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폐제 유자업이 폐위되고 보위에 오른 명제 유욱(유의륭의 11남)은 472년에 사망하고 장남 후폐제 유욱昱이 즉위한다. 유욱은 고명대신으로 원찬, 저연, 채흥종 등을 지정했는데 남제를 세운 소도성은 저연이 발탁한 인물이기도 했다. 유송 원희 2년(474), 계양왕 유휴범은 종실의 어른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불만을 품고 심양에서 거병하나 우위장군 소도성에게 제압당한다. 소도성은 이때의 공으로 상서좌복야에 임명됐다. 이듬해엔 건평왕 유경소가 제위를 탐내 난을 일으켰으나 역시 진압되었다. 후폐제 유욱은 유송 황제로 즉위 당시 12세에 불과했다. 남조의 황제답게 즉위 한 그 날부터 막장 행보를 시작한다. 후폐제 유욱위진 남북조 시대를 대표(?)하는 유욱은 스스로를 이장군李이라 칭하며 궐 밖에서 망나니처럼 굴었다...
효무제는 조세를 포탈하는 관료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이 시기 유송은 재정이 악화되어 갔다. 또한 문벌귀족은 노력하지 않아도 고관에 오르나 한문, 서민들은 출세길이 막혀 서진 말기처럼 현학이나 풍류를 추구하는 행태가 악화하었다. 따라서 관료들의 업무는 항상 지체되었고 국가 운영은 말단 관리들이 담당하게 되어 유송은 내부가 흔들리게 된다. 국가의 내부 문제를 악화시킨 효무제 유준은 35세의 나이에 병사하고 태자 유자업이 465년 정월에 뒤를 이으니 그가 전폐제이다. 그 유명한 유.자.업. 유송 전폐제 유자업은 어려서부터 조급하고 포악했는데, 하루는 어머니 왕태후가 병이 위독해지자 아들인 황제가 보고 싶다며 불러오게 했다. 그러자 유자업은 이렇게 말했다. "병자의 방에는 귀신이 많은데 어찌 갈 수 있는가!..
북위 vs 송나라원가 27년(450), 양양, 수양, 팽성 등에 황자들을 부임시키며 북벌의 의지를 굳건히 세워 두었었던 문제가 왕현모를 필두로 두 번째 북벌을 시도한다. 이때, 유송 문제는 여러 문인 귀족들과 회의 중이었는데 글자도 못 읽고, 책에는 손도 댄 적이 없던 골수 무인 심경지가 문제에게 직언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예컨대 집을 다스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밭일은 머슴에게 맡기고, 베 짜는 일은 하녀에게 시키는 법. 폐하는 지금 적국을 치려고 하면서 백면서생들과 일을 의논하고 있으니 어떻게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유송 문제는 웃으며 이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북위 태무제 탁발도의 대대적인 송나라 공격과 시기가 겹쳐 북벌군은 되려 수세에 몰린다. 공격에 나선 병사가 수비를 맡은 것이다. ..
원가 6년(429), 팽성왕 유의강을 형주자사, 장사왕 의흔을 남연주 자사, 강하왕 유의공을 남서주자사로 삼으며 황권 강화를 도모한다. 원가 7년(430), 문제 유의륭은 재위 기간 국력이 강성해지고 북위에 빼앗긴 황하 이남을 수복해야 한다는 의론에 따라 첫 번째 북벌을 시도한다. (위진남북조 시대 총 두 차례 북벌을 시도하지만 모두 실패) 원가 8년(431), 북벌군은 사실상 영토 확장의 의지가 없었다. 유송 문제 본인이 권신들을 지나치게 의식해 북벌에 나선 장군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도 못했으며, 황하 이남의 땅들은 공격하긴 쉬워도 지키긴 어려우므로 이때의 북벌은 사실상 군사 시위에 불과했다. 총주자사 유흥조가 하북으로 진격해 태항산 일대를 장악해야 한다고 상주했으나 조정에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유유는 363년 봄, 위진남북조 시대, 북부군단의 소재지인 경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관청의 하급 서기관으로, 일가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생활에 쪼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난산으로 목숨을 잃었고 돈이 없었던 아버지는 아이를 죽이려고도 했다. 마침,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은 의붓누이가 아이에게 젖을 물려 주었기에 유유는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택할 수 있었던 건 전장에서 공을 세워 출세하는 것뿐이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처럼 정말 X구멍 찢어지게 가난한 곳에서 태어나 황제(송무제)가 되었으니 누가 이를 상상이나 했으랴. 유송 무제 유유, 위진남북조 시대 2번째 남조 국가 송나라 건국유유가 420년 6월에 보위에 오르니 그가 송나라 무제다. 유유는 재위 후 중앙재정 확립과 황제권력의..
태무제 유연 공격태무제 탁발도는 대하를 멸망시킨 뒤 유연을 공격하려 했으나 대다수가 반대하고 최호만이 찬성했다. "저들이 방심하고 있는 지금 여름의 허를 틈타 정벌하지 않으면 후에 반드시 더 큰 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남적(송나라)은 고려할 필요가 없소. 전에 유연을 칠 때 남적은 말로만 우리를 친다고 했을 뿐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소." 태무제 탁발도와 다른 대신들에게 이런 말을 하자 태무제 탁발도는 최호의 의견을 좇는다. 위진남북조 시대 유연은 북위의 골칫거리여서 공격에 나선다. 신가 2년(429) 여름, 유연은 사방으로 흩어져 방목하고 있던 까닭에 각개격파 당한다. 북위군은 동서 5천 리, 남북 3천 리에 걸친 추격전을 펼쳐 포획한 사람과 노획한 말과 소 등의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
태무제 탁발도 즉위태상 8년(423), 탁발사가 병사하니 아들 탁발도가 보위를 잇는다. 북위를 화북의 지배자로 만든 태무제가 바로 그다. 명원제의 사망 사실이 알려지자 유연은 북위를 공격해 대국의 옛 수도 성락을 함락시킨다. 탁발도는 친히 경기를 이끌고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가 운중에 이르렀다. 유연의 국왕 흘승개가 북위군을 포위했으나 눈 하나 까닥하지 않는 어린 황제를 보고 용기를 얻은 북위군은 유연의 대장 어척근을 활로 쏘아 죽이며 포위를 풀었다. 시광 2년(425) 11월, 탁발도가 고비사막을 가로질러 유연을 격파했고, 이듬해인 시광 3년(426)엔 관중의 대하를 멸망시킨다. 대하 수도 통만성위진남북조 시대 413년, 혁련발발은 대하를 세우고 유유가 동진으로 돌아간 틈을 노려 관중을 손에 넣었..
개혁 군주 탁발규 말년천사 원년(404), 모든 부락의 자제에게 대대적으로 작위를 내렸는데 왕이 10명, 공이 22명, 후는 79명, 자는 103명에 달했으니 이는 선비족(탁발선비)의 나라 북위 말기에 중앙 정부의 재정적 부담으로 작용하게 된다. 마치 명나라 말기처럼 국가 재정으로 놀고먹는 자들을 챙기기엔 부담이 컸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진남북조 시대 영웅인 탁발규는 말년에 한식산을 복용해 건강이 나빠졌고 정신병까지 생겼다. 밤새도록 홀로 중얼거리고 군신들과 회의를 할 때는 기분이 쉽게 변하여 신하들이 이전에 행한 악행이나 원한 관계를 끄집어내 살해했다. 이외에도 신하들을 기분에 따라 죽인 뒤 시체를 천안전 앞에 내버려 두니 인심이 술렁였다. 탁발규는 이전에 작은 이모(하란비)에게 반해 첩으로 들이려 ..
북위 vs 후연탁발선비 탁발규는 처음에 후연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동생 탁발고를 보내 공물을 바치기도 했으나 후연 내부에서 화친을 반대하고 선비족 탁발고를 인질로 잡자 후연을 선제공격하고 이를 판도에 넣었다. 이에 위진남북조 시대 강자였던 후연은 태자 모용보, 모용농, 모용린 등으로 반격을 개시했으나 패배한다. 그렇지만 영특했던 모용수도 말년엔 어리석은 모습을 보였으니 북위에겐 기회였다. 태자 모용보에게 명해 북위를 공벌케 했다. 성공하면 자연스레 보위를 이을 수 있었다는 계산을 했지만, 착오였다. 동진 효무제 태원 20년(395) 8월, 탁발규는 변경의 병사를 뒤로 물러나게 한 뒤 기습할 생각이었다. 대장 장연의 계책이었다. "연나라 군사는 최근 적교를 활대에서 격파하고, 장자에서 모용영(서연)을 멸..
위진남북조 시대, 중기에 접어들며 또다른 선비족 탁발선비가 등장한다. 탁발선비 대국 代國위진남북조 시대, 탁발부의 정치 활동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탁발역미의 손자 탁발의이, 탁발의려 형제 때부터이다.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으로 많은 한인이 참합에 근거지를 두었던 두 선비족 형제의 세력권 안으로 피난하였고 탁발의이 또한 병주자사 사마등에 호응하여 유연, 석륵과 대적했다. 이에 진 회제는 310년 대국공에 봉하니 이것이 대국代國의 시작에 해당한다. 탁발의려는 평성을 남도, 성락을 북도로 하였는데 이중 북도를 직접 다스리고 평성을 포함한 남부는 아들들에게 맡긴다. 이후 탁발의려의 장남 탁발육수는 아버지를 공격하여 승리했지만 탁발부는 이를 계기로 남부와 북부의 대치로 이어진다. 이를 하나로 합친 건 탁발의려의..
왕진악 죽음위진남북조 시대, 장안에서 두 군대가 합세하자 심전자는 헛소문을 퍼뜨린다. 왕진악이 남방 병사를 몰살하고 장안에서 모반을 일으킬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병사들이 서로를 의심했고, 왕진악은 심전자의 요청으로 부홍지의 대영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부홍지는 없고 심전자가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곧이어 심씨 일족인 심경인이 왕진악의 목을 베고, 왕진악의 형제와 사촌 등 7명을 더 죽였다. "유태위의 명을 받아 모반을 주도한 왕진악을 주살했다!" 부홍지는 심전자가 졸지에 자신의 영채 안에서 왕진악을 죽이자 매우 놀라 유의진에게 알렸다. 막료장 왕수 등은 심전자 일행이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장안성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아무 까닭 없이 대장을 죽인 죄로 그의 목을 베었다. 부홍지가 지양에서 혁련괴의 ..
의희 13년(417) 2월, 유유가 팽성을 출발했다. 왕진악과 단도제 등은 이미 동관에서 후진의 수비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후진은 전황이 끊임없이 불리해지자 북위에 원군을 요청한다. 당시 북위 조정에선 반대 여론이 강했고, 대신 최호도 이같이 말했다. "요흥은 이미 죽었고, 요홍은 나약합니다. 지금 유연柔然이 북쪽 변경을 노략질하고 있습니다. 유유와 싸우게 되면 남북으로 적을 맞이하는 셈이 됩니다. 유유의 청을 받아들여 저들을 서쪽으로 보낸 뒤 군사들을 요소에 배치해 동쪽을 지키면 됩니다. 만일 유유가 승리하면 우리가 길을 빌려준 것에 고마워할 것이고, 만일 패하면 저들이 철군할 때 공격을 가함으로써 요씨의 진나라를 도와줬다는 명분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북위 원제는 이를 듣지 않고 원군을 보냈다. 처음..
무리수를 둔 유의유유와 함께 환현을 토벌했던 유의는 처음에 유유와 대등한 위치였으나 이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가 돼버렸다. 유의는 이에 조정 내부에서 힘을 기르고자 끊임없이 더 많은 군권을 요구했다. 물론, 유유가 없는 상황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유유가 노순의 반란을 제압하고 입경하니 조정 내부의 분위기는 다시 한번 전환된다. 의희 8년 (412), 형주자사 유도규가 노환을 이유로 퇴임하자 유의는 형, 영, 진, 옹주 4개 주의 군사를 총괄했고 이후에도 자신의 측근들을 요충지의 대장으로 계속해서 임명한다. 유의는 이미 형주의 군부를 장악해 북으론 한수, 서쪽으론 파촉, 남으론 영남으로 연결되는 사통팔달의 요충지를 점거한 상태였다. 유유가 계속 유의의 이런 청을 들어준 건 자신감의 표시이기..
동진 유유의 북벌이 시작되었다. 목표는 남연. 남연 황제 모용초는 관문을 지키고 후방을 교란해 보급을 끊자는 의견보단, 대현관으로 들어오게 한 후 정병을 보내 싸우도록 명하는 패착을 저지른다. 유유의 예상과 딱 맞아 떨어진 것이다. "저들 선비족은 탐람한 까닭에 멀리 내다보는 계략이 없다." 남조 유유가 남연의 수도 인근 대현관에 다다를 때까지 남연의 병사는 한 명도 없었다. 위진남북조 시대 영웅 유유모용초는 단휘와 하뢰로에게 5만 보병으로 임구성을 지키게 하고 곧, 자신도 병사 4만을 이끌고 임구로 간다. 유유는 병거 4천 대로 장벽을 만들어 남연의 기병을 무력화시키고 3천의 병사가 지키는 임구성을 급습해 함락시킨다. 동진의 단휘는 추격전을 펼쳐 남연의 장수 10여 명을 벤다. 다음 날에도 광고의 외성..
후연, 후진 북방 상황후연이 창건될 당시 하동에선 모용홍이 서연을 세웠으나 16국에는 포함되지 못할 정도로 세력이 미약했다. 고작 2년 동안 보위가 7번이나 바뀌면서 최종적으론 모용외의 동생인 모용운의 손자 모용영이 황제가 되었다. 처음엔 후연의 번국을 자청했지만 386년 장자에서 황제를 선포했다. 중흥 8년(393), 남북조시대 영웅 모용수의 공격에 장자가 함락되며 모용영은 목이 베였다. 모용수의 뒤를 이은 모용보는 모용덕(전연의 황제 모용황의 막내아들이자 후연 모용수의 동생)에게 기, 연, 청, 서, 형, 예주 6개의 군사를 총괄케 했다. 당시 북위는 이제 막 건국된 신생 국가였지만 훗날 도무제로 추존되는 탁발규의 대군은 기세가 등등했다. 북중국의 최강자인 후연을 공격해 황제 모용보를 압박했고, 이내..
처음, 동진 무너뜨리고 황제가 된 환현(환온의 막내 아들, 환초 황제)은 제위에 올랐다. 그리고 황제 환현은 변범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옛날 양부는 언제나 내가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되도록 말렸었어. 이제 심복인 양부를 잃었고, 색원도 잃었다고. 그러니 무모하게 이런 당돌한 일을 함에 있어 하늘의 뜻을 헤아릴 필요가 있겠는가?" 아마도 남조에서 환현을 따르는 무리에서도 환현의 동진 황위 찬위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범상치 않은 ㅠㅠ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애초 그는 환현이 환온의 아들이기에 높은 직책에 오르는 것엔 찬성했지만 마침내 황제의 자리까지 빼앗자 두고 볼 수가 없었다. 환현도 그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았었다. 이제 갓 황제가 된..
이전 편 - 동진 내전 - 은중감, 환현, 오두미도 손은, 삼국지 [44화] 위진남북조 시대 동진에서 삼국지가 벌어지는데 ... 손은은 정동장군을 자처하며 회계의 관원을 죽이고 병사들과 그 시체로 국을 끓여 함께 나눠마시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리고 부녀자들은 아이들이 행동에 방해된다고 생각해 물속에 집어 던져 익사시키면서 이같이 주문을 외웠다. "먼저 신선이 된 것을 축하한다. 나는 교주를 알현한 후 너와 다시 만날 것이다." (원래 오두미도는 이렇지 않다) 당시 동진은 환현, 은중감, 양전기가 할거하고 있었으며, 조정 내부에 손은을 추종하는 신도들도 많았다. 그러나 손은의 반란은 오래가지 못했다. 은중감 휘하에 있던 유뢰지의 장수 ㅠㅠ 아니 ㅇㅇ 아니 유유가 이끄는 북부군에게 금세 궤멸한 것이다. 손은..
위진남북조를 가로지르는 비수대전 승리 이후, 동진은 이 기회를 틈타 양양, 익주, 양주 등지를 수복한다. 하지만, 중원 수복 의지는 약해 회수와 관중 일대의 요충지는 얼마 안 가 다시 잃는다. 전진 멸망의 원인은 비수대전 패배이다. 국력이 크게 손상된 것은 아님에도 부견의 무리한 융화 정책이 불러온 부작용으로 볼 수 있다. 강제적으로 살던 곳을 떠나 중원의 낯선 곳으로 이주한 이민족들의 고충을 부견은 이해했을까?황실과 가까운 저족들은 국가의 중심부가 아닌 변방으로 나간 것에 만족했을까? 부견은 꿈만 좇았지 현실적인 감각이 매우 떨어지던 인물로 보인다. "왕맹 같은 시어머니"가 곁에 없는 "뜬구름 잡기 대마왕 부견"의 패망은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큰일을 치룬 위진남북조 시대 동진 효무제 사마요는..
동진의 군사는 기세를 놓칠라, 빠른 속도로 전진의 군대를 추격했다. 동진은 곧 수양을 회복하고 전진의 회남태수도 포로로 잡는다. 그러나 전진의 전선이 꽤 길었기에 동진의 추격전도 그다지 오래가진 못했다. 후방의 전진 군대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기에 비수대전은 그걸로 끝이 난다. 부견은 모용수의 부대만이 진을 유지하며 퇴각했기에 그곳으로 몸을 의지했다. 배고픔과 화살에 맞은 통증 때문에 힘들었던 부견은 회수 부근에서 한 백성에게 밥과 돼지 넓적다리를 받자 비단 열 필과 솜 열 근을 하사하기도 했다. "폐하께서는 안락함에 싫증을 느끼셔서 스스로 위험과 곤경에 처하게 되셨습니다. 신은 폐하의 자식이고 폐하는 신의 아버지이시니 어찌 자식이 그 아버지를 봉양하고서 보답을 바랍니까!" 전진군의 전선이 길었고 선봉군이..
중국 전진 불안 요소부씨 일족의 저족은 봉건제의 여파로 전진의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었으나 중원엔 선비, 흉노, 강, 저 등이 섞여 살고 있었다. 겉으론 부강한 국가였으나 내부적으론 결코 안정적이라 볼 수 없는 불안 요소가 너무나도 뚜렷했다. "내가 대업을 이은 지 30년. 사방은 대략 평정되었으나 오직 동남 한구석만은 아직 왕화를 입히지 못하고 있었다." 이전에 부견은모용수 - 관군장군, 경조윤전연 마지막 황제 모용위 - 신흥후모용위 동생 모용충 - 평양태수구지 양통 - 평원장군, 남진주자사전량 장천석 - 귀의후강족 요장 - 양무장군에 임명했었다. 비수대전 이후 중국 전진이 빠르게 해체된 이유다. 결국 부견은 왕맹의 간언과는 정반대의 행위를 벌인 것이다. 매우 위험하고 누구나가 우려할만한 조치였다. 중..
북조 통일왕조 전진, 세상을 떠나는 왕맹 전진 건원 6년 11월의 일이었으니 병사를 일으킨 지 고작 1년도 되지 않아 전연은 전진에 멸망했다. 전연을 멸망시킨 부견은 양주의 전량국 장천석에서 투항을 권했고 장천석은 번국을 칭한다. 이후 부견은 요장을 보내 양주를 함락시키고 장천석은 장안으로 끌려와 시중, 비부상서, 귀의후에 봉해진다. 이후 그는 비수대전에서 패배할 당시 동진에 투항하여 효무제에게 중용되었다. 그러나 부견에게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으니, 건원 11년(375), 왕맹이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직전 유소를 올렸다. "폐하는 공업이 쉽게 이뤄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응당 전전긍긍하며 여림심연如臨深淵(두려워하고 조심하고 삼가며, 깊은 못 가에 서 있는 듯, 얇은 얼음을 밟듯 하라..
부견과 그의 참모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저족을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저족 번세를 죽여 황제의 권위를 높이는 한편, 중앙 정부의 군사력 확충을 위한 일화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외에도 제후왕들의 작위를 공公으로 낮췄다. 그러나 백성에겐 따뜻했던 부견은 중농억상 정책으로 세금과 요역을 크게 감면하고 태학의 학생들을 격려했다. 호한분치에서 호한융합으로 가는 시발점이었다. 이는 큰 반발에 부딪혀 흉노 좌우현왕과 부생의 형제인 부류, 부쌍, 부유 등이 반란을 일으킨다. 부견은 이를 빠르게 제압하고 국외로 시야를 돌린다. 동진 환온의 북벌 당시 전연은 전진에게 땅을 떼어주는 조건으로 구원을 청했었다. 호뢰 이서의 땅, 그 땅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부견은 악덕 채무자에게 원금과 이자를 꼭 받아내려 했다...
위진남북조 시대 전진秦은 부씨符씨 황제들이 다스린 나라다. 전진의 특징은 건국에서 멸망까지 지나치게 참언에 휘둘리는 경향이 짙었다는 것이다. 부견의 조부 부홍의 성은 원래 포蒲씨로 "초부응왕草付應王"이란 참언에 따라 성을 바꿨다. 포홍은 하남에서 거병했으며, 부견의 백부 부건은 황시 2년(삼진왕을 칭하던 당시의 연호, 352) 황제를 칭했다. 부홍(부견 할아버지)은 이후 6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며, 세자 부건(부견 큰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했다. "중원은 너희 형제들이 능힘 점거할 곳이 아니다. 관중의 형세가 좋으니 내가 죽은 뒤 서쪽으로 진격해 이를 취하도록 하라!" 환온의 2차 북벌 이후 부건은 몰래 관중 일대를 공격해 동진의 장수 두홍과 장선을 격파하고 장안을 도성으로 삼았다. 이미 독립 상태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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