, 당시로선 "그 날, 그런 일이 벌어질 줄" 예상이나 했을까. (위진남북조 시대에 큰 사건) (출처 : 위진남북조, 오호(五胡)의 쟁패 20 - Exodus) 목제 승평 5년(361), 5월 환온은 동생 환활에게 허창을 치게 하여 전연의 대장 모용진을 몰아내고 함락시킨다. 6월에 목제 사마담이 병사했으나 후사가 없어 성제 사마연의 장자 낭야왕 사마비가 보위를 이으니 그가 애제이다. 애제 흥년 원년(363), 전연의 군사가 낙양을 공격하자 환온은 구원병을 보내는 한편 낙양 천도를 주장하는 상주문을 올린다. 중원의 옛 영토 회복과 강남의 재산을 포기..
사마소 - 황제의 반란, 권력 찬탈자 왕돈을 내쫓는 동진 [29화] 훗날(왕돈이 사마소 황제에게 패망하던 날), 왕함(왕함의 아들이 왕돈의 장남으로 입양)은 왕빈과의 사이가 틀어졌다는 것으로 생각해 왕빈에게 의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빈은 이런 일화에도 불구하고 그를 받아들이려 했었다. 같은 해 말, 반란에 성공했던 왕돈은 대군을 이끌고 무창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원격으로 조정을 제어한다. 비록 동진 조정은 제압했지만, 지방 군벌은 확실히 제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약은 왕돈이 조정을 뜯어고친다는 소식을 듣고 왕돈의 사자에게 거친 목소리로 말한 적이 있다. "너는 아흑阿黑(왕돈의 어렸을 때 자字)에게 말하라. 어디서 감히 불손한 짓을!서둘러 군대를 수습하여 돌아가라!즉시로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3..
사마월 진회제 민제 최후, 한나라 유총 사치향락 빠지다 [14화] "지금 호로胡虜들이 낙양 근교까지 다가왔는데 모두 지킬 뜻이 없소. 조정은 모두 그대만을 믿고 있는데 어찌 지금 군사를 이끌고 멀리 출정하겠다는 것이오? 낙양을 포기하려는 것이오?" 진회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마월은 석륵을 토벌해 조정의 권위를 다시 세우겠다며 기어코 출병한다. 누가 봐도 임지인 동해로 돌아가겠다는 뜻이며 낙양은 버리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낙양의 수비병』은 거의 없어지고 기근은 더욱 심각해졌다. 사마월이 남긴 장수들은 공경들의 재산을 약탈하거나 공주들을 능욕하기까지 한다. 진회제는 참을 수 없어 구희에게 사마월 토벌을 명하는 밀조를 내렸고 그나마 사마월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서진의 마지막 숨통은 그의 폭사와 함..
흉노족 한나라 건국, 유총에게 포위당한 서진 진혜제 [13화] 유연으로선 제후왕들의 난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우니 거사를 일으키기 좋다는 판단을 했다. "지금 우리는 강병 10만 명이 있으니 모두 일당십의 용사들이오. 북을 울리며 진나라를 멸합시다. 잘되면 한고조의 대업을 이루는 것이고, 그렇지 못할지라도 조조의 패업을 이룰 수 있을 것이오." "한나라는 오랫동안 천하를 다스리면서 은덕을 베풀었소. 명분으로 말하면 나는 한실의 생질에 해당하오. 형이 패망한 상황에서 동생이 뒤를 잇는 게 정리에 부합하는 일일 것이오." 이렇게 5호의 첫 국가 한漢나라가 건국된다. 흉노 유연은 진혜제 영흥 원년(304), 좌국성에서 한왕을 칭하며 한나라 제도를 좇아 백관의 제도를 정했다. 16국 중 첫 왕조의 건국이었다. 한나..
고팔부古八部 시절 거란족과 선비족(북위), 거란과 북제 등국 3년(386년), 북위의 정벌로 인해 고막해와 분리된 거란족은 반세기가 지나면서 안정을 되찾았고 점차 세력을 회복하면서 북위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북위의 세조 탁발도 태연 3년(437)에 거란은 사신을 파견해 공물을 바쳤다. 태평, 진군 연간(440~450)에는 좋은 말을 매년 공납했다. 현조 탁발홍(466~470 재위) 시기에 거란족은 북위와 이미 여러 해 동안 왕래하면서 마침내 정식으로 승인을 받아 "여러 나라의 말석에 끼여 향응에 참가하는 지위를 얻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6세기 중엽까지 거란은 고팔부古八部의 연맹 단계에 해당한다. 고팔부의 명칭과 관련해 위서의 현조기와 거란전 및 책부원귀 요사의 영위지와 세표의 기록이 서로 일치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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