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는 생전에 칭제를 하지 않았다. 다만, 여러 차례 문서를 통해서만 아들(조비인지 누군지 하여간 누가 됐건)이 찬위할 여지는 남겨두었다. 5호 16국. 위진남북조 시대의 막바지에 동위를 지배한 고환도 조조와 마찬가지였다. 고환은 하급 소대장 출신으로 이주씨가 효무제 원수를 옹립하자 효정제 원선견을 옹립했었다. 동위 효정제 무정 2년(544), 고환이 아들 고징을 대장군, 영중서감, 섭이부상서에 임명했다. 고징은 옛 친구들이 자신에게 무례하거나 뇌물을 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 고환은 생전에 이런 말을 했었다. "공들은 되도록 내 아들을 피하도록 하시오." 고징은 고환 사후 지방의 군벌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되어 발상을 미뤘다. 실제로 하남에서 반란(후경)이 일어나자 한궤에게 명해 이를 토벌하고 ..
위진남북조 중기 - 양원제 승성 2년(553) 10월, 왕승변은 건강, 진패선은 경구에 주둔케 했다. 승성 3년(554) 4월, 서위의 사자를 북제의 사자보다 홀대했다는 이유로 우문태가 11월에 출병을 명한다. 우근, 우문호, 양충 등이 한수를 넘어 강릉에서 40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황화에 이르렀다. 왕승변을 대도독으로 삼고 진패선에겐 양주로 군영을 옮기게 했다. 소역은 밤에 봉황각에 올라가 천문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객성(혜성처럼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별)이 형초의 영역으로 들어왔으니 우리가 필히 패하겠구나!" 강을 건너는 서위 군을 왕포, 호승우, 주매신, 사답인 등이 영격했지만 모두 패했다. 목책을 두고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 양나라 장수 호승우가 유시에 맞아 전사한다. 서위군은 여세를 몰아 목책..
양무제 태청 원년(547) 9월, 양무제는 조카 정양후 소연명에게 15만의 대병을 주어 동위 토벌을 명한다. 소연명은 계책도 없고 황족임을 내세운 교만한 소인배였다. 처음 제장들의 반대에도 팽성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고, 원군으로 합류한 동위 모용소종의 기습이 벌어지자 작은 손해를 입곤 겁에 질려 서둘러 철군한다. 당시 모용소종은 양나라 곽봉의 진영을 급습했으나 실패했었다. 소연명은 예하 장수들이 잘 막아냈음에도 이것에 겁을 먹고 철군을 결정했었다. 이에 노련한 모용소종이 거짓으로 먼저 철군한다. 양나라 군대의 군율이 엄격하고 방비도 철저해 쉽게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내가 먼저 짐짓 퇴각하는 모습을 보여 적들이 쳐들어오도록 유인할 것이다. 너희는 기회를 보아 그들의 배후를 격살하라!"..
이젠 시선을 위진남북조 시대 남쪽으로 돌려보자.그곳엔 싯다르타 덕후 소연(= 양무제)이 다스리는 양나라가 있다. 당시, 위진남북조 시대의 남조인 양나라 황제와 신하들은 사치스러웠고,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승려가 되길 원했으며, 일반 백성들은 가혹한 세금과 굶주림에 시달렸다. 부유했던 강남의 사회가 거의 무너져 내렸다. 그럼에도 양무제는 무너져가는 남조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조정에서는 오히려 공덕을 쌓았다(부처에게 돈을 많이 바쳤으니 다 괜찮다~라는 의미). 조정에서 쓰는 것은 모두 정원에서 나온 식물이고 하나의 호박을 변화시켜 수십 종류로 만들었고 하나의 나물을 변화시켜 수십 가지의 맛을 내게 한 것이어서, 변화를 시켜서 많은 것을 만들었으니, 어떤 일에도 손해를 끼치지 않았다."..
옥벽지전(玉璧之戰)은 망산지전 이후 3년이 지난 546년. 동위 무정 4년(546), 서위 문제(원보거) 대통 12년(546)에 일어난다. 서위와 동위의 5차 회전으로 마지막 회전이기도 하다. 2월, 양주에서 우문중화가 토욕혼과 반란을 일으키지만 금세 제압된다. 이때 영천의 동위 후경이 형주로 진격하나 서위 조정은 이 역시 막아낸다. 10월, 동위와 서위의 마지막 회전이 벌어진다. 고환은 친히 10만 대군으로 분하 하류의 서위 요충지인 옥벽(지금의 산서 직현의 서쪽)을 겹겹이 포위한다. 서위의 장수 위효관에겐 고작 수천의 병사밖에 없었다. (위진남북조 시대 가장 처절했던 공성전) 고환은 서위의 분수 하류에 있는 주요 거점을 없애고자 밤낮으로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한편으로 성의 남쪽에 토산을 쌓고, 다시..
3차 하교지전(538) 이후 5년이 흐른 동위 효정제 무정 원년(543) 다시 전쟁의 불이 붙는다. 이것이 남북조 시대 유명한 망산지전이다. [주로 여기 참조] 전쟁의 원인은 고환의 아들 고징은 여색을 밝혀 고중밀(고오조의 형)의 처 이씨를 강간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비슷한 시기에 북예주 자사로 임명된 고중밀은 이같은 사실에 앙심을 품고 서위에 투항한다. 동위의 요충지 호뢰관이 서위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에 동위와 서위의 네 번째 회전이 벌어진다. ▶ 말썽꾸러기 고징훗날 남북조 시대 북제의 황제게 오르는 고징은 532년 효정제孝靜帝의 누이동생 풍익장공주馮翊長公主를 아내로 맞습니다. 고징은 14세 때 부친 고환이 총애하는 희첩 정대거와 간통했다가 부친에 의해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당시 사마자여가 중간에 ..
위진남북조 시대 천평 4년(537), 동위 서위간에 사원지전이 폭발한다. (2차 회전 이 글을 주로 참고해 작성) 8월, 우문태는 이필, 독고신, 양어, 조귀, 우근, 약간혜, 이봉, 유량, 왕덕, 후막진숭, 이원과 달해무등 12명의 장수를 이끌고 동위로 진격한다. 병력이 동관에 이르렀을 때, 우문태는 병사들 앞에서 맹세하며 말한다. "이번 출병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폭란한 자를 주살하기 위한 것이다. 모두 여러 병사에게 달려 있다. 무기와 전마를 잘 정돈하여, 혈전에 대비하라. 재물을 탐하거나 적을 경시하거나, 흉포하게 행동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명령을 따르는 자에게는 상을 내리고, 명령을 어기는 자는 죽일 것이다!" 바로 우근을 동정선봉으로 삼아, 그날로 반두(盤豆, 지금의 허남성 양평의 서북)..
북위 절민제 즉위석 달 후, 건명 2년(531), 이주씨 일족은 광릉왕 원공을 새로 옹립하니 그가 위진남북조 시대 절민제이다.이주천광은 관우, 이주조는 병주와 분주, 이주중원은 서주와 연주를 점거했고 이주세륭은 조정을 장악했다. 이전에 이주영에게 칭제를 권했던 고환은 이미 수만 명의 지휘권을 얻은 상황이었으며, 위진남북조 시대 발해군의 고건 형제, 봉씨 일가, 범양 노씨 일가, 조군 이씨 일가들의 사병과 연계를 성사시켜 이주씨 타도의 총수로 추대된다. 중흥 2년(532) 초, 고환은 효장제 살해를 이유로 군사를 일으켜 효무제를 옹립하고, 광하에서 이주씨 군사를 대파한다. 고환은 전마 2천 필에 병사 3만에 지나지 않았으나 휘하 고오조가 분전해 업성의 이주씨 20만 대군을 대파했고, 4월엔 곡사춘이 하교를..
이주영은 황하를 사이에 두고 진경지와 대치했다. 3일 동안 열한 번 싸워 모두 패하자 빠르게 도강하여 역습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이것이 성공하여 원호의 아들 원관수를 포로로 잡았다. 이에 원호 휘하의 안풍왕 원연명 휘하의 군사들이 사방으로 도주해 군세가 약해지고 곧 낙양이 함락됐다. 이에 원호에게 투항했던 수많은 성이 다시 북위로 귀항했으니 양나라 병사들은 퇴각을 시작했다. 원래 병력도 적었고 이주영의 추격군이 빠르게 들이닥치자 진경지 조차도 승려 복장을 하며 간신히 양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원호는 임영까지 도주했으나 임영현의 병사에게 죽임을 당하고 수급은 낙양의 이주영에게 보내진다. 원호의 난을 평정하자 효장제 원자유는 이주영을 위로한다. 이주영은 원호에 호응했던 만사추노 등을 제압해 하주, 위주,..
(하음의 변) 당시 효장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줄 몰랐으나 형인 원소와 동생 원자정이 병사들에게 끌려가 토막 나 살해되는 모습은 목격했다. 이에 효장제는 이주영에게 찬위할 생각이 있으면 그리하라 이른다. 이주영 휘하의 장수들은 이에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제왕의 흥망과 성쇠는 무상한 법이오. 만일 천명이 장군에게 돌아간다면 장군은 응당 때에 맞춰 존호를 받아야 할 것이오." 휘하의 고환이 칭제할 것을 권했으나 거부한다. 위나라 신하 이주영얼마 후 이주영은 본인이 저지른 짓이 너무나도 흉포하다는 것을 깨닫고 환궁한 이후 효장제를 향해 머리를 거듭 조아리며 벌을 줄 것을 요청했으나 효장제는 그리할 수 없었다. 당시 왕공 대신을 도륙하자 낙양의 백성들은 두려운 나머지 급히 도성을 빠져나갔다. 성내 인구는 1..
북위 영태후 시기. 당시, 조정 내부에선 변란이 일어나 청렴하며 재능도 있고 문학도 뛰어났던 청하왕 원역이 매관매직을 일삼던 영태후, 유등, 원예를 비난했다. 유등은 크게 두려워하며 원역을 모함한 뒤 살해했다. 너무 어렸던 효명제 원후는 유등의 거짓말에 속아 충신 원역을 죽이라는 조서를 내렸었다. 이어 유등은 영태후의 동생 남편인 원예와 조서를 꾸며 영태후를 연금시켰다. "호랑이(유등)를 키우다 물린다고 하더니 바로 내(영태후)가 그 꼴이 되었구나!" 원예, 원예 부친 경조왕, 유등은 계속해서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변방 6진의 군사들을 가혹하게 착취하며 사사로이 남조와 교역해 부도 쌓았다. 위진남북조 시대 제국은 이렇게 서서히 몰락한다. 이때 국인國人의 처우도 빼앗기고 가혹한 수탈을 당하던 6진의 군민들..
풍태후 사후 진정한 황제가 되어 한화 정책을 추진했던 위진남북조 시대 효문제 원굉의 치세가 저문다. 북위 효문제 태화 21년(497), 20만 명의 군사를 동원해 제나라로 진격했으나 남제 남양 태수 방백옥의 복병계에 걸려 거의 죽을 뻔했다. 이듬해엔 제명제 소란이 죽자 국상이 있는 나라는 치지 않는다며 이내 철군했다. 499년, 효문제가 사망하고 황태자 원각이 즉위하니 이가 북위 선무제다. 선무제는 황숙 원희가 모반하자 원씨 종친을 불신하고 외숙인 고조를 신임했다. 그 배경엔 자귀모사의 원칙을 어기고 살아남은 그의 생모 영태후(호씨라서 호태후라고도 함)가 있었다. 자귀모사를 어긴 이 시기부터 북위는 점차 쇠락의 길을 걷는다. 고조가 붕당을 결성해 북해왕 원상, 청하왕 원역을 사사로이 죽이고 권위를 높이기..
북위 효문제 모순 - 한화정책 효문제 태화 19년(495)엔 제나라 공격을 감행했으나 무덥고 습한 날씨에 군수품 조달이 늦어지면 소득 없이 귀환한다. 이해 7월, 북위는 5호 16국 국가들이 행해오던 호한분치를 버리고 한화漢化를 공식적으로 천명한다. 물물교환 방식을 버리고 태화오수전을 주조해 화폐 개혁을 시도했고, 낙양에 국자감, 태학, 사문소학을 두었다. "오늘 짐(효문제 탁발굉)은 선비어를 포함한 모든 북방어를 금지하고 한어로 통일해 쓰기로 했다. 30세 이상의 관원은 이미 오랜 습관이 된 까닭에 서서히 바꾸는 것을 윤허하나 조정에서 오랫동안 봉직한 30세 이하의 관원은 선비어로 말하는 것을 금한다. 이를 어길 경우 곧바로 강등과 면직 조처를 취할 것이다." 북위 태화 20년(496), 탁발씨를 원씨..
효문제 태화 17년(493), 북위 황제 효문제(탁발굉)는 낙양 천도를 결정했다. "평성은 매우 한랭했다. 6월에도 비와 눈이 내리고, 모래바람이 수시로 불었다. 이에 낙양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위진남북조 시대 사서인 위서의 기록에 따르면 기후로 인해 천도를 결정한 것이나 내막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국력이 커질수록 수도인 평성으로 몰려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이들이 머물 집과 식량 문제가 생긴 것이다. 가축으로 식량을 옮기더라도 중간의 소진분이 너무 커서 이 또한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북쪽의 유연과 수도의 거리가 가까웠고, 북중국 통일 이후엔 국가 유지를 위한 행정의 문제도 생겼다. 이에 북위 효문제는 낙양 천도를 결정하고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이전에 북위 중신들 사이에선 만약 "수도를 이전한다면..
북위 헌문제 연흥 6년(476) 8월, 풍태후가 술에 독을 타 헌문제 탁발홍을 살해한다. 풍태후는 태황태후가 되어 국가 대정을 장악했고 보위에 오른 효문제 탁발굉은 12세에 불과했다. 북위 효문제 탁발굉은 황제가 되어서도 풍태후(문명태후)한테 체벌 당하며 성장한다. ㅠㅠ 이 일이 있기 12년 전인 문성제 화평 5년(464), 위진남북조 시대 유연의 가한 토하진이 죽고 아들 여성予成이 뒤를 잇고 자신을 수라부진가한이라 칭하며 연호를 영강永康이라 하였다. 이전의 가한처럼 그도 북위의 북방을 공격하여 약탈하였다. 6년 뒤인 헌문제 황흥 4년(470), 경조왕 원자추, 동양공 원비, 임성왕 원운, 여음왕 원천사, 제남공 나오발, 농서왕 원하에게 명해 태무제 탁발도 시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연 토벌에 마침표를 찍..
탁발도가 남정에 나섰을 때 태자 탁발황이 감국으로 있었는데 휘하의 도성이 탁발도가 총애하는 태감인 종애와 반목했다. 종애는 탁발도가 돌아오자 도성 일당의 죄를 날조해 보고했고 탁발도는 이에 도성 일당을 죽인다. 탁발황은 이에 병을 얻어 곧 사망하고 종애는 탁발도가 추궁할까 두려운 나머지 늦은 밤, 영안궁에서 자고 있던 탁발도를 죽였다. 황망한 5호16국 시대 영웅의 죽음이다. 다음 날, 황태자에 이어 황제가 죽자 황제의 손자 탁발준이 보위에 올라야 했다. 그러나 나이가 어려 상서좌복야 난연, 시중 화정, 시중 설제는 탁발도의 3남인 북위 진왕 탁발한을 옹립고자 했다. 그러나 종애가 미리 눈치채고 무장한 태감들로 이 세 사람을 죽인 뒤 탁발한 마저도 살해한다. 그리고 조서를 조작해 오왕 탁발여를 보위에 올..
북연이 혼란스러운 위진남북조 시기, 탁발도는 북연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가해 10여 개 큰 군을 먼저 손에 얻는다. 풍홍은 송나라에 칭신했으나 송나라도 별수가 없었다. 북위 연화 2년(433), 풍홍은 용성 아래에 북위군이 진을 치자 몰래 고구려로 도망쳤으며 북위군은 용성을 불태운다. 풍홍은 이후에 송나라로 도망치려 하거나 황제 노릇을 하려 했기에 고구려 장수왕에게 일족과 함께 주살 당한다(437년). 이전에 동생 탁발고를 인질로 잡아 두었다가 살해한 정동과 부고패의 5족도 도살했다. 이후 등장할 유명한 북위의 풍태후는 풍홍의 손녀이기도 하다. 탁발도의 북방 통일을 위해 남은 건 북량 정벌뿐이다. 북량은 옛 전진의 신하 여광이 세운 후량의 후신으로 여광의 부하 저거몽손은 여광을 배신하고 단업을 양왕凉으..
개혁 군주 탁발규 말년천사 원년(404), 모든 부락의 자제에게 대대적으로 작위를 내렸는데 왕이 10명, 공이 22명, 후는 79명, 자는 103명에 달했으니 이는 선비족(탁발선비)의 나라 북위 말기에 중앙 정부의 재정적 부담으로 작용하게 된다. 마치 명나라 말기처럼 국가 재정으로 놀고먹는 자들을 챙기기엔 부담이 컸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진남북조 시대 영웅인 탁발규는 말년에 한식산을 복용해 건강이 나빠졌고 정신병까지 생겼다. 밤새도록 홀로 중얼거리고 군신들과 회의를 할 때는 기분이 쉽게 변하여 신하들이 이전에 행한 악행이나 원한 관계를 끄집어내 살해했다. 이외에도 신하들을 기분에 따라 죽인 뒤 시체를 천안전 앞에 내버려 두니 인심이 술렁였다. 탁발규는 이전에 작은 이모(하란비)에게 반해 첩으로 들이려 ..
북위 vs 후연탁발선비 탁발규는 처음에 후연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동생 탁발고를 보내 공물을 바치기도 했으나 후연 내부에서 화친을 반대하고 선비족 탁발고를 인질로 잡자 후연을 선제공격하고 이를 판도에 넣었다. 이에 위진남북조 시대 강자였던 후연은 태자 모용보, 모용농, 모용린 등으로 반격을 개시했으나 패배한다. 그렇지만 영특했던 모용수도 말년엔 어리석은 모습을 보였으니 북위에겐 기회였다. 태자 모용보에게 명해 북위를 공벌케 했다. 성공하면 자연스레 보위를 이을 수 있었다는 계산을 했지만, 착오였다. 동진 효무제 태원 20년(395) 8월, 탁발규는 변경의 병사를 뒤로 물러나게 한 뒤 기습할 생각이었다. 대장 장연의 계책이었다. "연나라 군사는 최근 적교를 활대에서 격파하고, 장자에서 모용영(서연)을 멸..
위진남북조 시대, 중기에 접어들며 또다른 선비족 탁발선비가 등장한다. 탁발선비 대국 代國위진남북조 시대, 탁발부의 정치 활동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탁발역미의 손자 탁발의이, 탁발의려 형제 때부터이다.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으로 많은 한인이 참합에 근거지를 두었던 두 선비족 형제의 세력권 안으로 피난하였고 탁발의이 또한 병주자사 사마등에 호응하여 유연, 석륵과 대적했다. 이에 진 회제는 310년 대국공에 봉하니 이것이 대국代國의 시작에 해당한다. 탁발의려는 평성을 남도, 성락을 북도로 하였는데 이중 북도를 직접 다스리고 평성을 포함한 남부는 아들들에게 맡긴다. 이후 탁발의려의 장남 탁발육수는 아버지를 공격하여 승리했지만 탁발부는 이를 계기로 남부와 북부의 대치로 이어진다. 이를 하나로 합친 건 탁발의려의..
왕진악 죽음위진남북조 시대, 장안에서 두 군대가 합세하자 심전자는 헛소문을 퍼뜨린다. 왕진악이 남방 병사를 몰살하고 장안에서 모반을 일으킬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병사들이 서로를 의심했고, 왕진악은 심전자의 요청으로 부홍지의 대영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부홍지는 없고 심전자가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곧이어 심씨 일족인 심경인이 왕진악의 목을 베고, 왕진악의 형제와 사촌 등 7명을 더 죽였다. "유태위의 명을 받아 모반을 주도한 왕진악을 주살했다!" 부홍지는 심전자가 졸지에 자신의 영채 안에서 왕진악을 죽이자 매우 놀라 유의진에게 알렸다. 막료장 왕수 등은 심전자 일행이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장안성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아무 까닭 없이 대장을 죽인 죄로 그의 목을 베었다. 부홍지가 지양에서 혁련괴의 ..
무리수를 둔 유의유유와 함께 환현을 토벌했던 유의는 처음에 유유와 대등한 위치였으나 이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가 돼버렸다. 유의는 이에 조정 내부에서 힘을 기르고자 끊임없이 더 많은 군권을 요구했다. 물론, 유유가 없는 상황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유유가 노순의 반란을 제압하고 입경하니 조정 내부의 분위기는 다시 한번 전환된다. 의희 8년 (412), 형주자사 유도규가 노환을 이유로 퇴임하자 유의는 형, 영, 진, 옹주 4개 주의 군사를 총괄했고 이후에도 자신의 측근들을 요충지의 대장으로 계속해서 임명한다. 유의는 이미 형주의 군부를 장악해 북으론 한수, 서쪽으론 파촉, 남으론 영남으로 연결되는 사통팔달의 요충지를 점거한 상태였다. 유유가 계속 유의의 이런 청을 들어준 건 자신감의 표시이기..
처음, 동진 무너뜨리고 황제가 된 환현(환온의 막내 아들, 환초 황제)은 제위에 올랐다. 그리고 황제 환현은 변범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옛날 양부는 언제나 내가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되도록 말렸었어. 이제 심복인 양부를 잃었고, 색원도 잃었다고. 그러니 무모하게 이런 당돌한 일을 함에 있어 하늘의 뜻을 헤아릴 필요가 있겠는가?" 아마도 남조에서 환현을 따르는 무리에서도 환현의 동진 황위 찬위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범상치 않은 ㅠㅠ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애초 그는 환현이 환온의 아들이기에 높은 직책에 오르는 것엔 찬성했지만 마침내 황제의 자리까지 빼앗자 두고 볼 수가 없었다. 환현도 그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았었다. 이제 갓 황제가 된..