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시선을 위진남북조 시대 남쪽으로 돌려보자.그곳엔 싯다르타 덕후 소연(= 양무제)이 다스리는 양나라가 있다. 당시, 위진남북조 시대의 남조인 양나라 황제와 신하들은 사치스러웠고,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승려가 되길 원했으며, 일반 백성들은 가혹한 세금과 굶주림에 시달렸다. 부유했던 강남의 사회가 거의 무너져 내렸다. 그럼에도 양무제는 무너져가는 남조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조정에서는 오히려 공덕을 쌓았다(부처에게 돈을 많이 바쳤으니 다 괜찮다~라는 의미). 조정에서 쓰는 것은 모두 정원에서 나온 식물이고 하나의 호박을 변화시켜 수십 종류로 만들었고 하나의 나물을 변화시켜 수십 가지의 맛을 내게 한 것이어서, 변화를 시켜서 많은 것을 만들었으니, 어떤 일에도 손해를 끼치지 않았다."..
옥벽지전(玉璧之戰)은 망산지전 이후 3년이 지난 546년. 동위 무정 4년(546), 서위 문제(원보거) 대통 12년(546)에 일어난다. 서위와 동위의 5차 회전으로 마지막 회전이기도 하다. 2월, 양주에서 우문중화가 토욕혼과 반란을 일으키지만 금세 제압된다. 이때 영천의 동위 후경이 형주로 진격하나 서위 조정은 이 역시 막아낸다. 10월, 동위와 서위의 마지막 회전이 벌어진다. 고환은 친히 10만 대군으로 분하 하류의 서위 요충지인 옥벽(지금의 산서 직현의 서쪽)을 겹겹이 포위한다. 서위의 장수 위효관에겐 고작 수천의 병사밖에 없었다. (위진남북조 시대 가장 처절했던 공성전) 고환은 서위의 분수 하류에 있는 주요 거점을 없애고자 밤낮으로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한편으로 성의 남쪽에 토산을 쌓고, 다시..
3차 하교지전(538) 이후 5년이 흐른 동위 효정제 무정 원년(543) 다시 전쟁의 불이 붙는다. 이것이 남북조 시대 유명한 망산지전이다. [주로 여기 참조] 전쟁의 원인은 고환의 아들 고징은 여색을 밝혀 고중밀(고오조의 형)의 처 이씨를 강간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비슷한 시기에 북예주 자사로 임명된 고중밀은 이같은 사실에 앙심을 품고 서위에 투항한다. 동위의 요충지 호뢰관이 서위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에 동위와 서위의 네 번째 회전이 벌어진다. ▶ 말썽꾸러기 고징훗날 남북조 시대 북제의 황제게 오르는 고징은 532년 효정제孝靜帝의 누이동생 풍익장공주馮翊長公主를 아내로 맞습니다. 고징은 14세 때 부친 고환이 총애하는 희첩 정대거와 간통했다가 부친에 의해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당시 사마자여가 중간에 ..
서위 우문태는 사원대첩 후, 사기가 올라서 적극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여, 일거에 하동의 포판과 낙양의 금용성을 확보했다. 기세를 몰아 우문귀가 영천까지 공격하여 의주, 양주, 예주, 광주, 형주 일대를 서위 영토로 만든다. (당시 동위는 효정제, 서위는 문제 시기) 동위 효정제 원상 원년(538), 동위 고환의 장수 후경이 낙양 금용성을 탈취한 뒤 약탈을 감행한다. (3차 회전 하교지전, 이 글을 주로 참고) 후경은 낙양 내외의 많은 민가와 관청을 불살랐다. 서위의 문제 원보거와 승상 우문태는 원래 낙양을 점령한 후 선제의 능원에 제사 지내고자 하였는데, 후경이 금용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는 우문태가 친히 대군을 이끌고 가서 지원했다. 전군이 곡성(谷城, 하남 신안현 동쪽)에 이르렀을 때, 고환의 동위 선봉..
위진남북조 시대 천평 4년(537), 동위 서위간에 사원지전이 폭발한다. (2차 회전 이 글을 주로 참고해 작성) 8월, 우문태는 이필, 독고신, 양어, 조귀, 우근, 약간혜, 이봉, 유량, 왕덕, 후막진숭, 이원과 달해무등 12명의 장수를 이끌고 동위로 진격한다. 병력이 동관에 이르렀을 때, 우문태는 병사들 앞에서 맹세하며 말한다. "이번 출병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폭란한 자를 주살하기 위한 것이다. 모두 여러 병사에게 달려 있다. 무기와 전마를 잘 정돈하여, 혈전에 대비하라. 재물을 탐하거나 적을 경시하거나, 흉포하게 행동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명령을 따르는 자에게는 상을 내리고, 명령을 어기는 자는 죽일 것이다!" 바로 우근을 동정선봉으로 삼아, 그날로 반두(盤豆, 지금의 허남성 양평의 서북)..
영희 3년(534) 7월, 북위 효무제가 10만 병사로 위진남북조 시대 남조 양나라를 치겠다며 병사를 일으켰지만, 이는 북쪽의 고환을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고환은 22만 병사를 다섯 갈래로 나눠 효무제의 친정을 돕겠다고 했으나 이는 효무제와 대적하겠다는 의미였다. 효무제가 친히 10만의 군사로 진양의 고환 공격을 개시한다. 이전에 효무제는 관서의 군벌인 우문태를 상서좌복야에 임명하며 공주를 보내 처로 삼게 했다. 믿을 만한 보험을 하나 둔 것이다. 그러나 효무제나 주변 대신들은 소인배에 불과했다. 곡사춘이 급히 내려오느라 피로한 고환의 군사를 기습하려 했으나 황문시랑 양관이 이를 막았다. "곡사춘이 도하 한 후 기습에 성공해 고환을 토벌할지라도 이는 또 하나의 고환을 만드는 것입니다."우매한 효무제가 이..
(75화는 74화 상세 설명에 해당합니다)유연 남침과 6진의 난북위 효명제 정광 4년(523), 유연이 남침한다. 회황의 군민들은 양식이 없어 굶게 되자 도리어 위나라 관료들을 죽이며 반란을 일으킨다. 위진남북조 시대, 북위 조정도 어쩔 수 없이 공격을 감행한 유연과 함께 이들을 제압해 버린다. 그리곤 포로가 된 20만의 군민을 하북으로 이주시켰지만 두락주, 선우수례, 갈영 등이 반란을 일으키며 하북 일대는 아수라장이 돼버린다. 기후가 좋지 않은 척박한 땅에 천대와 멸시를 받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포로의 신분으로 이주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당시 유연도 내분으로 일족 일부가 북위로 망명한 상황이었기에 저런 일이 가능했었습니다) 이들을 제압한 것이 이주영이고 제압한 공로로 위대장(친위도독)에 임명되었..
북위 절민제 즉위석 달 후, 건명 2년(531), 이주씨 일족은 광릉왕 원공을 새로 옹립하니 그가 위진남북조 시대 절민제이다.이주천광은 관우, 이주조는 병주와 분주, 이주중원은 서주와 연주를 점거했고 이주세륭은 조정을 장악했다. 이전에 이주영에게 칭제를 권했던 고환은 이미 수만 명의 지휘권을 얻은 상황이었으며, 위진남북조 시대 발해군의 고건 형제, 봉씨 일가, 범양 노씨 일가, 조군 이씨 일가들의 사병과 연계를 성사시켜 이주씨 타도의 총수로 추대된다. 중흥 2년(532) 초, 고환은 효장제 살해를 이유로 군사를 일으켜 효무제를 옹립하고, 광하에서 이주씨 군사를 대파한다. 고환은 전마 2천 필에 병사 3만에 지나지 않았으나 휘하 고오조가 분전해 업성의 이주씨 20만 대군을 대파했고, 4월엔 곡사춘이 하교를..
이주영은 황하를 사이에 두고 진경지와 대치했다. 3일 동안 열한 번 싸워 모두 패하자 빠르게 도강하여 역습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이것이 성공하여 원호의 아들 원관수를 포로로 잡았다. 이에 원호 휘하의 안풍왕 원연명 휘하의 군사들이 사방으로 도주해 군세가 약해지고 곧 낙양이 함락됐다. 이에 원호에게 투항했던 수많은 성이 다시 북위로 귀항했으니 양나라 병사들은 퇴각을 시작했다. 원래 병력도 적었고 이주영의 추격군이 빠르게 들이닥치자 진경지 조차도 승려 복장을 하며 간신히 양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원호는 임영까지 도주했으나 임영현의 병사에게 죽임을 당하고 수급은 낙양의 이주영에게 보내진다. 원호의 난을 평정하자 효장제 원자유는 이주영을 위로한다. 이주영은 원호에 호응했던 만사추노 등을 제압해 하주, 위주,..
(하음의 변) 당시 효장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줄 몰랐으나 형인 원소와 동생 원자정이 병사들에게 끌려가 토막 나 살해되는 모습은 목격했다. 이에 효장제는 이주영에게 찬위할 생각이 있으면 그리하라 이른다. 이주영 휘하의 장수들은 이에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제왕의 흥망과 성쇠는 무상한 법이오. 만일 천명이 장군에게 돌아간다면 장군은 응당 때에 맞춰 존호를 받아야 할 것이오." 휘하의 고환이 칭제할 것을 권했으나 거부한다. 위나라 신하 이주영얼마 후 이주영은 본인이 저지른 짓이 너무나도 흉포하다는 것을 깨닫고 환궁한 이후 효장제를 향해 머리를 거듭 조아리며 벌을 줄 것을 요청했으나 효장제는 그리할 수 없었다. 당시 왕공 대신을 도륙하자 낙양의 백성들은 두려운 나머지 급히 도성을 빠져나갔다. 성내 인구는 1..
남북조 시대 당시 6진 수용군 이주영은 영리했다. 반란군에 대해, 때로는 동조하거나 때로는 이들을 제압하면서 점차 자신의 힘을 키워나갔다. 하루는 사주를 지나던 중 자사 울경빈이 성문을 열고 영접하지 않자 성을 함몰시킨 뒤 스스로 자사를 배치했다. 북위 조정은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았는데,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영태후 제압한 이주영시간이 지날수록 북위 곳곳에서 반란이 심화하였다. 흉포한 영태후가 북위를 망치고 있던 것이었다. 수용군의 이주영은 틈을 타 세를 확장하기 위해 반군 진압에 나서겠다 여러 차례 요청했으나 매번 거절당했다. 이주영의 세력이 부담스러웠던 영태후는 군 내부의 분열을 일으키기 위해 이주영 휘하의 군신에게 녹봉을 내리려 했으나 이주영은 이를 간파하고 큰 원한을 품게 되었다...
북위 영태후 시기. 당시, 조정 내부에선 변란이 일어나 청렴하며 재능도 있고 문학도 뛰어났던 청하왕 원역이 매관매직을 일삼던 영태후, 유등, 원예를 비난했다. 유등은 크게 두려워하며 원역을 모함한 뒤 살해했다. 너무 어렸던 효명제 원후는 유등의 거짓말에 속아 충신 원역을 죽이라는 조서를 내렸었다. 이어 유등은 영태후의 동생 남편인 원예와 조서를 꾸며 영태후를 연금시켰다. "호랑이(유등)를 키우다 물린다고 하더니 바로 내(영태후)가 그 꼴이 되었구나!" 원예, 원예 부친 경조왕, 유등은 계속해서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변방 6진의 군사들을 가혹하게 착취하며 사사로이 남조와 교역해 부도 쌓았다. 위진남북조 시대 제국은 이렇게 서서히 몰락한다. 이때 국인國人의 처우도 빼앗기고 가혹한 수탈을 당하던 6진의 군민들..
풍태후 사후 진정한 황제가 되어 한화 정책을 추진했던 위진남북조 시대 효문제 원굉의 치세가 저문다. 북위 효문제 태화 21년(497), 20만 명의 군사를 동원해 제나라로 진격했으나 남제 남양 태수 방백옥의 복병계에 걸려 거의 죽을 뻔했다. 이듬해엔 제명제 소란이 죽자 국상이 있는 나라는 치지 않는다며 이내 철군했다. 499년, 효문제가 사망하고 황태자 원각이 즉위하니 이가 북위 선무제다. 선무제는 황숙 원희가 모반하자 원씨 종친을 불신하고 외숙인 고조를 신임했다. 그 배경엔 자귀모사의 원칙을 어기고 살아남은 그의 생모 영태후(호씨라서 호태후라고도 함)가 있었다. 자귀모사를 어긴 이 시기부터 북위는 점차 쇠락의 길을 걷는다. 고조가 붕당을 결성해 북해왕 원상, 청하왕 원역을 사사로이 죽이고 권위를 높이기..
"작은 현의 현령이 유능하면 큰 현으로 승진시키고 큰 현의 현령이 유능하면 이천석 관리로 승진시키라." 이런 양무제의 조명 덕택에 산음현령 구중부가 장사 내사, 무강 현령 하원이 선성태수로 승진하기도 했다. 위진남북조 시대, 유송과 남제에서 시행하던 오관五館을 일반 수재에게도 개방하고 정원에 제한을 두지 않았으며, 오관 출신 중 유능한 자들을 뽑아 바로 관리로 임명했다. 이 시책은 수나라 시기 과거제를 촉진하는 계기가 된다. 적어도 양나라 중기까지는 남조의 문학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활발하게 꽃을 피웠다. 또한, 관원이 되기 위한 교양 습득을 위해 학관을 세웠다. 오경 박사가 한 명씩 임명되어, 수백 명이 소속된 한 관을 담당했으며, 이 관에서 시험을 시행하여 우수한 학생을 관료로 발탁하였다. 기존의 구..
소의는 제나라 최혜경의 난을 진압한 후 상서령, 위위에 임명됐으나 소보권의 심복들은 그를 꺼려 죽이려 했다. "소의는 소란이 울림왕을 폐립 한 것을 흉내 내려 합니다!" 이에 소보권은 소의(양나라 무제 소연의 친형)에게 사약을 내렸다. 소의는 이 사약을 받아 마시고 죽었는데, 아무리 봐도 소의는 앞뒤가 꽉 막혀 도무지 말도 안 통하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자고로 사람은 언젠가 죽기 마련이다. 상서령이 어찌 반기를 들어 도주할 수 있겠는가?" 당시 제나라엔 경릉팔우竟陵八友란 영명체의 대표적인 시인들이 있었다. 왕융王融, 사조謝朓, 범운范雲, 임방任昉, 심약沈約, 육수陸倕, 소침蕭琛, 소연蕭衍이 그들이다. 이중 사조는 명문 사씨 일가의 자제로 유송의 마지막 황제인 유욱의 목을 벤 왕경칙의 사위이기도 했다...
498년 12월, 암군 동혼후 소보권이 남제의 보위를 잇는다. 제명제 소란은 죽기 전에 서효사를 상서령, 심문계를 좌복야, 강우를 우복야, 유훤을 위위, 진현달에겐 군정, 시안왕 소요광에겐 안팎의 정사를 맡겼지만 동혼후의 전횡을 막을 순 없었다. 소보권은 즉위하자마자 부황의 영구가 태극전에 안치된 모습이 눈에 거슬려 속히 매장케 했다. 곡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목이 아프다는 이유로 하지 않았다. 책을 읽거나 글 쓰는 것을 싫어했고 태감들과 함께 굴을 파 쥐를 잡는 쥐잡기 놀이를 밤새도록 했다. 말을 더듬는 버릇도 있어서 신료들과 정사를 논하는 것도 꺼려, 태감과 무뢰배 소년들과 어울리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옹주자사로 있던 종친 소연은 나라에 큰일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해 군비를 강화하고 사람을 ..
북위 효문제 모순 - 한화정책 효문제 태화 19년(495)엔 제나라 공격을 감행했으나 무덥고 습한 날씨에 군수품 조달이 늦어지면 소득 없이 귀환한다. 이해 7월, 북위는 5호 16국 국가들이 행해오던 호한분치를 버리고 한화漢化를 공식적으로 천명한다. 물물교환 방식을 버리고 태화오수전을 주조해 화폐 개혁을 시도했고, 낙양에 국자감, 태학, 사문소학을 두었다. "오늘 짐(효문제 탁발굉)은 선비어를 포함한 모든 북방어를 금지하고 한어로 통일해 쓰기로 했다. 30세 이상의 관원은 이미 오랜 습관이 된 까닭에 서서히 바꾸는 것을 윤허하나 조정에서 오랫동안 봉직한 30세 이하의 관원은 선비어로 말하는 것을 금한다. 이를 어길 경우 곧바로 강등과 면직 조처를 취할 것이다." 북위 태화 20년(496), 탁발씨를 원씨..
효문제 태화 17년(493), 북위 황제 효문제(탁발굉)는 낙양 천도를 결정했다. "평성은 매우 한랭했다. 6월에도 비와 눈이 내리고, 모래바람이 수시로 불었다. 이에 낙양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위진남북조 시대 사서인 위서의 기록에 따르면 기후로 인해 천도를 결정한 것이나 내막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국력이 커질수록 수도인 평성으로 몰려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이들이 머물 집과 식량 문제가 생긴 것이다. 가축으로 식량을 옮기더라도 중간의 소진분이 너무 커서 이 또한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북쪽의 유연과 수도의 거리가 가까웠고, 북중국 통일 이후엔 국가 유지를 위한 행정의 문제도 생겼다. 이에 북위 효문제는 낙양 천도를 결정하고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이전에 북위 중신들 사이에선 만약 "수도를 이전한다면..
북위 헌문제 연흥 6년(476) 8월, 풍태후가 술에 독을 타 헌문제 탁발홍을 살해한다. 풍태후는 태황태후가 되어 국가 대정을 장악했고 보위에 오른 효문제 탁발굉은 12세에 불과했다. 북위 효문제 탁발굉은 황제가 되어서도 풍태후(문명태후)한테 체벌 당하며 성장한다. ㅠㅠ 이 일이 있기 12년 전인 문성제 화평 5년(464), 위진남북조 시대 유연의 가한 토하진이 죽고 아들 여성予成이 뒤를 잇고 자신을 수라부진가한이라 칭하며 연호를 영강永康이라 하였다. 이전의 가한처럼 그도 북위의 북방을 공격하여 약탈하였다. 6년 뒤인 헌문제 황흥 4년(470), 경조왕 원자추, 동양공 원비, 임성왕 원운, 여음왕 원천사, 제남공 나오발, 농서왕 원하에게 명해 태무제 탁발도 시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연 토벌에 마침표를 찍..
탁발도가 남정에 나섰을 때 태자 탁발황이 감국으로 있었는데 휘하의 도성이 탁발도가 총애하는 태감인 종애와 반목했다. 종애는 탁발도가 돌아오자 도성 일당의 죄를 날조해 보고했고 탁발도는 이에 도성 일당을 죽인다. 탁발황은 이에 병을 얻어 곧 사망하고 종애는 탁발도가 추궁할까 두려운 나머지 늦은 밤, 영안궁에서 자고 있던 탁발도를 죽였다. 황망한 5호16국 시대 영웅의 죽음이다. 다음 날, 황태자에 이어 황제가 죽자 황제의 손자 탁발준이 보위에 올라야 했다. 그러나 나이가 어려 상서좌복야 난연, 시중 화정, 시중 설제는 탁발도의 3남인 북위 진왕 탁발한을 옹립고자 했다. 그러나 종애가 미리 눈치채고 무장한 태감들로 이 세 사람을 죽인 뒤 탁발한 마저도 살해한다. 그리고 조서를 조작해 오왕 탁발여를 보위에 올..
북연이 혼란스러운 위진남북조 시기, 탁발도는 북연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가해 10여 개 큰 군을 먼저 손에 얻는다. 풍홍은 송나라에 칭신했으나 송나라도 별수가 없었다. 북위 연화 2년(433), 풍홍은 용성 아래에 북위군이 진을 치자 몰래 고구려로 도망쳤으며 북위군은 용성을 불태운다. 풍홍은 이후에 송나라로 도망치려 하거나 황제 노릇을 하려 했기에 고구려 장수왕에게 일족과 함께 주살 당한다(437년). 이전에 동생 탁발고를 인질로 잡아 두었다가 살해한 정동과 부고패의 5족도 도살했다. 이후 등장할 유명한 북위의 풍태후는 풍홍의 손녀이기도 하다. 탁발도의 북방 통일을 위해 남은 건 북량 정벌뿐이다. 북량은 옛 전진의 신하 여광이 세운 후량의 후신으로 여광의 부하 저거몽손은 여광을 배신하고 단업을 양왕凉으..
소소업은 남제 경성(수도)으로 돌아와 아픈 아버지를 위해 곡성을 내는 등 그럴듯하게 연기를 해서 황제가 되었다. 소색은 이 연극에 속아 문혜태자의 뒤를 이어 소소업을 제나라 황태손으로 삼아 제위를 물려준다. 방탕한 소소업은 국고를 함부로 썼고 황후 하씨도 난교를 즐기자 종실 소심과 소탄지는 은밀히 서창후 소란과 모의해 폐립을 준비했다. 애초 소색(소도성 아들)은 소소업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었다. "5년 동안은 모든 것을 재상에게 맡기고 너는 의견을 섞지 말 것이며, 5년이 지나서는 다시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마라. 만약 스스로 이룬 것이 없더라도 아주 한스러워하지 마라 ... 만약 할아버지를 기억하며 당연히 잘 해나가겠지!" 이전에 소소업이 황제가 되기 직전, 소색의 장례 중에도 소소업은 기녀들은 불러 ..
건원 4년(482) 3월, 위진남북조 시대 제나라. 무제(남제 무제 소색, 소도성 장남)는 유송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지방관의 수탈을 막기 위해 보내던 검관(요즘으로 치면 감찰관)들이 지방관과 결탁하여 뇌물을 수수하는 행태가 많아 검관을 폐지했다. 조세를 포함해 건강으로 보내지는 많은 물자의 징수 방법과 수량도 법으로 정했으며, 조세 제도를 성공적으로 개혁하여 남제 중앙 정부의 재정이 풍부해졌다. 그러나, 예서를 잘 써서 천하에 독보적이었고, 조정 신하들의 찬사를 듣던 망나니 황태자 손자가 있었다. 소색과 소장무(소색 아들 문혜태자, 소소업 친부)의 편애를 받던 소소업이다. 제나라 소색은 즉위하자, 소소업을 남군왕에 임명하여 식읍 2천호 받도록 한다. 당시 나이 10살이었다.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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